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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연주회 끝나고 다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어요.”

 

 허울뿐인 아내는 그 아이를 지독히 아꼈다. 자신의 위신을 한껏 드높여주는 제자에게 만족하는 법 없이 어느 콩쿨 하나 빠짐없이 나가게 했으며 모든 대회를 독식하며 상을 거머쥔 아이에게 우아한 미소와 박수를 보냈다. 욕심이 많은 속내를 내색하는 법이 없었다. 같이 있으면 숨이 막히는 그런 여자. 나의 아내.

 

 “레스토랑은 미리 예약해 놓지.”

 

 소화제가 떨어졌던가. 정환은 수트의 마지막 단추를 꿰며 곰곰이 생각했다.

 

 공연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아내와 그 아이가 수많은 카메라들에 둘러 쌓여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담배라도 피울까 안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 정환은 한 개비를 입에 물곤 지포 라이터를 찾았다. 연거푸 연기를 뱉어내던 정환은 우르르 몰려나오는 기자들을 보며 어렴풋이 그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인터뷰가 끝났음을 알고는 장초를 바닥에 버렸다. 매캐한 마지막 연기를 뱉어내며 차에 올라탄 정환은 미리 열시트를 켜 두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왔어?”

 

 드레스가 구겨질 새라 조심조심 차에 올라타는 그녀의 뒤로 어울리지도 않는 턱시도를 빼입은 아이가 뒤이어 차에 올라탔다. 보타이가 영 불편한 듯 만지작대던 손이 백미러로 아이를 살피는 정환의 눈과 마주치기 무섭게 허벅지로 내려앉았다. 귀엽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정환의 눈은 여전히 아이를 좇고 있었다.

 

 레스토랑엔 무드 있는 재즈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은 정환은 샹들리에 조명에 비춰진 아이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언젠가 그녀가 카메라 앞에서 자랑하듯 부르던 아이의 이름이 떠올랐다.

 

 “최택.”

 

 혼잣말하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음에도 용케도 그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아이는 호통이라도 들은 양 몸을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스와링 후 와인을 들이킨 정환이 무료하게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남들에겐 아마 가족의 화목한 저녁 식사 자리쯤으로 보겠지. 정환은 문득 담배가 고팠다. 태생적으로 지루함을 못 견뎌하는 성미에서 비롯된 습관적 버릇이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둘이 얘기 좀 나누고 있어.”

 

 그녀의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저만치 멀어져가자 정환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테이블 가까이 몸을 붙인 채 턱을 굈다. 시선은 테이블 너머의 아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네 고상한 선생님도 없는데 이렇게 재미없게 굴 거야?”

 

 아이 역시 아까완 달리 들짐승 같은 정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정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정환의 숨통을 조여왔던 지루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의 눈치 없는 물음에 아무것도 아니라 말 끝을 흐리던 자신의 뒤로 은연중 웃음을 흘리던 아이. 최택이라고 나지막이 부르던 자신과, 부풀어 오른 아이의 앞섬. 끈이 있었다면 끊어질 듯 팽팽하게, 둘 사이엔 무언의 대화가 오고 갔다.

 

 “아까 차에서 계속 쳐다보시던데.”

 

 교태 어린 목소리에 정환이 오른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것 봐. 보타이를 어색해하던 그 아이는 어디 가고 눈의 색이 제법 짙어져 있었다.

 

 “눈이 되게 야해요. 그거 알아요?”

 

 둘이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정환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그녀가 자리에 앉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메뉴판을 펼쳐보았다. 둘 사이엔 짧은 눈 맞춤이 오고 갔을 뿐, 그 누구도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식사를 끝마치고 그녀는 티슈로 입 주변을 톡톡 분칠이라도 하듯 두드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나 마나 그 겹겹이 쌓은 화장을 또 덧바르려는 거겠지.

 

 “우리도 일어나자.”

 

 정환은 카드를 계산서와 겹쳐 카운터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볼펜 좀 빌려주실래요? 무슨 이유인지 볼펜을 건네받은 아이는 계산서 뒤편에 무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가더니 그것을 두어 번 접어 정환의 플랩 포켓에 꽂아 넣었다.

 

 “내가 주는 팁이에요.”

 

 돌아가는 차 안은 올 때와 다름없이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다. 십여분 정도 차를 몰아 아이의 집 앞에 도착했다. 수고했어 택아. 다음 레슨 때까지 푹 쉬고. 뒤돌아 뻔하디 뻔한 말들을 뱉어낸 아내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제가 오늘 너무 신세만 진 것 같아요. 꼭 갚을게요.”

 

 정환은 아이가 겉치레로 포장해 건네는 말이 아님을 알았다. 꼭 갚을게요. 찰나의 눈 맞춤과 뒤이어 건네던 그 인사말이 정환의 귀에서 이명처럼 떠돌았다.

 

 “먼저 들어가 볼게요.”

 

 방문을 닫고 수트를 걸어두려던 정환은 옷걸이를 쥐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플랩 포켓 안에 든 종이를 꺼냈다. 정갈하게 접힌 종이를 펴자 꾹꾹 눌러 적은 번호가 적혀있었다.

 

 ‘기다릴게요.’

 

 그 두둑한 팁을 내려다보며, 정환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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