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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잠된 마음 위로 스스스-물이 흘러가듯, 시간이 흘러가듯 흔적을 남기고 지나간 것은 사내의 눈빛이던가. 
 아랫배 결을 세워 피부 위를 지나는 다리 잃은 미물의 움직임이던가. 먹잇감을 마주한 승리자의 콧노래이던가. 
 죽음을 위한 찬미이던가. 갈라진 혀의 웃음일지도.
 

 

 



 붕 뜬 기분은 꼭 어릴 적 타던 환상특급의 낙차와 다를 바 없다. 하얀 얼굴과 부드럽고 긴 머리카락,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가 제법 수줍은 여성. 한산한 지하철의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건너편에 창백한 얼굴을 비추어보며 떠올렸던 상대들은 평범한 변수의 범주에 끼워 볼만한 것이었다. 예상 가능한 수치들, 그러나 한 바퀴를 돌아 예고 없이 낙하하는 놀이기구라도 탄 듯 머릿속이 어지러운 만남이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김정환입니다."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손을 쥐어채며 청해오는 남자의 악수에 놀라 선뜻 대답을 하지 못 했다. 통성명을 하기도 전 최택씨 맞으시지요-하고 선수를 치는 남자의 웃음은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 택과 정반대로 확신에 차 있었다. 머리를 쿵 때리는 기분은 확인 도장처럼 선명하다. 몸이 유려하게 뻗은 장신의 남자는 자리를 벗어나 택의 의자를 빼주었다. 난데없이 공주 취급이라도 받은 듯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택은 남자가 자리를 찾아 앉기도 전에 연거푸 물을 들이켰다. 황망한 마음만큼이나 빠르게 비워지는 택의 물 잔은 벌써 네 번째 채워지던 참이었다.
 물들이 키는것을 바라보는 남자 앞에서 택은 어쩐지 맹수 앞의 작은 동물처럼 숨이 막혔다. 오아시스에 정신이 팔려 당장 죽을 줄을 모르는 초식동물 같은 기분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꽤 끈덕졌다. 그는 갈증난 사막 위에 선 듯 물만 들이키는 택의 모습에도 채근 없이 기다려주었다. 네 번째 잔을 비우고 나서야 최택입니다, 이미 아시는 거 같지만-하는 기척을 주었다. 건너편의 사람이 사내가 아니라고 한다면 택이 생각해온 선자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이상한 시간이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와인잔을 채워 주는 남자의 모든 행동은 적정선이 있어 부담스럽지 않았고 그의 모든 일련의 행동들은 몸에 밴 듯 자연스러웠다. 채워진 와인으로 입술 끝만 겨우 축이며 와인잔 주둥이 너머로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옆으로 뻗은 서늘한 눈매는 택의 동그란 눈과 공중에서 마주칠 때마다 부드럽게 휘었고 옅은 삼백안끼는 입꼬리를 올려 웃어주지 않았다면 말 붙이기조차 퍽 어려운 인상을 자아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세요?"
 소음을 이명삼아 깊이 잠겼던 의식은 파열음도 아닌 남자의 목소리에 놀라 돌아온다. 아, 아니요-다급하게 씹어 넘기는 음식들은 맛을 느낄새도 없이 허무하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쫓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허겁지겁 삼킨다 싶던 택이 결국 사레에 들려 물을 들이켰다. 허연 얼굴은 터질 듯 붉어져 한참을 고통스러워하다 잔기침과 함께 겨우 멎었다. 코앞으로 허연 냅킨을 뽑아들어 택에게 전해주는 손가락이 하얗고 길었다. 손가락 사이에 들려 있는 냅킨을 받아 물기 어린 입술을 찍어내는 택의 이마께에 닿는 남자의 진득한 시선이 따가웠다. 

 "생각지 못하셨던 일이라 놀라셨겠네요."
 속을 훤히 들여다본 듯 당연한 소리는 어찌 보면 물어오는 것이 더 어이없는 궤변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하고 매섭게 쏘아붙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하는 것이 옳았지만 그럴 깜냥의 위인이 못되었다. 한번 들어봄직한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멍청한 합리화에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안절부절하는 궁둥짝을 의자에 깊숙이 밀어 넣어 안주하는 것이 취하는 자세의 전부였다. 반절이나 남은 음식 위로 식기를 갈무리하며 내려놓은 남자는 입가를 꼼꼼히 닦아내고 물로 입안을 헹궈낸다. 그가 행하는 모든 행동이 숙련된 듯 부드럽게 이어졌다. 나이프를 놓쳐 귀를 긴장시키는 쨍한 소리로 주위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포크까지 놓쳐 허둥대는 자신의 모습과는 상반되어 낯이 화끈 거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는 택의 시야로 들어오는 하얀 봉투는 정지된 시간처럼 낯설었다. 쭈뼛-등허리가 긴장된다. 포크를 들던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되었다. 숙여졌던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몸을 일으킨 택이 하얀 봉투를 집어 든다. 선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임을 알면서도 풀칠도 하지 않아 입구가 벌어진 두툼한 봉투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내용물을 천천히 꺼내 확인했다. 겹겹이 겹쳐진 하얀 종이 위의 글을 읽어내리던 택이 그제야 픽 웃음을 터트렸다. 기가 찬다는 듯한 웃음은 더 이상 볼 것 없다는 듯 종이를 구겨 테이블 위로 던져 놓으며 거두어졌다. 웃음이 사라진 얼굴은 냉랭했다. 손끝이 하얗게 새도록 종이를 구긴 손은 울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의자 밀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떠난 빈자리에는 기분만큼이나 구겨진 봉투와 서류들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늦가을로 들어선 기온은 낮과는 다르게 어둑어둑해지면 재킷 여미는 손길들이 분주해지도록 그 격차가 컸다. 호텔 로비를 지나 쉴 새 없이 들어서는 차들이 가득한 호텔 입구에 선 택은 낮은 도로 턱에 발끝을 아슬아슬하게 걸쳐 하릴없이 몸을 흔들었다. 이상하게 떨어지지 않는 발길에 여기저기 의미 없는 시선을 둔다. 급하게 마련된 선자리라며 등을 떠밀던 고모 내외의 의중을 조금이라도 의심했더라면 하는 생각은 뒤늦어 의미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친부모처럼 택을 돌보아준 노고를 생각해 과하다 싶은 부탁에도 싫다는 소리를 하지 못 했던 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천사처럼 좋은 분들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으나 허망한 기분을 감출 길 없어 결국 턱 끝을 바닥으로 툭 떨구고 한숨을 쉬었다. 계약서라는 검은 글자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종잇조각은 여전히 명확한 실체로 손에 쥐일 것처럼 택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몇 줄이나 읽었을까, 잔뜩 곤혹스러워진 택의 눈이 남자를 바라보았을 때에도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씨받이라도 되라는 겁니까?
 택의 입을 타고 흘러나온 점잖지 못한 단어의 이질감에 정환은 어깨를 떨며 웃는다.
 "단어가 꽤 공격적이긴 하지만 최택씨 입장에선 충분히 그렇게 느껴질 만도 하다 생각해요."
 호감 가는 얼굴과 짜인듯한 매너는 그동안 그의 미소를 진심 어린 것으로 포장하기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주쳐 오는 남자의 눈은 미동조차 없었다. 호선을 그리는 입매는 웃고 있었으나 눈은 겨울 언 땅처럼 줄고 얼어붙어 웃고 있지 않았다. 오랫동안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택은 서류 위에 클립으로 끼워져 있던 조그마한 명함 귀퉁이를 매만졌다. [김정환]이라는 이름이 찬연한 금박으로 덧입혀져 한 뼘도 되지 않는 종이 조각 속에서 정환의 삶의 방식이 엿보였다. 오래 본 사람이라도 되던가, 어디서 봤던 듯도 하고. 이상하게도 앞에 앉은 낯선 남자의 얼굴이 낯설지 않게도 느껴졌다. 
 어떻게 아셨어요?-주어없는 질문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정이사님 봐주시는 닥터가 저랑 같아요-별스러운 일도 아니라는 듯 대답하는 남자 덕분에 아아-하고 대답해버리고 만 택의 마음은 그러나 참으로 별스러웠다. 사고능력이 뚝뚝 끊기듯 복잡한 마음, 별세계를 떠도는 듯 멍한 정신을 다잡은 택이 주먹을 꼭 쥐었다. 마지막 보루를 던지기 위해. 설마 하는 마음이 앞서서.

 "원하시는 바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뤄드리지 못할 겁니다."
 저는 반류도 아니고-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다시 자신감을 잃었다. 반류/원인과 같은 서류 곳곳에서 읽히는 단어들. 고등교육을 마친 자라면 한번 들어는 봤을 법한 보편적인 단어지만 택과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렇다고 자주 쓰이는 익숙한 단어는 아니었다. 단지 생물 시간 1점이라도 더 따기 위해 외워두었던 것들 정도일 뿐.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문서의 요지는 그것이었다. 반류인 김정환과의 계약 결혼, 그것도 영구적으로 존속되는 그 끝에는 출산이라는 기함할만한 결과까지 덤으로 붙은. 김정환과 택의 고모부이자 무성 전자 이사인 정기현의 모종의 협의, 그 협의의 중심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도 최택이라는 이름이 끼어 있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부분은 그것이었다. 택에게 반류니 원인이니 하는 것들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제3세계의 이야기였다. 그들이 말하는 원인, 쉽게 말해 평범한 인간 남성으로 태어나 거의 30년의 세월을 살아온 택에게 반류인 김정환과의 만남은 그 어떤 것보다 무의미한 일이 아닌가 싶어 택은 속으로 웃었다. 결혼, 임신, 출산 싸구려 잡지의 뒷머리나 장식할 체험수기 같은 이야기가 그 누구보다 현명해 보이는 남자의 머릿속에서 나오다니 이 남자 어디가 미쳐버린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세상엔 생각지 못한 일들도 방법들도 존재하니까요- 택의 속내라도 들여다보듯 담담하게 대답하는 정환의 답변에 식탁 아래 쥐고 있던 택의 손은 땀으로 가득했다. 생각지 못한 방법이라. 확신에 찬 정환을 보며 택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킨다.  

 "저희 고모부, 아니 정이사님이랑 김정환씨 두 분 사이에 오고 간 말들이 어떤 것들이고 어떤 이유인지는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 본 것들은 없었던 일로 하죠.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야멸찬 표정의 택이 몸을 일으키자 함께 일어선 정환이 정중히 허리까지 굽혀 인사를 한다. 돌아서 나오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목표로 했던 지하철역은 이미 지나쳐 걷고 또 걸었다. 약속 장소를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잔뜩 새된 목소리의 고모의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폰에 뜨는 번호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다 통화 버튼을 눌러 받자 시작부터 끝까지 볼멘소리였다. 다그쳐 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죄송해요 하는 대답밖에 할 수 없어 마음이 답답했다. 분명 죄송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본인 의사 존중은 없이 자기네들끼리 결정해 도매금에 팔아넘기듯 사인까지 해 놓고 되레 화를 내는 혈육의 처사가 한 편으로는 마음이 쓰리고 목구멍이 홧홧했다. 하지만 여전히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고모-하는 대답은 택의 몫이었다. 쓴 물이 혀끝을 타고 목구멍 너머로 흘러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때늦게 밟히는 낙엽 버석거리는 소리에도 택의 마음은 소용돌이쳤다. 
 



 다시 볼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하고 마음을 담은 말 한마디, 정환을 향해 내보였던 강력한 거절의 의사. 대부분의 경우 무리 없이 통하던 언어의 순기능을 너무 믿고 있었던 탓일까. 로비의 까페에 앉아 햇볕 내리쬐는 창밖을 보는 택의 마음은 지쳐있었다. 낮게 울리는 까페의 음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늦은 새벽 집으로 돌아온 택이 씻지도 못한 채 침대 위에서 쪽잠을 잤던 그날 이후, 건너편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던 남자의 저열한 밑바닥을 보게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성 전자는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차마 손써볼 여유도 없이 작은 것부터 차차 넘어가 처음에는 단순한 경기 악화가 이유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 배후의 김정환이라는 남자가 존재함을 알게 된 후 택은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 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격이라며 폭언이 쏟아졌다. 몇 번이나 화난 사내의 손에 팔뚝이 잡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면식도 없는 남자가 자신을 찾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구는 이유. 반류도 아닌 원인을 위한 구애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가설이었다. 멍하게 앉아있던 택의 귓가에 묵직한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구두 소리가 들려와 퍼뜩 정신을 차린다. 허리를 곧게 펴고 피곤한 눈두덩을 쓸어내린 후 고개를 돌려 방향을 확인하자 검붉은 색의 재킷을 입은 남자가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택을 향해 눈인사를 해왔다. 꾸벅 인사를 하는 택을 향해 짧은 목례를 하는 정환의 표정은 전에 없이 개운해 보였다. 어쩐 일이시죠?-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태연하게 묻는 투가 얄미웠다. 택은 미리 주문해 둔 음료의 스트로만 말없이 쭉 빨아 당겼다. 이야기의 시작점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고민하며 오지선다를 펼쳐 보아도 쉽게 체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인생이란 쉽게 찍을 수 있는 객관식이 아니었으므로. 
 쭈르륵-바닥을 보인 음료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그친 후 택이 고개를 들어 정환을 바라본다. 
 “제가 뭘 어떻게 해드리면 되나요.”
 결국 성에는 백기가 올려졌다. 성 밖을 울리는 아름다운 햇볕의 노래에도 웃을 수 없는 침통한 시간의 시작이었다.


*


 하고 싶은 대로 손에 쥐락펴락하는 거 참 쉽더라 그 집은- 한풀 꺾인 목소리의 고모의 목소리는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 남아 있었으나 택을 괴롭혀대던 그날의 것은 아니었다. 이해하지, 택아? 하고 다정히 구는 그녀의 머쓱한 투를 가만히 듣던 택은 네, 이해해요 하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잘도 했다. 끊긴 전화를 한참이나 손에 들고 있다 침대 위로 풀썩 몸을 누인다. 손에 들린 수화기에서 귀 아픈 경보음이 쏟아져 나오고서야 겨우 손을 뻗어 전화기를 제 위치로 올려두었다.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훅 끼쳐오는 병원 냄새에 인상 돌아가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이제 몇 번쯤 드나들었나 손에 꼽기도 힘들었으나 익숙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학교로 따지면 개근상이오, 아침이면 출근도장 찍듯 집 앞에 세워진 차를 타고 끌려와 제 몸 곳곳을 검진하고 평가받았다. 잠도 덜 깬 몸은 피곤함을 더하는 병원의 기운에 눅진해지고 샤워를 하고 몸을 아무리 씻어내도 병원 소독약 냄새가 몸에 배어 찌든듯한 나날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천근만근 내려앉는 눈꺼풀과 녹초가 된 몸이 제 것 같지도 않았다. 남의 사지에 붙은 듯 팔다리에 피곤함이 밀려와 멍하게 창밖만 바라본다. 허무한 시간들이 서로 초를 달려 지나가는 내내 이 뜻도 모를 사단을 만들어 놓은 그는 얼굴 한 번 비추질 않았다. 사는 꼴을 돌이켜볼 기력도 없어 택의 마음은 자꾸만 안으로 파고들던 참이었다. 하루 나절이라고 해봐야 병원에서 마주치는 간호사와 의사들과 나누는 상투적 이야기가 다였다. 심리적으로 완벽한 고립상태와 다를 바 없었다. 인간 마루타라도 된 것 같죠? 운전기사를 향해 의미 없이 뱉어낸 말은 스스로에 대한 비아냥이었다. 대답 없는 사내를 향해 맥없이 웃어 보이고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쉬이 잠들 자신이 없다. 


 술을 먹고 잠이 들었던가. 치사량은 맥주 한 잔 인걸 뻔히 아는데도 오기를 부려 장식장 안의 술을 반병이나 비웠다. 침대에 등을 누여도 꼭 공중제비를 도는 듯 천장이 빙빙 돌아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막 잠이 든 찰나였다. 침대 위에 무방비하게 누운 몸은 저녁 공기에 서늘히 식어 인기척에도 도통 머리가 깨지 않아 일어나질 못한다. 겨우 부스스 눈을 떴을 때는 어두운 방안 누군가 서 있었다. 불도 켜지 않아 실루엣만 보여도 코끝에 스쳐 지나가는 그의 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구해준 집, 그가 넣어준 가구들, 그와 계약한 최택. 꼭 기억하고 있던 향 때문만이 아니라도 하루에 열 번, 스무 번을 다녀가도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였다. 별달리 놀라는 기색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진정되나 싶어 태연한 척 굴려던 몸이 울컥 뒤집어진다.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맨발로 욕실로 뛰어들어간 택의 꽁무니에 웩-하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한참이나 괴로운 소리로 빈속을 게워내고 물을 내리며 나오는 택의 입가는 방금 헹궈내 젖어 있었다. 맨발 차림의 택이 찰발찰박 바닥과 발바닥이 붙는 소리를 내며 걸어오다 침묵을 지키며 서 있던 정환에 의해 붙잡혔다. 

 "최택씨한테는 계약서가 별 의미가 없나 보군요."
 "네..."
 늘어지는 말투와 끼쳐오는 술기운에 정환의 표정이 알 수 없이 변했다. 늘 좋은 사람인 척 웃던 얼굴이 둘만 있는 어두운 곳에서야 겨우 제 모습을 찾은 듯 서늘해지자 어어-하는 소리의 택이 배시시 웃었다. 찬 기운 서리는 정환의 얼굴에 대비되듯 천진하게까지 보이는 모습이었다. 
 
 "왜요... 화나세요? 계약서에 직접 사인까지 해놓고.. 제멋대로 구니까 화나죠? 돈까지 들였는데... 그렇죠?"
 혀가 반 토막 난 듯 꼬이는 발음으로 따박따박 속을 긁어놓는 모습에 팔뚝을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천천히 압력이 더해지는 힘을 참아내던 택이 결국 거칠게 팔을 떼어내려 몸을 털어도 정환에게 잡힌 팔은 끄떡없었다.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아 야속한 듯 정환의 얼굴을 바라본 택의 밭은 숨이 멈추었다. 빛 한 점 새어들어오지 않는 방안, 택을 내려다보는 정환의 눈이 가늘게 빛났다. 늘 유들유들하게 상대를 쳐다보던 검고 단단하던 눈동자가 아니었다. 어둠에 가려 색의 갈피를 잡을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조금 더 옅은, 그러나 매서운, 그믐달을 뚝 떼어다 놓은 듯 길고 가느다란 눈동자. 알코올 기운에 온몸을 뜨겁게 돌던 피가 순식간에 식어 지니고 있던 열기들이 정환의 눈빛에 빨려 들어가는 듯 한기가 끼쳤다. 

 홀린 사람처럼 정환의 눈가를 만졌다. 성난 듯 부은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쓸자 씨근덕대며 화를 뿜어내던 정환의 눈매가 긴장했다 풀어진다. 부드러운 눈두덩의 살결에 취한 것인지 여전히 술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뜨지도 않은 달빛을 보는 듯 희한한 광경에 취한 것인지,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는 노란빛이 도는 눈동자에 빠져 아픈 팔뚝의 신경은 무감해졌다. 손끝에 닿는 그의 피부에 차가운 표피를 가진 동물이 스쳐 지나간다. 팔을 붙들고 있던 정환의 손에 힘이 풀리고 눈앞에 바짝 다가온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뜨겁고 부드러운 숨이 정환의 턱 끝에 닿았다. 냉골처럼 시린 마음을 덥혀주는 봄의 시작과 같은 온기였다. 검고 곱게 자란 눈썹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부드럽게 움직인다. 여린 잎 가득한 풀밭 위에 내려앉는 달빛처럼 정환의 눈빛이 택의 얼굴 구석구석 내려앉았다. 제 눈가를 조심스레 쓰다듬는 손목을 잡아 불거져 나온 뼈를 만지작대도 멍하던 것이 손목을 잡아 내리며 허리를 끌어안자 맞바람을 맞은 여린 풀처럼 눈빛이 흔들렸다. 고요한 정환의 눈빛과는 반대였다. 아슬아슬한 실끝처럼 긴장된 공기가 툭 끊어지고 어느새 현실로의 귀환이었다. 현실로 떨어진 택이 자신을 가둔 팔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댄다. 

 "계약서, 돈, 수많은 시간들... 노력들."
 팔목 위로 단단한 족쇄처럼 감기는 손길에 긴장한 어깨 위로 지친 듯 떨어지는 정환의 얼굴은 죄수번호가 선명하게 적힌 죄수복을 걸치는 것 마냥 마음의 무게를 더했다. 잠을 설치게 해오던 차가운 밤공기 같은 단어들이 택의 마음으로 내려앉았다. 이제 와 아쉽다는 소리 나 하려거든 그만 멈추라고 하고 싶었다. 당신이 흘려보낸 것들은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은 일들의 댓가인데 왜 아쉬워하냐고 이제는 정말로 쏘아붙일 셈이었다. 
 "그런 것들이 다 의미가 없어. 당신 앞에서는."
 발목에 무거운 돌덩이가 묶여 잔잔한 호수 아래로 가라앉는다. 물 아래에서 버둥대는 사람처럼 허공을 헤매던 택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높은 파도의 중심에 선 날개 다친 새처럼 지쳐 보이는 얼굴이 택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 위로 빛나는 옅은 무늬들과 마주하자 눈앞이 아찔했다. 그의 얼굴 근육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강과 바다 위의 금빛 물결 일렁이듯하는 그것이 사실 빛이 아님을 택은 뒤늦게 눈치챘다. 택의 마른 입술에서 탄성이 흘러나온다. 호박색으로 빛나는 눈 사이에 그믐달을 저며놓은 듯 날선 홍채, 맞닿은 가슴의 차가운 기운. 똬리를 튼 뱀의 품에 안겨 정신이 혼미해진다. 서서히 정환의 눈빛이 돌아왔다. 이마를 수놓은 듯 반짝이는 것들의 흔적도 깨끗했다. 그러나 여전히 서늘한 체온만이 꿈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이윽고 정환의 손바닥이 뺨 위에 닿아 차가운 기운에 어깨가 들썩였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랬을 거야, 시간을 들여서 되는 일이라면 인내했을 테고, 그런데 그런 게 아니야. 계약서? 허무한 종이 조각 같은 건 사실 아무 의미가 없어. 최택."
 그의 입을 타고 나오는 이름이 낯설었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간절히 이름을 불려 본 기억이었었던가, 택은 복잡한 심사에도 조심스레 떠올려 보았다. 누군가에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된다는 것, 눈을 뜨고 눈을 감는 모든 순간을 풀리지 않는 꼬인 끈처럼 살아온 그로서는 피부에 닿지 않는 감정이었다. 

 "해결해달라고 한 적 없어요. 누가 내 삶에 끼어들어서 어떻게 해주길 바란 적도 없어요. 당신이 억지로 나를 당신 삶에 끼워 넣어 놓고는 왜 피해자인 척 굴어요. 매일 아침마다 도살장 끌려가듯 가야 하는 병원도 싫어요. 구역질 나, 내 삶이라곤 하나도 없잖아."
 겨우 막아 놓았던 담이 무너졌다. 솟구치는 억울함이 흘러넘쳐 발바닥을 적시고 옷을 적신다. 가난한 뿌리 같던 감정들이 그것을 빨아들여 설움으로 해갈되었다. 결국 눈가에 눈물이 움을 틔웠다. 막을 수 없이 홍수가 났다. 

 "누구 하나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해주질 않아. 당신은 다 돈으로 해결하죠? 나도 돈으로 샀잖아. 내가 당신 관상용 나무예요? 자라지도 못하게 뿌리 묶어둔 분재예요? 당신 아래에 다리나 벌리고 살면 되는 거죠? 반류....?원인...? 나는 그런 거 뭔지도 잘 몰라, 씨발."
 두터운 입술에 설움이 삼켜졌다. 흘러넘치는 설움은 입맞춤까지 더해져 헐떡이며 숨도 쉬지를 못한다. 히끅대던 택의 눈이 순식간에 떠져 남자의 몸을 세차게 밀어냈다. 분명 말랑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혀와는 다를 터였다. 많지 않은 경험, 아니 경험을 차치하고서 택의 입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그의 혀의 감각은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갈라진 혀끝이 명확하게 느껴진다. 가늘고 힘 있는 뱀의 혀와 닮은 것이 택의 여린 살을 죄 헤집어 놓았다. 스치는 감각마다 등허리가 긴장되고 무릎이 꺾일 것만 같았다. 힘주어 밀어내도 끄떡없는 몸이 더욱 농밀하게 밀려 들어온다. 가쁜 숨에 가슴팍이 요동치고서야 겨우 떨어져 나가는 그를 눈을 홉뜨며 바라보던 택이 그의 입술 위로 손을 얹었다. 서서히 벌어진 입술 사이는 그러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최택-하고 불러와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설픈 손길로 만지던 입술 새에서 떨어져 나왔을 뿐이다.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는 애처로웠다. 그러나 그의 모든 행동들을 이해해 주어야겠다 하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킬만한 것도 아니었다. 

 "당신 아니면 내가 죽어. 혀끝에 사탕발림 같은 말이 아니라... 정말로 죽어. 이 빌어먹을 유전자가, 좆같은 뱀새끼의 피가 당신이 내 암컷이라는데 어떻게 해. 네가 아니면 말라비틀어진 장작처럼 뒈져 버린다는데 내가 무슨 수를 못 쓰겠어."
 첫눈에 반한다는 말만큼 감정에 짙게 호소하는 것이 없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오롯한 인간의 감정, 그러나 음절 음절 새겨들을 때면 사춘기 소년이라도 된 듯 심장 한구석이 뭉근하게 내려앉는 달큼한 말들. 택은 잊고 있던 단어 하나를 다시 떠올렸다. [본딩] 대학 때였던가, 어쩔 수 없이 듣게 된 이공계열의 교양수업 중 하나에 레포트로 제출 해낸 적도 있었던 말이었다. 감정이 우선하지 않는 건 짐승이나 다름없어, 아니 짐승이지-깔깔거리며 비웃음의 어조를 강하게 담아 말하던 여학우의 얼굴은 흐릿해도 그 문장만은 선명했다. 첫눈에 정신적 결합을 느낀다고? 그건 그냥 사랑이라고 포장하는 성욕의 다른 말일뿐이야. 아마도 최택은 그때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당신이 하는 말들, 암컷.. 유전자 같은 것들. 아무리 좋게 둘러 생각해도 그냥 씨나 받아달라는 거잖아. 그렇죠? 결국은 그거잖아요. 정말로 의미 없는 건 당신 그런 말들이야. 무슨 생각인 거예요? 나는 당신네들처럼 짐승이 아니에요.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해. 그것도 당신이랑. 역겹게."
 차오르는 감정들을 입 밖으로 뱉고 나자 후련함이 느껴진다. 허무맹랑한 존재들 현실 감각 없이 뱉어내는 소리에는 이제 질릴 지경이었다. 짐승도 아닌 원인, 아니 사람 사내 몸에 뭘 어찌해보겠다는 것일까. 미약하게 남은 술기운이 같이 도져 머리가 울렸다. 그러다 문득 그의 손목에 자리한 시계 초침 소리마저 들려올 정도의 고요함을 느끼자 순간 머리털이 쭈뼛선다. 

 "짐승? 그런 짓? 맞아 고결한 인간들 감정에 비해 짐승 새끼들 본딩 같은 건 그냥 짝짓기를 위한 핑계일 뿐이지. 찌르고 싸고 그렇게 배나 불려주기 위한 거라고 생각들 하겠지. 최택씨, 그럼 내가 그 기대 져버리지 않게 해드릴게. 짝짓기나 하고 배나 불려주면 될 거 아냐."
 분노 서린 눈빛이 다시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돌아왔다. 다정하게 끌어안겼던 허리춤이 풀려나고 목이 붙잡혀 침대 위로 나가떨어진 택의 등 뒤로 쾅-하고 집안이 울리도록 문을 닫고 나서는 정환의 뒷모습이 느껴졌다. 잡혔던 목을 매만지는 택의 몸이 한겨울 추위에 홀로 떨어진 듯 떨려왔다.




 수치심이 짓밟히는 짓은 대체 어디까지가 한계일까. 한 번도 누워본 적 없는 침대 위에 다리가 벌려진 채 택은 딱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꿈에도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일은 현실이 되었다. 
 한 시간여를 의사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앉아있었다. 철저하게 교육된 그는 택이 말없이 버티고 있는 내내 흔들림 없이 기다렸다. 매끄럽게 정리된 둥근 손톱 위를 만지작대다 불쑥 설움이 복받쳐 오르려고 하면 숨을 들이켜 마음을 추스른다. 간간이 진료실을 들어왔다 나가는 간호사의 목소리에는 시술, 착상과 같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섞여 있었다. 이렇게나 단숨에, 물밀듯이 밀려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소리에 내심 걱정은 했으나 현실 불가능 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까닭도 컸다. 

 "합법은 아니지만 가능합니다. 학회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해외에서는 이미 시술 성공한 사례도 꽤 되고, 무엇보다 김실장 말이라 흘려들을 수가 없어요. 제 입장에서는.. 이미 로펌 쪽으로도 손을 써두는 모양이고.. 뭐.. 무엇보다 최택씨 입장도 이해가 갑니다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뱉어내는 현실이란 말이 우스워 짜증이 치솟는다. 길지 않은 인생의 바로미터 좌표 중 가장 최악의 방점을 찍고 있는 이 순간이야말로 최택의 인생에 가장 비현실적인 시간이었다. 현실적으로 그렇다는 건 대체 뭐야.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 없는 택의 미간이 구겨진다. 비현실, 비참함 같은 어그러진 부정의 감정들만이 소독약 냄새 풍기는 좁은 진료실 집기들에 들러붙어 택의 마음을 죄어왔다. 천정을 바라보던 시선이 흩어져 바닥의 타일 라인을 따라 의미 없이 흘렀다.



*



 "하으...아..."
 어둠마저 잠든 쉰 새벽이었다. 칼을 들이밀어 아랫배를 도륙하는 듯한 고통에 잠이 깨어 침대 위를 헤맨다. 몸이 가라앉아 이른 저녁 맞이한 잠자리에서는 내내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다. 지은 죄도 없는데 잘못을 빌고 또 빌다가 척추를 뒤트는 듯한 아픔에 눈을 떴을 때는 여전히 컴컴한 저녁이었다. 한 손으로 아랫배를 한 손으로는 침대 시트가 밉상스레 울도록 말아 쥐고 겨우겨우 숨을 뱉어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제 몸 안에 자리 잡은 이질적인 그것 때문이 아닐까 본능적으로 원인을 감지해내던 얼굴이 다시 한번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허옇게 혈색 바랜 얼굴은 시트에 눌려 육지로 건져진 물고기처럼 입만 뻐끔댄다.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짐승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짐승의 암컷이 될 거라더니 지금 당장 사지를 잃고 역겨운 형상으로 변태라도 할 모양이었다. 허물 벗는 뱀이라도 된 듯한 온몸의 통증이 눈앞을 까맣게 뒤덮었다. 

 툭툭 끊기며 흔들리는 시야로 들어오는 영상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선 예술영화처럼 이질적이었다. 굳게 다물어 질긴 근육이 도드라진 턱은 말이 없었고 옆으로 길게 뻗은 눈은 매섭고도 슬펐다. 흔들리는 품 안에서 멍하게 정신을 다잡아 보던 택은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향한 남자의 감정의 반증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뭐라고 입을 떼어볼 생각으로 입술을 달싹거려 보지만 목소리가 꽉 막혀 뱉어지질 않는다. 택은 조심스레 그가 입고 있던 흰 셔츠의 팔뚝께를 그러쥐었다가 정신을 놓고 말았다. 팔에 감겼다 사라지는 감각에 정환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늦은 새벽, 처리해야 할 일이 잔뜩 쌓여 있었다. 원체 약하게 타고난 시력 덕분에 업무를 볼 때는 안경 신세를 져야 해 덕분에 자주 밀려오는 두통은 미리 내려놓은 커피로 누르며 어두운 방 안 모니터의 글자들을 진중하게 들여다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것은 이미 두어 시간도 전이었지만 아직 외출했던 옷조차 갈아입지 못한 꼴이 처량했다. 막 집중하려던 찰나 서재를 울리는 벨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씨발-예민한 신경을 긁어놓는 소리에 평소라면 입에 올릴 일 없던 욕을 잇새로 뱉어냈다. 뮤트 해놓는다는 것이 깜빡한 모양이었다. 예민한 정환의 성격을 아는 이들은 촌각을 다투는 일이 아니고서야 이 시간에 연락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러니 이토록 다급하게 걸려오는 전화가 무엇인가 싶어 미처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약한 짐승 앓는 소리인가 했다. 한참이나 귀를 기울이다 최택? 하고 두어 차례 더 확인을 했다. 대답조차 못하고 앓는 소리에 그대로 뛰어나가 차를 몰았다. 다 새어보지도 못할 만큼 신호를 위반해가며 달리는 길은 애가 탔다.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마저 속이 타 결국 구둣발로 계단을 오른다. 길쭉길쭉한 다리가 계단을 두어 칸씩 오르며 초조함을 숨기지 못 했다.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선 정환은 욕심의 산물과 비참하게 마주했다. 온 집안이 축축한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마른 입술을 축이는 혀끝에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쳐 속이 부대낀다. 생사를 확인하듯 숨을 확인한다. 옹송그려 누워 붙잡은 침대 시트의 끝이 떨리지 않았더라면 허리 아래부터 침대 시트를 검붉게 적신 흔적을 보아 누구라도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허옇게 널브러진 택의 몸을 보며 정환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낯간지러운 기분에 미처 말하지 못 했던 것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네 목덜미에서는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나. 하지만 어두운 방 안 익숙하던 향기 대신 구역질 나는 두려움 가득한 죽음의 비린내가 택의 몸을 수의처럼 뒤덮고 있었다. 다급하게 다가가 엎드린 몸을 바로 눕혔다. 다행히 몸이 돌려지자 눈을 희미하게 떴다가 감아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더 생각할 것 없이 축 처진 몸을 들어 올려 시트로 감아안고 그길로 병원으로 내달렸다. 조수석에 눕혀 운전을 하는 내내 백미러 너머로 얼굴은 확인했다. 생기 없이 허연 얼굴이 꼭 시체 같았다. 차를 몰아 달리는 내내 처분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마음이 두려웠다. 


*



 내내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수면유도제, 수면제 같은 것들이 하나도 들어먹질 않아 신경 곤두서기로는 말할 것도 없는 상태라 감정 기복이 심해질 때마다 혼현을 드러내고 잠들기가 일쑤였다. 제 혼현 드러내기를 병적으로 꺼려하는 정환에겐 미칠 노릇이었다. 중종 뱀과 임을 밝힌 후 돌아오는 빌어처먹을 인간들의 반응 기저에 담긴 저열한 의식은 뻔히 눈에 드러난다. 뱀이었어?-그렇게 말하며 웃는 낯은 열에 아홉 꼭 뒤에 가서 정환을 까내렸다. 역시 야비한 종자들이야.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말들은 씹어서 뱉으면 그만인 껌처럼 쉬웠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까닭에 혼현 드러내는 것이라면 질색했는데 의도치 않게 회사서 까무룩 하게 잠이 들었다 번뜩 눈을 뜨면 모니터로 비치는 눈이 어김없이 모양을 달리하고 있었다. 짜증스레 욕지기를 뱉으며 사무실을 나가 일 년에 한두 번 피울까 말까 하는 담배를 피우고 내려오면 기색을 눈치챈 사무실 공기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일들 봐요, 나 신경 쓰지 말고-낮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꺼내고서야 돌아가는 사무실 분위기에 목이 갑갑하던 날들이었다. 

 치고 들어오는 일마저 산더미 같으니 제 힘으로는 안되겠다 싶어 백기를 들듯 병원을 찾았다. 김실장은 마음을 좀 편하게 가질 필요가 있어. 닥터의 위로 섞인 말도 고깝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속이 단단히 꼬였구나 싶어 민망한 듯 슬쩍 웃는다. 결국 또 손에 들린 것은 약 더미를 안겨줄 처방전이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찰나 저만치서 낯선 사내가 반가운 기색으로 달려온다. 누구던가 하는 마음은 속으로 삼키고 머릿속을 뒤져 나눠진 카테고리 틈에서 남자의 얼굴을 찾아냈다. 

 "아 정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평소 쉽게 악수를 청하지도 받지도 않는 정환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정기현이 악수를 청해왔다. 아주 짧은 찰나 고민하던 정환이 악수를 받아주었다. 손이 좀 찬 사람이네 정기현은 그냥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미 없는 안부 묻기가 계속되었다. 무성 전자 이사, 하청업체 중에는 꽤 큰 편이라 두어 번 본 적은 있는 상대였다. 친밀하게 굴어오는 꼴이 썩 좋은 기분은 아니라 생각했으나 어차피 사업이란 것이 사람 인성을 앞세워하는 것은 아니기에 별로 크게 무게를 두지 않았다. 지리멸렬한 대화를 끊어내야겠다 생각하던 정환의 시선이 순간 저만치 선 한 남자에게로 꽂혔다. 하얀색 코트가 바닥에 끌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원 복도 의자에 앉은 여자아이의 앞에 앉은 얼굴은 해맑게 우고 있었다. 시원한 입매를 드러내며 웃는 남자를 보는 순간 깨질듯하던 머리가 해갈되었다. 그러나 그 빈자리를 채우는 감정들은 더욱더 복잡했다. 순식간에 한기마저 밀려왔다. 한 여름에도 몸이 차 가디건을 챙겨 다니는 정환에게 온도 변화는 큰 고통이었다. 순식간에 내려가는 체온에 등줄기가 당기고 시야마저 좁아져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냄새, 아니 향기. 어지러울 정도로 밀려오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이내 입안을 가득 채운다. 혀끝이 빠질 듯이 아려왔다. 보드라운 냄새, 털이 그득한 먹잇감을 입안에 물었을 때야 가질 수 있을 법한 뜨거운 온기. 혀뿌리 아래가 잔뜩 당겨 하던 말을 멈추고 콧잔등을 찡그린다. 김실장님 하고 불러오는 기현의 부름에 억지 미소로 화답하던 것도 잠시 주절주절 떠드는 늙은 노친네에 대한 관심이야 예적지 사라진지 오래였다. 눈앞에 오롯이 들어오는 저 사내 하나만이 정환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신체적 변화에 대한 인지가 끝나자 그다음 정환을 괴롭히는 것은 주체 못 할 욕망이었다. 사회화가 덜된 짐승으로서나 가질법한 감정이었으나 당장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아이에게 내밀어진 손목을 잡아끌어 아무 벽에나 세워 놓고 몰아붙이고 싶어 눈앞이 뜨거웠다. 드러난 목덜미에 혀를 세워 체온을 온전히 느끼고 매끈한 다리 사이에 몸을 휘감아 몇 날 며칠 낮과 밤도 잊은 채 붙어 있고 싶어졌다. 아-하는 소리와 함께 겨우 벽을 짚고 선 정환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리고 그날 김정환 실장의 입원이 사무실에 알려졌다. 

 셔츠를 갈무리하던 손이 뚝 멈췄다. 본딩이요? 하고 되묻는 얼굴은 어이없는 기색으로 웃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선생님 농담이 심하시네. 웃음을 띤 채 돌아서며 재킷을 걸치는 얼굴이 웃음을 잃고 가라앉는다. 거식증에 비견할만한 식욕부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두통. 정상적인 성체에서 나타나는 중종 뱀과의 발정기 본딩 증세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정환은 잘 뻗은 다리를 꼬고 제법 여유를 부렸다. 
 "근데 김 실장, 그 사람 반류가 아니던데?"
 차트를 심각하게 들여다보던 닥터의 그 소리에 결국 정환이 몸을 고쳐 앉는다. 천천히 다리를 푸는 정환의 귀 뒤가 흐리게 반짝이다 다시 제 빛깔을 찾았다. 


*


 몸 안에 착상되던 아기집이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탈이 났다고 했다. 반류가 아닌 원인이니 다급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는 닥터의 위로랍시고 전해지는 소리도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누군가의 손길이 어색할 몸 안으로 기구가 밀고 들어가 정환의 욕심이 응집된 벌건 세포들을 빨아들였다. 시술을 마치고 병원 시트 위에 누운 얼굴은 여전히 핏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꿈이라도 꾸듯 눈꺼풀이 떨리면 정환은 숨소리 하나라도 놓칠세라 택의 얼굴에 집중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이 감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눈을 감은 보드라운 얼굴을 보며 생각한다. 가장하기 쉬운 변명은 따뜻한 온기에 기대고 싶은 외로움이었을 뿐이라고 조금 더 솔직하자면 웃는 얼굴에 세상이 온통 집중되어 내 곁에 주저 앉히고 싶었다고, 집착이라 해도 할 말이 없고 짐승 다운 짓이라 해도 딱히 반박할 마음도 없다. 뭐라고 해도 믿어주지 않을 감정이란 것을 분명히 알았으니까. 생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에도 동의하는 바였다. 본딩 된 이상 짝짓기를 마치기 전까지는 언제까지고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벌써 며칠째 끼니를 거르는지도 몰랐다. 조금 삼키나 싶다가도 다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가 게워낸다. 팔뚝에 피멍이 들 정도로 링거를 꽂아가며 버티는 것은 정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결론은 짐승 같은 짓이 맞구나, 나 살자고 이러는 걸 보니. 자조적인 웃음을 띠던 정환이 택이 누운 침대 위로 얼굴을 묻었다.




 퇴원을 한 저녁, 잠이 들었던 택은 눈앞에 채 풀지도 못한 캐리어가 놓인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별것 아닌 움직임에 아-하는 소리가 절로 나 여전히 싸한 아랫배를 끌어안는다. 멍하던 정신을 다잡자 코끝에 스친 것은 음식 냄새였다. 캐리어와 음식 냄새, 자연스레 떠오르는 얼굴에 맨발로 일어선 택이 비척비척 걸어 나와 주방을 확인한다. 퇴근 직후인 건지 낮에 병원을 들러 퇴원을 시켜주었던 셔츠 차림 그대로의 정환이 불앞에 서 있었다. 걷어올린 셔츠 차림으로 냄비를 휘휘 젓던 정환이 기척을 느끼고는 돌아섰다.

 "앉아요. 저녁 먹어야지."
 대답 없이 멀뚱하게 선 택의 핏기 없는 얼굴을 보던 정환이 냄비를 젓던 손길을 멈추고 다가와 택의 손목을 조심스레 잡고 식탁 의자에 앉히려 했다. 초점 없이 흐리던 눈매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놀란 눈치의 정환을 스쳐지나 식탁 앞에 앉은 택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멍해 보였다. 집에서 죽을 좀 해서 보내셨어요. 전에 없이 다정한 말투였다. 정환이 입원했던 그 시점에 이미 집안 어른들에게는 보고된 상태였다. 다 큰 아들 사생활 하나하나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양반들이라 닥터를 구워삶아 그 상대가 원인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으로 입단속을 해두었다. 이미 예전부터 고리타분하게 출신성분 운운하며 정환의 결혼을 닦달하던 분들이라 알게 된다면 꽤 골치가 아플 것이다. 따뜻하게 데워진 죽을 소담스레 담아 앞에 놓아주고 부담되지 않을 정도로 간을 도와줄 반찬 두어 가지를 같이 내었다. 들어요-손을 닦으며 반대편에 앉은 정환이 숟가락을 손에 쥐여준다. 까칠하게 마른 입술에는 핏기가 어려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정환의 채근에 겨우 숟가락을 들고는 먹는 둥 마는 둥이다. 입가에 슬쩍 가져가다가도 표정이 구겨질 때는 으레 나머지 손이 늘 아랫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많이 안 좋아요? 걱정 어린 말투에 택은 결국 숟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퀭하던 눈빛이 오랜만에 빛을 되찾아 시선을 맞물려 왔다. 그러나 여전히 성문처럼 잠긴 입술은 말이 없었다. 정환은 피하지 않고 택의 눈빛과 마주했다. 맹렬한 눈빛과 다르게 피비린내가 많이 가신 목덜미에는 어느새 온기 서린 향이 고여 맥박이 뛸 때마다 정환의 코를 데웠다. 우습기도 그 향기에 마음이 안정된다. 

 "걱정하는척하지 마세요."
 갈라진 목소리는 내내 빗줄기를 만나지 못한 모래처럼 버석였다. 그 사이 담긴 의중은 모래 틈의 유리조각처럼 날이 섰다. 걱정하는척하지 말고 원하던 짝짓기는 어떻게 할지 배는 어떻게 불리나 하는 고민하는데나 애쓰세요, 짐승들 최고 가치가 종족 번식이라면서요? 가차 없이 뱉어내는 말을 꺼내는 눈매는 여전히 둥글고 차분했다. 하지만 정환의 눈빛은 그렇지 못 했다. 정곡을 찔린 듯 아파 눈빛이 흔들렸다. 형체 없는 언어는 비수가 되어 가슴에 상처를 내고 마음은 어느새 너덜거려 걸레 조각 같다. 앞에 놓인 죽그릇을 천천히 내려다보던 택이 보복이라도 하듯 고민 없이 바닥으로 그릇을 밀어 버렸다.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나동그라진 그릇이 깨져 주위는 죽과 그릇 파편들로 엉망이 되었다. 마치 정환의 머릿속처럼, 

 "이렇게 친절한 척.. 사람 좋은척하지 말고 하시려던 거나 계속하세요. 아... 사람이 아니구나 참."
 말간 얼굴에서 뱉어지는 말은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틀린데 없는 말들은 때론 잘못을 들킨 아이의 수치심처럼 밀려와 갈 곳 잃은 불똥처럼 상대에게 튀어 몸집을 불린다. 어조의 변화 없이 뱉는 말을 귀담아듣던 정환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처음 떠올린 것은 어이없게도 [무엇을?] 하는 못난 생각이었다. 미안한 마음조차 없는 파렴치한이 아니다. 하지만 좋아서, 당장이라도 네 몸 위를 기어올라 다정하게 감기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싶어 그러는 것들이 죄야? 첫눈에 반한다는 소모적인 감정들? 그것도 다 같잖은 페로몬의 영향일 뿐이야. 

 "억울해?"
 호기롭게 눈빛을 밝혔지만 막상 정환의 낮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방금 전까지 저를 따뜻하게 바라보던 온기 가득한 까만 눈동자가 아닌 특유의 색과 모양을 달리해 꿰뚫는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형형한 뱀의 눈이 밤을 밝히는 불빛처럼 빛났다. 분노를 추스르지 못하는 정환의 턱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밤바다처럼 번쩍이는 검정 비늘이 조명에 비추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억울하냐고 묻잖아."
 걷어진 손등에도 오랜 시간을 버텨내 만들어진 보석 같은 비늘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억울하면요? 내가 억울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거 없잖아요. 내가 하는 말들, 당신한텐 의미 없잖아. 마음대로 다 할 거잖아. 사리분별도 못하는 짐승 주제에 다정한척하지 마요."
 몸을 일으켜 자리를 피하려는 움직임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시끄러운 소음을 냈다. 테이블 위로 흥분한 손가락을 가만히 두드리며 호흡을 가다듬는 정환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가 떠졌다. 앉아-고압적인 어조로 명령하는 정환은 혼현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지 근육이 단단히 붙은 오른 손등부터 팔뚝을 지나 걷은 셔츠 바로 아래까지 검정 윤기가 흐르는 비늘이 물결처럼 번쩍였다. 반류가 아니라 그가 뿜어내는 혼현의 명확한 흐름은 느낄 수 없겠지만 어쩐지 가슴이 죄어오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압도당하는 기운에 멈칫한 택의 등 뒤로 다시 정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앉아. 두 번째로 뇌까리는 그의 눈은 이미 성난 뱀의 그것과 같았다. 오기가 치솟는다. 그의 말 따위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듯 빽빽한 속눈썹이 자욱한 눈을 천천히 내리깔았다가 뜨며 발걸음을 돌린다. 
 발바닥 아래로 파편이 밟혀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에 정환의 퓨즈가 뚝 끊겼다. 성큼성큼 다가가 조절되지 않는 힘으로 몸을 돌이켜 세우자 붙잡힌 몸이 뭍으로 꺼내진 생선처럼 푸드덕댔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지 않게 안아 들어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던지듯 눕히고 발을 끌어 발바닥을 살피는 내내 어깨며 가슴 위로 택의 발바닥이 마구잡이로 닿았다. 피가 자작하게 배어 나오긴 해도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다행이란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제 발을 들여다보는 정환의 어깨에는 여전히 택의 패악이 가득했다. 두어 번 더 발길질을 감내한 정환이 발목을 붙잡고는 무표정하게 택을 올려다본다. 불길한 예감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무표정 아래 숨겨진 극도의 분노가 피부 위로 느껴졌다. 
 네가, 감히. 그러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참을 수 없는 집착과 소유욕에 휩쌓인 정환은 몸이 시렸다. 잇몸이 얼얼할 정도로 한기가 돌았다. 하얗고 말갛게 웃는 것이 아름다운, 손에 쥐기도 아까운 최택이 아닌 지금 당장 온몸을 휘감고 제 알에서 밭은 숨을 쉬게 하고 싶은 발정의 상대만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먹기 좋은 먹잇감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노릇이다. 공포에 질린 듯 가늘게 떠는 몸이 물러설 곳 없는 짐승처럼 보였으니까. 목을 죄는 넥타이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고 천천히 공간을 만들어 숨통을 트인다. 등줄기를 따라 조절되지 않는 혼현이 스칠 때마다 셔츠 아래가 어슴푸레하게 물들었다. 침대 아래쪽에 두었던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고 몇 번 뒤지자 얇게 포장된 것이 손가락 끝에 딸려 나왔다. 지이익 소리와 함께 포장 벗겨지는 소리가 잔인하게 귓가를 울렸다. 포장에서 꺼낸 것을 손가락 끝에 씌우는 정환이 모습에 택은 퍼뜩 서러움을 느낀다. 마주한 적 있는 고통, 지금도 악몽처럼 가끔 꿈에 나타나는 바로 그날. 찬 기운이 도는 의자에서 맞이해야 했던 생애 최고의 비극이 인터미션 없는 극처럼 시작되었다. 택이 절망스럽게 눈을 감았다. 어두운 방안, 관객이 없는 공간에서 택은 울지 않았다. 위로의 꽃다발 하나 전해줄 이 없는 외로운 밤이었다. 


*


 신고식치고는 화려했다. 최택의 얼굴은 길거리 좌판에 꽂힌 신문에서, 사람들 손바닥 위의 휴대폰 위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살아온 시간이 몇 줄의 글로 재단되고 제멋대로 축약되어 공기보다 가볍게 떠돌았다. [라성 기업 장남 김정환, 반류로서의 삶 공개. 득인가 실인가] 따위의 가십성 제목들을 보며 정환은 어이없이 웃었다. 반류로서의 삶 공개, 듣기 좋은 말로 공개이지 이것은 명백한 배척자들을 향한 위협이며, 최택을 세상에 안전하게 내어놓기 위한 공식적 공표였다. 결론적으로는 정환의 계획은 성공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최택의 몸에는 결국 김정환의 씨가 자리 잡았다.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전 평소 이것저것 찔러줘가며 구슬려 놓은 기자들을 식사에 초대했다. 웃는 낯을 보고 있자면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라 착각할 만 했으나 그들은 모두 김정환의 속내를 눈치채고 있었다. 채워지는 술잔의 술을 받아먹었으니 속에 있는 말은 죄다 누르고 시키는대로나 하라는 무언의 암시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람 좋게 따라주는 술이 천근만근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그 덕에 제법 굵직한 언론매체에서는 연일 정환의 일신과 관련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돈 앞에 장사 없지-자신에게 우호적인 논조들로 쏟아지는 기사를 보며 정환의 경쾌한 손놀림이 신문 위를 두드렸다. 

 한고비를 넘으면 다시 한고비가 찾아온다. 정환에게 정말로 넘기 어려운 산은 되려 최택이었다. 억지로 안아든 그 밤 이후 자신만의 성을 쌓은 듯 마음을 걸어 잠그고 다정하게 던지는 말에도 가시 조각같이 따갑게 굴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죽은 듯 잠을 자기 시작했다. 걱정되는 마음에 일주일에 두어 번 오시던 도우미 아주머니를 하루 종일 붙여 놓았다. 짬을 내어 전화해 안부를 물으면 내내 잠에 취해 있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저러다 또 쓰러지지나 않을는지 덜컥 겁이 나 집으로 의사를 불렀다. 피곤함이 묻은 얼굴을 억지로 깨워 앉혀 놓고 안색을 살피도록 했다. 갑작스레 집으로 들이닥친 정환을 보며 고되고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택은 뒤따라 들어온 닥터를 보고 질린 표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수척해진 택을 침대 위에 앉혀놓고 검진이 시작되었다. 한참을 고개를 갸우뚱하던 닥터가 정환을 보며 슬몃 웃었다가 택의 변화 없이 무감한 눈길에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슬쩍 저으며 멍함을 깨우려는 듯한 택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둘의 뒷모습을 보던 택이 문이 닫히자 조심스레 배 위에 손을 얹는다. 사실 누구보다 빨리 깨닳았던 생명이었다. 명확한 새로운 생의 기운은 준비할 틈도 없이 갑작스레 들이닥쳤다. 내심 영원히 실패하길 바랐던 마음을 숨길 수 없어 세면대를 붙잡고 선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혼란스러워하는 택의 의중을 정환이 모를 리 없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복잡한 마음속은 제법 쉽게 얼굴에 드러나고는 했으니까. 

 이제 정환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시간을 들여 택을 설득 시키는 것뿐이었다. 시끄럽고 난잡하게 혹은 구차하게 말로 설득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환은 자연스럽게 택의 공간으로 진입했다. 처음엔 셰이빙 크림, 면도기 같은 것들이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단출했던 집안에 존재를 거들었다. 셔츠를 비롯한 옷가지들이 뒤를 따라 옷장을 불렸다. 여전히 북풍한설처럼 차갑게 구는 택이었지만 잠자리에 들 시간 즈음이면 저도 모르게 한쪽 자리를 비워 두는 것은 스스로 눈치채지 못한듯했다. 태어날 때부터 냉기라면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뱀의 새끼라는 것이 그랬다. 체온이 조금만 떨어져도 죽는 줄 알지만 사실 차가운 기운에 가장 익숙한 족속들, 그러나 온기라는 것을 한번 느끼고 나서는 어떤가 화사한 볕을 쬐어보고 나면 혼자인 밤은 서럽고 울적했다. 태양빛에 달궈진 바위 위에 몸을 녹이듯 정환은 비빌 언덕이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늦은 새벽 등을 보인 채 잠든 택의 마른 등짝을 하염없이 바라보자면 허한 마음이 자석처럼 그를 당겨 눈앞에 데려다 놓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귀가 맞지 않는 애꿎은 운명이었다. 정환은 해가 뜨고 해가지는 셀 수 없는 날들을 함께 보내며 끝없는 자기혐오와 택에 대한 연민을 씻을 수 없었다. 그의 깊은 사념은 매 순간 빛 한점 들어오지 않았던 병원 복도로 돌아간다. 아이 앞에 쪼그려 앉은 환한 얼굴을 떠올리면 열에 아홉 번, 아니 열 번 모두 마법처럼 마음을 빼앗겼을 거라고, 다시 삐걱대는 운명은 시작이었을 거라고. 머릿속을 뿌옇게 흐리는 기억들을 더듬다 문득 그리운 온기에 둥근 어깨로 뻗던 손을 거둬들인다. 우리는 다시 현실, 돌아누운 따뜻한 목덜미는 한 뼘도 안되게 가깝건만 꿈처럼 아득한 거리에 정환은 잠을 청했다. 




 순정에 휩싸여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정환의 사무실 책상에 올려져 있던 컵이 바닥으로 내리 꽂히며 놀란 눈들이 정환의 사무실 안쪽으로 집중되었다. 발단은 낮에 갑작스레 잡힌 점심 약속이었다. 꼰대들 또 무슨 일이랍니까. 어릴 적부터 정환을 보아온 박상무에게 장난스레 웃으며 말할 때까지만 해도 심기가 이토록 불편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다. 옷매무새를 매만지고 닫혀있던 문을 열어 룸으로 들어서던 정환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가 다시 어렵게 평정을 되찾았다. 구성원들을 보니 의도가 뻔했다. 눈치 빠른 정환은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물먹은 솜이 된 듯 피로함을 느꼈다. 웃으며 서로를 반긴다고 하는 작태가 실은 꼬투리를 잡기 위해 희번뜩거리는 것이란 걸 아는 일은 말 그대로 곤욕이었다. 입에 감기는 생선의 생살이 오늘따라 쓰게 느껴져 정환은 채 몇 점 집어먹지도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기사는 잘 봤다. 새사람 들였다고?"
 예-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다. 내려뒀던 젓가락을 다시 들어 눈앞의 양념을 뒤적거리는 것이 꼭 예닐곱 살 아이 같았다. 얼굴을 마주치며 좋은 소리 나눌 사이는 아니라는 뜻의 행동이었다. 기사까지 봤다면 뱉어낼 소리들이 더 불 보듯 뻔할 것이다.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냐? 하는 말에 귀찮은 듯 숙이고 있던 정환의 고개가 들렸다. 겉으로 예의 발라 보여도 또 곧이곧대로 듣고 있는 성격이 아니란 것을 모르는 치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그 말 한마디에 불쑥 저렇게 적대적인 혼현을 내뿜을 줄 몰랐던지라 분위기가 일순간에 긴장된다. 가슴을 답답하게 죄어오고 우위에 선 자의 무거운 기운, 일가 사람들 중에서도 좋은 혈통만 이어받은 정환의 혼현은 단연 선명하고도 섬뜩한 기운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꼭 지금처럼. 어차피 같은 부류들이니 숨길 생각 없이 드러낸 혼현이 얼굴과 팔뚝에 넘실댔다. 

 "제 생각 궁금해해가며 움직이시는 분들 아니잖아요."
 "거 녀석 말하는 본새 좀 봐라.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 아니냐. 하다못해 경종도 아니고 원인이라니. 그 사이에 태어나는 애가 라성 그룹 주인자리 꿰찰 수 있을 거 같으냐?"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정환 새끼는 해요."
 낮게 뇌까리는 목소리에 기가 눌렸다. 천천히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으며 눈을 마주치자 소싯적 잘 나가던 위인들이라 해도 꽁무니 감추기 바빴다. 젊은 기운에 들끓는 조카 앞에서는 추풍낙엽보다도 구차했다. 

 "그래봤자 온전한 반류로 나오라는 법도 없고 혹여라도 잡종으로 태어나면 그 애가 받아들여질 거 같니?"
 "괜히 제 살 깎아먹는 짓 하지 말라는 소리다. 사내들 눈 뒤집혀 실수하는 거야 흔한 일이고 정 찝찝하면 돈푼이나 쥐여줘서 내보내면 되는 일 아니니. 세상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천한 원인이랑."
 "라성 그룹 이렇게 키운 거 너희 조부모, 너희 아버지랑 엄마 두 내외만 노력해서 된 거 아니란 거 너도 똑똑히 알아둬라. 그렇게 객기 부린다면 우리도 두고 볼 수만은 없어."

 물컵을 들어 천천히 목을 축이는 정환의 입꼬리가 웃고 있었다. 기가 차는 소리, 몇 번이나 회사 관련해서 일 쳐놓은 것을 스물대여섯 새파랗게 어리던 정환이 나서 말끔하게 무마시켜준 것만 해도 손에 꼽고도 넘칠 정도였다. 그러기를 벌써 몇 년, 발전도 없이 썩어 문드러져서는 반성이라고는 모르는 모습이 비꼬아 말해 줏대가 있었다. 

 "원인이든, 반류든. 또 그러다 잡종이든 그게 뭐요. 다들 착각들 하지 마십쇼. 라성 그룹요? 원래 제 겁니다. 주인이 뻔히 있는데 개가 안방 차지할 생각들이랑 하지 마세요. 이빨 드러내고 짖는다고 밥 한술 더 떠 입 막을 생각도 없으니까 다들, 제발 좀. 예? 정신 차리고들 사세요. 추잡한 냄새는 그만들 좀 풍기고."
 성에 못 이겨 테이블 위로 내려쳐진 물 잔이 힘의 반동에 휘청이다 결국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뒤를 따라나서며 김실장, 정환아 하고 부르는 박상무의 다급한 목소리는 남겨진 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애처롭게 울렸다. 원래 저런 사람들인 거 너도 알았잖냐,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하등 틀린 말 하나 없는데도 속에서 불기운 같은 화가 솟았다. 순정 들끓는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 그 사람 내려까는 소리가 듣기 싫어 애처럼 굴었다. 천한 원인? 시궁창보다 못한 썩은 고기 비린내나 풍기는 뱀 대가리들 주제에 누가 누굴 평가해. 고쳐잡은 핸들에 힘이 들어갔다. 

 "네, 그 사람 깨어 있어요? 좀 바꿔 주세요. 아마 받을 겁니다."
 박상무에겐 알아서 들어가라 일러두고 운전해 가는 길에 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엔 전화를 걸고 10분이고 20분이고 씨름해도 결국 돌아오는 것은 도우미 아주머니 난감한 기색뿐이었다. 가끔 미안해요 김실장-하고 안절부절하는 목소리 뒤로 저 없다고 하세요 하는 고집스러운 택의 목소리가 넘어오면 슬핏 웃음이 나기까지 했다. 고집이라면 정환도 질 바가 없어 하루, 이틀 긴 시간을 들여 지치지 않고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결국 여보세요 하는 느릿하고 부러 귀찮은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전화하는 것엔 좀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이제는 으레 집으로 전화를 걸면 아주머니 대신 택이 먼저 받고는 했다. 아이를 갖고 나서는 목소리가 한층 더 차분해졌다. 성자와 같은 완벽한 용서를 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달라진 분위기가 있었다. 무뚝뚝한 성격에도 전화 말미에 최택씨 좋아해요, 보고싶어요와 같은 이야기는 잊지 않고 남겼다. 그 소리를 들으면 택은 한참이나 말없이 숨만 쌕쌕 내뱉다가 툭 끊고는 했다. 

 "저녁은요?"
 -먹었어요.
 "맛있는 거 먹었어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씀드려요. 해주실거야."
 -맛있는 거... 먹었어요.
 "다행이네. 뭐 다른 거 필요한 건?"
 갑자기 말이 뚝 그쳤다. 실수로 전화가 끊어졌나 싶어 여보세요? 하고 재차 확인하자 네에-하는 늘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필요한 거, 먹고 싶은 거 없어요? 하고 다시 묻고는 사람을 너무 귀찮게 하나 싶어 말아야지 하던 찰나였다. 음-하고 고민하는 투에 짐짓 놀라 조용히 답을 기다려준다. 정갈하게 뻗은 손가락만 핸들에 툭툭 내려놓았다. 

 -딸기요. 
 "아.. 딸기."
 오늘 티비에서 딸기가 나왔거든요 하고 덧붙이는 말에 괜스레 마음이 뻐근해진다. 사갈게요 하고 통화를 끝내고는 차를 돌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문이 열었으려나 불안한 마음에 자연스레 속력이 붙었다. 집에 도착해 도우미 아주머니 몫까지 사온 과일을 안겨드리고 퇴근을 시켰다. 들어서는 길에 안부를 물으니 방금 막 잠이 들었다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부러 슬리퍼도 신지 않았다. 부쩍 예민해져 발소리에도 여린 짐승처럼 번뜩 깨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옆으로 누운 등이 오르락내리락 옅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기력이 많이 쇠했을 거라는 이야기는 정환의 검진에서 들었다. 바쁜 스케줄로 매번 함께 할 수는 없기에 주기적으로 집에 들러 몸 상태 체크를 부탁해 놓은 참이었다. 

 "지금이야 완전하게 착상되고 태아도 건강하지만 문제는 최택씨 본인이에요. 두 번이나 인공 자궁 형성 단계에서 실패했었으니 체력적으로도 바닥일 거고 좋게 말해 깡이 센 사람이지 어떻게 보면 미련하다 싶게 버티고 있는 걸 수도 있고. 김실장, 김실장이 잘 좀 챙겨요."
 "네, 그럴게요."
 피를 뽑은 팔뚝 소매를 내려 잠그며 정환이 고개를 주억 거린다. 만감이 교차했다. 패악 부리며 못하겠다 해도 할 말이 없을 텐데 버티고 있단 소리에 마음 한구석이 쥐어짜듯 일그러졌다. 

 "아, 얼마 전에 고모님들 왔다 가셨는데."
 그 소리에는 또 금세 표정이 돌아간다. 그 양반들은 왜요- 쟈켓을 막 어깨에 걸치던 참이었다. 

 "뭐 말로는 겸사겸사라고 하시지만 김실장 안부 궁금해서들 오신 거겠죠."
 안부라고 둘러말해도 무슨 말들이 오갔을지 뻔했다. 자기들 주치의 놔두고 선생님은 왜 찾아왔답니까-정환의 말에 닥터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최택씨 근황을 물으시더라고, 그냥 잘 지내신다 했어요. 아, 아기 상태도 궁금해들하시고."
 정환이 결국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노친네들 노망이 났나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 안부 궁금해하는 이유들이야 너무 명확해 소름이 끼쳤다. 반쪽짜리 핏줄이니 잡종이니 해가며 그저 여린 부분 들춰내 흠잡을 생각인 거다. 흠만 잡으면 다행이다. 출세, 성공 다 떠나서 돈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인간들이었다. 모르쇠로 있으면 택과 아기에게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 까드득- 맞물린 턱이 짜증 섞인 분노로 잔뜩 긴장했다.  


 잠든 택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정환은 또다시 눈앞이 피로해지는 것을 느낀다. 때꾼한 눈을 감고 얕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손바닥으로 눈 위를 지분거리다 버석거리는 이불 마찰 소리에 눈을 뜨자 막 잠에서 깬 택이 잠에 취한 눈빛으로 정환을 올려다본다. 정환은 눈가의 손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요. 나 땜에 깼나 보네, 좀 더 자요."
 미안한 마음에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저녁은요...? 많이 피곤해 보여서"
 잠긴 목소리가 들려오는 귀를 의심하며 몸을 일으키던 정환이 엉거주춤하게 서 택을 내려다보았다. 싫어요, 미워요. 내내 정환에게 던져지던 말들은 부정과 더 깊은 부정, 그것이 아니라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오랜 침묵들. 일상적인 문장들 끼어들 틈이 없어 꽉 막힌 마음은 영원히 굳게 잠겨 빗장 열리는 것은 보지 못하겠구나 정환은 그렇게 포기하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울컥했다. 꽉 막혀오는 울대를 겨우 삼키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녁은.. 아직. 일어나면 같이 먹으려고. 딸기... 사다 놨어요."
 택이 부은 눈을 슬쩍 부비며 입모양만으로 우와-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뺨 아래 두고 잠들었던 손을 빼어내고는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몸에 힘을 들이는 것이 퍽 고되어 보였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지탱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정환이 마른 손을 바지춤에 닦아내며 주먹을 쥐었다가 용기 내 손을 내밀었다. 제 앞에 불쑥 들이밀어진 정환의 손을 낯선 물건 보듯 응시하던 택이 머쓱하게 손을 잡는다. 정환의 손바닥 위로 한뼘어치의 행복이 가득 찼다. 좁게 맞닿은 온기에 왈칵 눈물이 날것 같아 서둘러 몸을 일으킨다. 조심스레 일어서는 정환을 따라 몸을 일으킨 택이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따라나선다. 셔츠 아래 드러난 목덜미가 문득 아이처럼 수줍기도 하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뒤늦은 계절 탓에 서늘한 거실 소파에 택을 앉히고 개어두었던 담요를 무릎 위에 걸쳐 준다. 잠시만-하고 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몸소 팔을 걷어 딸기를 씻기 시작했다. 택은 으슬한 어깨 위로 담요를 더 그러잡아 덮으며 정환을 눈에 담았다. 안 밉다면 정말로 거짓말이지만 확실히 아이가 생기고 나서 몸도 마음도 무뎌졌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원망의 마음은 염려 가득했던 짐승의 날것은 또 아니라서 저도 모르게 모서리가 제법 깎였다. 자기 손에 물 한방을 안 묻힐 거 같던 사람이 딸기를 씻어서 내오는 손을 바지춤에 황급하게 닦는 것을 보고는 더 그랬다. 꼭지까지 칼로 잘라 말끔해진 딸기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그중 가장 큰 것에 포크를 쿡 찍어 택에게 내밀었다. 담요 아래 빼꼼하게 나온 손으로 받아든 택이 달큼한 딸기향에 침을 한 번 삼키고는 한입 가득 베어 문다. 입안 가득 퍼지는 향이 아직 봄이 되려면 한참 멀었음에도 달력 사이를 북 찢어내 이어 붙인 듯 가깝게 느껴졌다. 오복 오복하니 볼을 부풀리며 먹는 것을 지켜보던 정환이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들어 택의 입술을 물들인 붉은 자국을 닦아냈다. 어린아이처럼 우물대던 볼이 멈추어 정환을 바라본다.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는 것에 정환은 실수를 했구나 싶었다. 분위기에 취했다. 쉽게 따라와 주는 것을 착각해 조심스레 내디뎌도 모자랄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얼른 손을 떼어냈다. 

 "그거요..."
 모질게 말을 걸어올 줄 알았던 택이 예의 느린듯하면서도 꾹꾹 씹어 발음하는 투로 말을 건네어왔다. 그거?-하고 되묻자 우물쭈물하며 동그란 눈을 굴리는 것이 퍽 어린애 같았다. 애를 가지더니 애 같아졌구나 뭐 그런 생각이 스쳐간다. 

 "그때 그 눈..."
 말꼬리를 썰어 먹었으나 금세 그 뜻을 알아차렸다.
 "보고 싶어요?"
 "네... 보여줄 수 있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택의 시선 앞으로 정환이 몸을 당겨 앉는다. 움찔하며 엉덩이를 뒤로 빼던 택이 다시 몸을 앞으로 끌어왔다. 봐요-하는 정환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가슴께를 울렸다. 천천히 눈을 감는 정환의 고요한 얼굴을 마주하자 삽시간에 어깨부터 등줄기까지 지릿한 기운이 올라와 택은 덮은 담요를 더 끌어당겼다. 거의 코앞까지 닿은 서로의 얼굴에 긴장한 숨결이 간지럽게 닿았다. 어깨가 들썩이도록 숨을 고른 정환이 천천히 눈을 떴다. 택의 입에서 아-하는 탄성이 절로 쏟아져 나온다. 몇 번을 보아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천박하게 노랗지도 않고 탁하게 누렇지도 않은 빛을 머금은 듯 맑고 어찌 보면 서늘한 푸른 기운이 도는 눈동자의 중심엔 달의 어두운 면을 가늘게 저며놓은듯한 검은 동자가 예민하게 서 있었다. 잘게 부순 별의 파편처럼 눈동자를 수놓은 짙은 빛의 무늬들이 그 광경을 더더욱 꿈결처럼 만들었다. 택의 손이 정환의 뺨에 닿았다.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어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인 것을 알지만 정환은 택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긴장된 숨을 옅게 내뱉었다. 엄마를 되찾은 아이처럼 마음이 복받쳐 오른다. 까맣고 말간 눈에 오롯이 자신만을 담은 모습이 택을 처음 보았던 그날의 제 모습과 똑같았다. 혼이 나간 것처럼 한참을 들여다보다 예뻐요-하고 뭉근한 혓바닥을 굴려 말하는 택의 목소리는 위험한 스위치였다. 빨간 혀가 입안을 구르며 다시금 예뻐요-하는 붕 뜬 소리를 한다. 붕 뜬 것은 택의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입 맞추고 싶어요."
 정환에게 용기 내어야 할 일은 기실 많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행하고자 하면 밀어붙여 이루어 냈으니까. 하지만 택의 얼굴에 뱉어지는 그의 숨이 답지 않게 더웠다. 긴장으로 가만히 쥐었다 폈다 하는 손등에는 잔뜩 솟은 근육들이 결을 만들었다가 사라진다. 무던한 용기가 필요한 타이밍이었다. 용기가 아니라 패기구나 했다. 마주치던 눈을 어느새 내리깔고 소파 끝머리를 만지작대는 택을 보자 실수했다 싶어 목이 말랐다. 자리를 피하나 어쩌나 머릿속으로 셈을 하며 타이밍을 노렸다. 

 "무섭지 않게요.."
 조도가 낮은 거실, 피했던 시선이 공중에서 얽힌다. 막 어미 품어서 벗어난듯한 까아만 눈동자가 별 가득한 밤처럼 빛난다. 반질거리는 아랫입술이 먹음직스러워 혀 아래가 뻐근해졌다.
 "저, 그동안 무서웠어요. 그러니까... 이번엔 무섭지 않게요."
 슬프지 않게요. 두렵지 않게요-그 말들은 이미 정환의 입술 사이로 먹혀 택은 약속을 받아내듯 정환의 목에 팔을 둘렀다.



*



 당장에 달라질 관계는 아니겠지만 다행히 몇억 광년 떨어진 별처럼 어색했던 감정의 폭은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찬찬히 발걸음을 내딛는 아이 걸음마와도 같았다. 틈나는 대로 전화해 안부를 물었다. 사소한 것들을 묻고 사소한 대답을 듣는 사소한 시간들의 감사함을 배웠다. 아담했던 배가 불러올수록 택이 거울 앞에 서있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불러오는 배를 들여다보는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할 때면 정환은 먼발치에 서서 한참이나 그 모습을 함께 바라보았다. 택의 배가 불러올수록 걱정거리도 불어났다. 일단 체력적으로 버티기 힘들어했다. 원인의 몸에 반류의 혼현, 그것도 중종이 터를 잡았으니 그럴만했다. 숨을 가빠하는 것은 기본이오 통 입맛을 되찾지 못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품에 안아 다독여 잠을 재워 놓으면 한두 시간을 못 버티고 화들짝 깨 아픈 아랫배를 붙잡고 애처럼 엉엉 울었다. 거기다 악몽까지 겹치는 날이면 해가 어슴푸레 떠오를 때까지 아이 달래듯 끌어안고 등허리를 쓸어주었다. 엄마-하고 애처럼 얼굴 구겨가며 우는 모습을 보면 애처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자신의 죄며 업보라 택이 내리는 어떠한 처분이라도 달게 받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을 했다. 목숨을 내놓으라면 기꺼이 그러겠노라 했다. 
 그러니 아침드라마처럼 택을 찾아가 온 집안을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다는 소리에는 눈이 뒤집혀 혈족이니 뭐니 신경 쓸 것 없이 목을 손바닥 안에 쥐고 뜯어놓고 싶어졌다. 척추 마디마디를 양손에 쥐고 비틀어 숨통을 끊어놓아도 풀리지가 않을 화였다. 

 "명줄들 다 끊어드려요?"
 고상한 척 차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역겨웠다. 라성 그룹 김실장이 여기 웬일이래-쑥덕 거리는 소리를 개선행진곡 삼아 들이닥치자 올 줄 알았다는 듯 앉거라 하며 떠는 고상에 테이블 위 찻잔을 들어 그대로 벽으로 던졌다. 벽에 부딪혀 깨진 파편이 결국 손등을 긁어놓고 말았지만 아랑곳없었다. 강단 있는 손이 테이블 위를 내려치며 붙잡자 집기들이 쟈르륵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격 떨어지게 무슨 짓이니, 여기 사람들 입방아 오르내릴 짓 하지 마라."
 "격 떨어질 짓이요? 격 떨어지는 게 뭔지나 아는 사람들이야 당신들이? 왜 찾아와서 분탕질을 쳐놔. 내가 경고했을 텐데요. 추잡한 짓들 하면 나는 두 배, 세배로 갚아줄 거라고."



 호흡이 꽤 길었던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책상 위에는 급하게 전화를 부탁한다는 메모가 놓여있었다. 먼저 전화 걸어오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뜻하지 않게 밀려오는 불안한 망상을 겨우 짓누르며 불안한 머릿속을 다잡았다. 키패드를 누르고 두어 번 신호가 갔을까 연결된 상대의 이야기를 전해 받던 정환의 표정이 전에 없이 싸늘하게 굳었다. 천박하기 짝이 없이 연락도 없이 들이닥쳐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사라졌다. 그 난장판을 홀로 겪어내고 탈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엉망이 된 거실을 치우던 여인이 집안 꼴을 보고 서늘하게 들어서는 정환을 향해 다가와 거의 곡소리에 가까운 말들을 뱉어냈다.

 "도통 병원에 가려고 하지를 않으셔서... 김실장님 오시면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셔가지고."
 기승전결을 다 듣지 않아도 상황이 뻔했다. 먹고 살 걱정 없이 지내게 해주었더니 쓸데없는 욕심에 눈이 멀어 평소라면 정환이 겁나 엄두도 내지 못할 짓을 했다. 천박한 원인 주제에 멀쩡히 살던 사람 정신을 홀려 엉망을 만들었다며 엄한 사람을 괴롭히고 간 것이다. 미치광이처럼 내뱉는 정신 나간 소리를 듣고도 내내 죄송하다며 고개 숙이고 있었다는 여인의 말에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 사람은요?-가라앉은 목소리에 가만히 방을 가리켰다. 지체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간 정환을 제일 먼저 반긴 것은 어린 것의 혼현이었다. 아직 세상 빛도 못 본 제 새끼의 기운, 아마 세상에 나와 안아들었다면 한품에 채 들어차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것이 쏟아내는 기운이 굉장했다. 연약한 택의 몸에 들러붙어 저와 제 어미를 지켜보겠다고 겁을 주는 거다. 짐승으로서의 지극한 생존본능이었다. 되려 걱정은 침대 위에 누워 숨만 쌕쌕 몰아쉬는 택이었다. 근래 들어 비 오는 날 나비 날개처럼 힘 빠져하는 날들이 많았다. 그 누구보다 가깝게 유착되어 거의 열 달을 품은 자식이기는 하나 태생적으로 다른 기운을 이겨내기 힘들 터였다. 정환은 마른 등허리 아래로 팔을 밀어 넣어 그를 안아 올린다. 손바닥 아래 날개뼈는 살없이 말라 측은하게 만져졌다. 축 처졌던 몸이 움직임을 느끼자 부스스 눈을 뜨고 입술을 달싹인다. 열이 올라 땀에 전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꼼꼼하게 넘겨주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시원하다며 눈을 껌뻑인다. 품에 그를 껴안았다. 눈가가 아릴 정도로 익숙하고도 부드러운 체취를 들이마신다.

 "내가 아니라.. 당신이 나 때문에 죽겠어. 나쁜 건 다 내 몫으로 할 테니까 나 혼낼 사람처럼 굴지 마. 나는 최택씨가 이러는 게 제일 무섭고 두려워."
 짐승이 생각이 너무 많으면 안 되는 건데 내가 생각이 너무 많았어. 운명 같은 건 종족 번식 앞에 쓸모없는 잉여 감정이라고 치부하고 말았어야 했는데 그걸 못 이기고 내가 뱀소굴에 당신을 끌어들였어. 최택, 살자 우리. 앞으로 오랫동안 내가 영원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을 만큼. 
 열기 오른 몸을 안고 현관을 나섰다. 품에 안긴 몸이 거짓말같이 가벼워 풍선을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손에 힘이 들어간다. 최택, 택아 끊임없이 불리는 이름을 자장가 삼아 택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절절하게 울리는 정환의 목소리는 아침이 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어나야 할 약속 같은 울림이었다. 



*



 경이로운 순간이 만들어지는 타이밍은 때론 잔인한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신음이 가득해야 할 병원 목도의 풍경은 살풍경함 대신 멸망을 목전에 둔 이들의 기다림처럼 고요했다. 차례를 바꿔 번쩍이는 전광판 속의 이름들만이 이 복도에서 가장 시끄러운 존재들이었다. [최 택]하고 초록빛으로 빛나는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수술 중이라는 사족은 정환의 신경을 거스르려는 듯 번쩍이다가 얄밉게도 순서를 바꿔 사라졌다. 불안한 마음에 허리를 숙이고 앉아 불툭하게 솟은 손등의 뼈를 만지작대는 정환의 모습은 미아보호소에서나 볼 법한 아이처럼 처량 맞았다. 드문드문 서서 그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선뜻 정환을 위로하기 위해 나서지를 못 했다. 부모가 나타나기 전까진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아이와 같은 꼴이었다. 수술 소식을 듣고서야 본가에서 사람을 보냈다. 몇 번이나 정환에게 전화를 걸어 이미 곁을 내어준 사람을 힐난하고 헐뜯기 바빴었다. 이번엔 왜 또, 어깨너머로 받아든 전화기를 잠시 내려다보던 정환의 귓가로 노친네 정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천하니 어쩌니 하시더니 이제는 핏줄이라고 우겨보실 참이세요?"
 날이 서 부러 속을 긁는 아들의 목소리에 평생을 굽힘 없이 살아온 사내의 역정이 드샜다. 어중이떠중이 같은 놈 낳아 놓으면 너도 그 녀석도 평생 안 보고 살 생각이다 일갈 아닌 일갈을 하는 목소리가 정환의 귀에 피로하게 와 닿았다. 회사를 키운다는 것을 핑계로 주위 살필 줄을 모르고 살아온 성정이란 이럴 때 보면 예닐곱 살 아이만도 못하다. 아버지는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으세요? 눈을 떠 얼굴을 마주하는 일 따위 아버지 인생에는 불필요한 일들이겠죠.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가 사랑해 마지않는 돈으로도 안되는 일들이 이 세상에는 더 많아요. 북받쳐 오르는 감정들은 원망이라는 돌무더기를 맞아 생채기 나듯 툭툭 터졌다.

 "평생 보여드릴 생각 없으니 나중에 가서 애원이나 하지 마세요."
 꼬리 자르듯 말을 끊고는 손에 쥔 휴대폰을 병원 복도에 던진다. 퍽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난 플라스틱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바닥에 누웠다. 복도 이 끝과 저끝을 웅웅-울리는 소리에도 명치에 박힌 묵은 체증은 내려갈 생각이 없다. 성질머리는 지 아비를 꼭 닮았지 씨도둑질은 못한다더니-정환이 제 성에 못 이겨 할 때면 어머니는 그런 소리를 버릇처럼 덧붙였다. 평생을 부정하고 살아도 이어받은 피란 이렇게 불쑥 짝 맞추기처럼 드러나 정환을 비참하게 만들고는 했다. 정환아, 이 애비는 갖고 싶은 거는 꼭 가진다. 어릴 적 들을 때는 자랑스럽던 그 말들이 이제야 형체 없는 족쇄가 되었다. 갖고 싶은 것 가지려던 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세요. 결국 고요하게 눌러놓았던 정환의 감정이 터지고 말았다. 복도를 울리는 울음소리가 애달팠다. 



 품에 안긴 안긴 순한 아이처럼 잠들었던 그날 이후, 택의 상태는 걷잡을 수 없이 엉망이 되었다. 하루를 꼬박 기다려도 침묵을 앓는 사람처럼 답이 없었다. 새벽녘이 되어 곁을 지키던 정환이 꾸벅꾸벅 조는 즈음이면 어느새 차분히 눈을 뜨고 차가운 손등에 제 손을 겹쳐 놓고는 했다. 문맥도 앓아듣기 힘든 엉망의 문장들을 겨우 띄엄띄엄 뱉어내다가도 다시 숲 속에 갇힌 공주처럼 긴 잠에 빠졌다. 갑자기 사람 꼴이 왜 저리되었냐는 정환의 물음에 차트를 넘기던 닥터는 안경을 고쳐 쓴다. 갑자기가 아니야, 김실장. 정환을 책망하는 듯한 말투였다.

 "인간이란 참 우습지, 과학이 모든 걸 해결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오만해요. 김실장, 최택씨는 평생을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왔어. 왜 인간과 반류가 명확하게 갈려 생겨났겠나? 지겨운 말이지만 자연섭리란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니잖아. 지금까지 저렇게 버텨준 것도 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자네도 이럴 때 보면 아직 어리다 싶어."
 피곤한 눈을 감고 두 손을 맞잡은 정환의 모습은 흡사 신에게 숭고한 기도를 올리는 성직자와 같았다. 선악과를 욕심내 아담과 하와를 홀리고 세상에 부끄러움을 가져다준 뱀, 뱀의 피를 이어받은 제 기도가 신에게 닿으려나. 눈을 감은 정환은 자조적인 웃음을 속으로 삼킨다. 착하게 살겠다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겠다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심장 한쪽은 눈 뜨지 못하고 속을 태우는 택을 향한 욕심과 집착으로 들끓고 있기에. 단지 최택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노라 신에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시간을 알리는 여명 대신 갓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정환은 서두르지 않고 가만히 눈을 떴다.
 수술실의 문이 열리고 인큐베이터 속에는 벌건 핏덩어리 같은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며 생의 첫 발자국을 알렸다. 긴장된 손을 슥 닦아낸 정환이 천천히 다가가자 이동하던 인큐베이터가 그 앞에 멈추었다. 벌건 얼굴이 생떼를 쓰며 울다가 위를 톡톡 두드려 주의를 집중 시키는 정환의 손길에 잦아들었다. 안녕, 아가 아빠야-하는 소리에 신기하게도 울음을 멈춘 얼굴은 저 먼 우주에서 온 생명체처럼 벌겋고 낯설었다. 정환은 허리를 굽혀 아이의 얼굴에 집중한다. 너는 우리의 어디쯤을 닮았을까. 그 사람의 시원한 입매를 닮았을까, 고집스러운 내 눈매를 닮았을까. 방긋 웃는 얼굴도 그를, 부드러운 눈매도 그를, 나는 네가 그의 모든 것을 닮았으면 좋겠어. 미약하게 남은 울음을 삼키며 입을 삐죽대던 아이를 내려다보던 정환이 허리를 펴고 문이 굳게 닫힌 수술장 안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무섭지 않게요]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한 목소리가 그리웠다. 고집스러운 얼굴을 닮은 닫힌 문이 열리면 혼자라서 무서웠다며 원망 어린 눈을 한 택이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가슴팍을 내려치고 눈을 흘기고 숨 쉬듯 밉다고 말해도 내가 가진 세상 전부를 네 발밑에 두게 해줄게 하고 철없는 약속을 하며 새끼손가락 걸어줄 텐데. 

 슬프지 않게요, 두렵지 않게요.
 최택, 너의 슬픔은 무엇일까. 너는 무엇이 두려울까. 나는 나의 무지함과 아집이 무서워. 모든 것을 너를 제외한 모든 의미 없는 것들로 탓을 돌리며 몸을 말아 똬리 아래 멍청한 대가리를 박고 모른척했지. 나는 슬프고 두려워, 내가 너에게 남겨 놓은 흔적들이 지워질까 봐. 사막 한가운데 나의 미천한 몸으로 내어놓은 옅은 이정표들을 네가 따라오지 못할까 봐. 내 욕심으로 빚어진 뜨거운 뙤약볕에 네가 바싹 마른 식물처럼 되어버릴까 봐. 
 세상의 모든 멍청한 것들로 빚어진 나를 만나러 와. 저 문이 열리면 나를 감싼 모든 허물들을 벗고 달려갈게. 
 나는 오롯이 너를 위해 존재하는 미물이야. 너의 삶을 위해 부르는 찬미.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린다. 문 소리와 함께 태어난 아이의 울음이 다시 복도를 울렸다. 
 삶의 폭죽과도 같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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