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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어디에 있을까. 화려한 장막 없는 방 안. 사막처럼 마른 어항 속. 침이 묻어 빳빳해진 종이 사이. 툭툭 부러지는 음절 사이의 신음. 조용한 간격을 가진 타일. 이가 빠진 검은 머그컵. 도대체 너는 어디에 있기에 목소리 대신 후회의 그림자 되어 내게 뻗어 있는가. 너를 찾기 위해 나. 어찌해야 하는가. 나는 언제 멈춰야 너를 향해 웃는가.

 

 

 

 1.

 비가 새벽부터 내렸다. 축축한 도시는 오래되어 썩은 가죽 신발 냄새를 풍긴다. 누군가의 뒤축이 자꾸만 닳아갔다. 절약정신은 어디에도 없다. 정환은 눈을 가늘게 떠 비안개 사이로 나타난 버스의 번호를 살폈다. 안개가 끼는 날은 최악이다. 한쪽만 남은 눈이 하필 안개가 지닌 습기에 약했다. 초점은 방금 태어난 연약한 노루처럼 부들거렸다. 입고 있던 검은 점퍼의 주머니 안으로 양손을 끼워 넣었다. 손아귀에는 동전 몇 푼이 다였다. 가까스로 집 근처 정류장까지 갈 수 있을 만큼의 차비였다. 손바닥 안에서 동전들을 슬슬 굴리며 정환은 다시 가늘어진 시선으로 먼 곳을 살폈다. 십여 분이 지나고 삼십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나 지났지만 정환이 타고 가야 할 버스는 도착하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 놓인 운행 알림 전광판에선 그가 기다리고 있는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문구만 계속 떠다녔다. 정환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은 계속 바뀌고 안개의 색은 부연 김 서림이 아닌 까만 녹조처럼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씨발, 언제 도착하는 거야. 지껄이는 정환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결국 버스는 도착하지 않았다. 걸어가야 하나. 정환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가야 할 방향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한쪽 눈에만 보이는 길의 끝에는 검고 깊은 주름을 지닌 항문처럼 정환을 향해 뻐끔거리고 있었다. 아무도 가지 않는 방향. 하지만 정환은 그곳을 향해 걸어야 했다. 배설의 기점은 그의 거주지. 창문을 허락하지 않는 입관식. 미열의 테마파크. 정환은 천천히- 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예정보다 세 시간이 지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조악한 구조로 이뤄진 다세대주택을 몇 개나 거쳐야 집이 나타난다. 이음새가 부실한 알루미늄 현관문을 발로 퉁퉁 찬다. 그것이 초인종 겸 인사. 안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상하다 싶어 다시 찬다. 문유리가 헐거워진 소리를 낸다. 찰캉찰캉 거린다. 하지만 안은 고요하다. 이상해. 정말 이상하다고. 정환은 설마 싶어 둥근 문고리를 비튼다. 열리는 어둠 안에 가느다란 몸이 보인다.

 "나 왔어."

 라고 말하지만 부스럭거리는 기척마저 없다. 자는 건가. 정환은 몸을 구부려 손을 뻗는다. 손바닥에 닿는 그. 택의 몸이 서늘하다. 설마. 아냐 설마. 정환의 불안이 어둠 안으로 사그라진다. 아냐. 설마. 이건 아냐. 부정의 목소리. 어둠에 익숙해진 푸른 몸이 정환의 품 안에서 흔들거린다. 앙상한 뼈만 남은 남자. 정환은 손바닥이 벌게지도록 안고 있는 그의 살갗을 비빈다. 체온이 없다. 온기가 쓸쓸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개수대에 깨진 컵이 한 번 더 깨진다. 끄억거리는 울음소리가 개수대 안으로 바스러지고 말라붙은 하수구엔 기척을 죽인 쥐가 몸을 숨겼다. 정환은 끌어안은 몸에 입을 맞춘다. 미안하다고 말한다. 사라지면 안 돼.라고 말한다. 까만 머리카락이 정환의 뺨에 들러붙는다. 모양을 잃은 소리들. 울음. 그리고 아침을 놓친 연민의 몸이 정환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2.

 정환이 택을 만난 건 건 재작년 여름이었다. [희망을 위한 한 끼]라는 현수막이 걸린 지하철역 광장에 들어선 봉사단 천막에서였다. 무료 급식 받는 건 쪽이 팔려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정환이었지만. 그날은 사고로 실명한 한 쪽 눈이 너무 아파 며칠 일을 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집 근처의 지하철 광장의 무료 국밥을 주는 곳으로 향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택을 만났다. 하얀 얼굴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큰 국통 앞에 서서 국밥을 푸던 그. 고맙다는 노숙자들의 말에 말없이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었다. 몇 시간 진하게 우려낸 뜨끈한 국물처럼 뽀얗고 은근한 인상. 정환은 한쪽 눈을 껌벅거리며 택을 살펴보았다. 제 차례가 되어 식판을 들이밀자 고개를 까닥하며 국밥을 퍼주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에 그는 눈짓으로 인사했다. 정환은 식판을 들고 가장자리의 파라솔이 없는 자리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흘끔. 택을 몰래 쳐다보았다. 그날 후로 막노동을 한탕 뛰어 돈이 있었지만 일주일에 한번 씩 오는 봉사단의 천막에 가장 먼저 가 택을 기다렸었다. 그랬기에 매번 1등으로 국밥을 받아들고 한참이나 그걸 깨작깨작 먹는 정환을 택이 모를 리 없었다. 항상 끄트머리 자리에 앉아 뙤약볕에 바짝 익어가는 그가 신경 쓰였다. 꽤 큰 키와 덩치에 식판에 담긴 국밥을 꾸덕거릴 때까지 먹는 모습에 혹시 양이 모자란 건 아닌가 싶어 듬뿍 국밥을 말아 담아주면 정환은 당황해하며 주위를 살폈다. 이런 친절이 익숙하지 않은 듯 안절부절 하는 모습에 되레 웃음이 터졌다. 정환은 난데없는 택의 미소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뒤에 서있던 노숙자가 빨리 가라고 재촉한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서 지정석처럼 되어버린 자리에 가까스로 앉았다. 소리 없는 택의 미소에 정환은 잠시 아찔함을 느꼈다. 멍하게 식판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받은 걸 다 먹지도 못 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정환은 오후 다섯 시까지 파장하는 걸 기다리다가 정리를 하고 나오는 택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눈치로 정환을 바라보던 택은 정환 앞에 멀뚱하게 서 있었다. 우물쭈물 말을 더듬고 그게 스스로 답답했는지 머리카락을 헝클이던 정환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몇 번이나 혀로 입술을 적셨으나 곧장 입술은 메말랐다. 택을 붙잡았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도대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꽤나 여러 인사말을 준비하고 연습했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아, 괜히 나섰나. 정환은 그냥 포기할까 하고 꾸벅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그때. 자신의 점퍼 아래쪽을 꾸욱- 붙잡는 손길을 느꼈다. 걸음을 멈췄다. 택이 자신을 붙잡은 거였다. 택의 손가락 몇 개에 몸뚱이를 붙잡힌 짐승처럼 쌔액쌔액 숨을 몰아쉬던 정환의 기색을 알아챈 택은 다시 웃음 내보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리고선 가방 지퍼를 열어 알록달록한 캐릭터가 그려진 메모지를 꺼내 볼펜으로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정환이 택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어리둥절하는 사이 그가 다 쓴 모양인지 메모지를 손바닥 안에 가득 쥐고서 정환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택의 메모를 들여다보던 그는 붉어진 얼굴로 택에게 말했다.

 "나도 그래요."

 그의 말에 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환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택은 헐거워진 가방끈을 고치며 그를 뒤따랐다. 열대야에 녹아내린 아스팔트는 툭툭 더위를 토해내며 행인의 발길을 붙잡았으나. 둘의 걸음을 부여잡지 못 했다. 결코 까만 아스팔트 따위가 잡을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으므로.

 

 

 

 3.

 정환이 눈을 뜰 때면 항상 택의 품 안이었다. 골 없는 평평한 가슴은 그 어떤 여자의 가슴보다 따스했다. 한 달 넘게 낮과 밤 상관없이 택과 이불 위에서 뒹굴었다. 몸의 뼈가 삭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섹스를 해댔다. 택의 몸은 부드러웠다. 더할 나위 없이 유연하였고 자신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리낌 없었다. 아파하며 울음을 토해낸 것은 처음뿐이었다. 목소리가 없는 신음은 오히려 정환을 들뜨게 했다. 호흡이 택의 신음을 대신했다. 농도 짙은 사정의 흔적이 택의 흥분을 표했다. 그의 몸을 안으면 안을수록. 드나들면 드나들수록 황홀에 가까웠다. 이토록 따뜻하다니. 정환은 지쳐 쓰러진 택을 감싸 쥐듯 끌어안았다.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았기에 굳이 대화하지 않았다. 그저 기나긴 호흡으로 택을 불렀다. 하얀 얼굴로 자신을 뒤돌아보는 택을 볼 때마다 정환은 흐려지는 눈앞을 닦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택은 따뜻했다. 친절했다. 자신을 거절하지 않았다. 집에 남아있던 라면을 끓여놓고는 내버려 두고서 다시금 진탕 섹스를 했다. 물고 빠는 데 이력이 날 만큼 정환의 입술은 끊임없었다. 옆집에 사는 베트남인이 벽을 쿵 치며.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FUCK YOU를 외쳤지만. 택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므로 행위를 멈추지 않았고. 정환은 들렸으나 쉽사리 무시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척했다.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당장 정환에겐 택이 전부였다. 섹스를 안 할 때면 퉁퉁 불어터진 라면을 나눠 먹거나. 택의 메모장으로 담소를 나눴다. 예상대로 그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대충 알아본 글자로 전해들은 사연은. 택은 고아였고. 그를 맡아 기르던 5촌 당숙모가 걸핏하면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자신의 목구멍에 부었다는 거였다. 택은 그녀를 이해한다고 했다. 남과 다름없는 자신을 거둔 것만 해도 고마운 거라고. 열여덟 살 때까지 살다가 당숙과 당숙모가 교통사고로 죽자 그 집에서 나왔다고 했다. 정환은 택의 담담한 글씨체와 평온한 표정을 살피고서 자신의 가슴 언저리가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택을 끌어안았다. 갑자기 자신을 가득 끌어안는 정환의 손길에 택은 어리둥절했으나. 정환은 계속. 날이 밝도록 택을 끌어안았다.

 "우리는 비슷한 불행의 취향을 타고난 거야. 그래서 끼리끼리 만난 거겠지... 내 곁에 있어. 난 널 불행하게 하지 않을게."

 정환은 택이 입모양을 읽도록 천천히 말을 건네고서. 전등의 어스름 아래 얼굴 붉혔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파고드는 택의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잠에 들었다.

 

 

 

 4.

 정환은 집안에서 반기지 않은 자식이었다. 빌어먹을. 이란 말은 정환을 볼 때마다 아비가 습관처럼 하던 말이었다. 아비는 밭은기침을 자주 했다. 목구멍이 근질거린다며 불평했었다. 그는 똥 대신 가래를 훨씬 더 많이 배설했다. 정환이 누런색을 싫어한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 일지도 모른다. 그는 누렇게 굳어버린 화장지를 곧잘 아들에게 치우게 했다. 정환이 싫은 기색을 내보이면 아비는 시비 상관없이 제 아이에게 달려들어 매질을 하기 일쑤였다. 정환의 몸엔 허구한 날 퍼렇고 누런 멍이 즐비했다. 누런 것은 싫다. 누런색의 털과 누런색의 배설물과. 누런색의 노인들. 누런색의 개. 누런색의 하늘. 교실에서 비명 지르는 반 아이들의 누렇게 썩은 이빨마저도. 모든 것이 싫었다. 그래서 학교를 빠지기 시작했다. 학교를 가지 않는다고 해서 아비에게 혼난 적은 없다. 그보다 다른 이유와 모를 이유로 인해 맞았을 뿐이었다. 아비는 어린 정환이 말을 안 들을 때마다 욕실에 발가벗겨 밀어 넣고는 그의 항문에 치약이나 샴푸, 비눗물을 쏟아 붓는 '벌'을 내렸다.

 "더러운 새끼는 이런 식으로 깨끗하게 해야 해. 다 너를 위해 하는 거야."

 그는 곰팡이가 핀 욕실 타일에 정환의 얼굴을 짓누르며 설교를 해댔다. 도대체 왜? 어째서?라는 어린 정환의 의문은 끝도 없이 늘어만 갔다. 벌이 심해져 항문을 통해 들어온 것이 결국 왁스가 되고 응급실에 실려 간 다음에야 왜 아비라는 작자가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정환은 아비의 씨로 태어난 게 아니었다. '어미가 밖에서 씹질을 해 가지게 된 불행과 분노. 배신의 씨앗.' 아비의 입 밖으로 쏟아진 자신의 존재는 항문보다 마음을 먼저 헐게 만들었다. 나는 배신의 씨. 파렴치한 아이. 아비가 뱉은 가래의 원인. 정환은 그때부터 참고 견디는 법을 배웠다. 그 누구보다 항문에 연고를 잘 바르는 아이가 되었다. 아비가 술로 인해 며칠 동안 자신을 홀로 둘 때면. 가끔은 내장이 근질거리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정환은 집에 기어들어온. 늙고 유령처럼 사위어가는 아비에게 다가가 넌지시 속삭였다.

 "벌을 주세요. 아빠."

 어린 정환의 속삭임에 아비는 눈을 번뜩였다. 그럴까. 비눗물로 아이의 뱃속을 씻어내고 손가락으로 긁어냈다. 그는 생닭을 손질하듯 느릿하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어린 정환의 뱃속을 다듬었다. 꺽꺽거리며 정환이 타일 위로 몸을 쓰러뜨릴 때마다 두꺼운 손으로 아이의 허리를 붙잡고 일으켰다.

 "이건 벌이야. 어쩌면 상이기도 한 거지. 너는 축복받은 거야. 나한테 사랑을 받는 거란다. 씨발년은 이제 잊자. 아니 이미 잊었지. 너는 그년의 유산인 거야. 너는 내게 상속된 거다. 내 보물. 내 소유의 쓰레기야. 자, 일어서라. 아비에게 네 구멍을 보여 다오. 자아. 자.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씻어내기만 했던 행위가 어느새 채워 넣는 행위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칫솔이었다가 손가락이었다가. 아비의 자지로 바뀌었다. 그건 꽤나 순식간이었다. 욕실에서만 하던 아비의 짓거리는 안방이나 부엌, 거미줄이 무성한 보일러실 할 것 없이. 새벽 두시나 배가 고플 정오 상관없이. 아비는 정환의 구멍이란 구멍에 쑤시고 박아댔다. 마른 정환의 몸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아비는 비좁은 구멍에 제 걸 집어넣을 때마가 닥쳐오는 쾌락에 눈알을 뒤집었다.

 "씨발, 씨발. 씨이-발. 이것 보라지. 그년이 남긴 애새끼한테 하는 복수를 한번 보라지. 이 얼마나 통쾌하냔 말이다. 그년. 엉덩이가 무지막지했던 년. 그 엉덩이로 날 희롱하고 결국 그 엉덩이로 내 인생 짓뭉개놓고서 돈이란 돈은 싹 다 가지고 떠난 년. 빌어 처먹을 년. 나쁜 년. 괘씸한 년. 떠나는 주제에 애새끼만 남기고. 내 씨도 아닌 걸 버려두고 떠난 년. 자 봐!! 내가 네 새끼에게 뭘 하고 있는지!!! 자아!! 보라고!! 어린놈이 벌써부터 사내놈에게 박히면서 신음하는 꼴을 보란 말이다!!!"

 그의 허리는 멈추지 않고 앞뒤로 들썩거렸다. 정환은 복수와 울분에 가득한 아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잃었다.

 

*

 

 그건 학대였을까. 정환의 메모에 택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학대-라고 말한다면 너무 슬퍼질 것이다. 동정할 것이다. 연민의 눈은 지겹다. '그건 깨어날 수 있는 악몽일 뿐이야.' 택은 작고 고른 글씨로 대답했다. 정환은 한참이나 택의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5.

 대리기사 일을 시작한 건 택과 함께 살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비좁은 골방이 아닌 넓은 곳으로 옮기기 위해선 저금이 필요했었다. 아비라는 작자는 아들에게 빚만 남겼기에 정환이 혼자가 되었을 때는 도리어 마이너스였다. 혼자 살 때는 그 괜찮았지만 이젠 택과 함께 살게 되면서 하나둘 필요한 것이 늘었다. 즐거운 버거움이었다. 가격을 생각해서 물건을 사고. 그걸 가지고 아옹다옹했었다. 시시콜콜한 몸짓을 나누며 웃었다. 정환이 흐느끼며 잠에서 깨면 들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퍼뜩 알아챈 택이 정환을 다독거렸다. 사다 둔 야채나 우유는 이제 상하지 않았다. 근처에 공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 게 최근이었다. 택이 듣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아무 문제없었다. 별말 없이 몇 번 나누는 메모로 정환과 택은 행복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고. 겨울은 금방이었다. 보일러가 고장 나는 바람에 이불을 하나 더 샀을 때는 택에게 한참이나 혼이 났지만 괜찮았다. 그 이불 속에서 또 얼마나 섹스를 했는지. 마르기만 했던 택은 살이 올랐고. 정환은 대리기사 일을 꾸준히 해냈다. 몇몇 고약한 취객에게 시달려 발길질을 당하거나 욕을 듣기도 했지만. 집에 가면 환하게 웃고 있는 그가 있으니 견딜만했다. 그보다 더한 것도 겪어낸 자신의 과거가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낄 만큼. 행복했다. 불행이 색 바랜 벽지처럼 익명성을 지녀갔다. 초록의 식물을 키웠다. 작은 금붕어들이 있는 어항을 들였다. 택의 메모장은 종이가 아닌 화이트보드로 바뀌었다. 수천 번 쓰고 지운 흔적이 쌓여 묵은 때가 화이트보드 가장자리에 고여 있었다. 택은 애써 그걸 지우지 않았다. 가장자리에 놓인 글씨의 흔적은 마치 정환이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모습과 겹쳤기에. 그저 내버려 두었다. 행복이란 것이 뱃속을 채우고 나날을 넘기고. 달력을 느슨하게 했다. 이렇게 살다 보면 상처들은 다 지워지겠지. 하는 희망이 생겼다.

 "이젠 행복할 일 만 남았네."

 정환의 말을 택은 듣지 못 했다. 책을 들여다보던 택이 고개를 들어 정환을 바라보았다. 정환이 무언가 말한 기척이 있다고 생각되었기에 뭐라 했냐며 눈짓으로 물었으나. 아냐, 아무것도. 정환은 대답하려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6.

 택이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통통하게 오른 살은 단숨에 빠져버렸다. 머리를 감고 나면 머리카락은 무서울 정도로 덩어리지며 주위에 흩어졌다. 정환은 미칠 노릇이었다. 집을 사기 위해 모아둔 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마저 아르바이트를 못하게 되어 더욱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다. 병명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의사가 몇 번이나 병명을 말했지만. 자꾸만 되묻는 정환을 향해 짜증 섞인 대답을 했다. 정환은 더 이상 병에 대해 의사에게 묻지 않았다. 병을 알고 있다고 해도 정환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고. 먹는 것은 죄다 토했다. 반짝이던 눈은 흐리멍덩해졌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걸음이 힘들었다. 약 값은 상상을 초월했다. 보험에 들 형편이 아니었기에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일주일치 약을 한 달 동안 늘려서 복용했다. 새벽이면 택은 음절이 부러진 소리를 내며 몸을 틀었다. 몇 달째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밟으면 부러질 만큼 앙상해진 택은 이제 화이트보드에 글씨도 쓸 수 없을 만큼 허약했다. 뭔가 원하는 게 있었지만 표현할 수 없으니 짜증이 늘었다. 정환은 일주일 동안 잠을 다섯 시간도 채 잘 수 없었다. 낮에는 택을 간호해야 했고. 새벽이 넘어서까지 대리기사 일을 해야 했다. 경기가 안 좋아 공치는 날이 허다할 때면 집에 올 차비가 없어 정류장이나 공원에서 새우잠을 잤다. 불행이 몸집을 불렸다. 아름다운 청년이었던 택의 몰골은 차마 맨눈으로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흉측해졌다. 정환은 몇 번이나 택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어 눈길을 돌렸다. 그걸 알게 된 택은 몸부림을 쳤다. 씨발놈. 이라고 말하는 듯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릴 내며 정환에게 있는 힘을 다해 주위에 있는 물건을 내던졌다. 그러다 정환의 얼굴을 택의 소변 봉투가 퍽-하고 맞아 터져버렸다. 고장이 나서 몇 번을 고치다 결국 분해된 채로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선풍기 날개에도 소변이 튀었다. 소변으로 인해 방 안은 구린내가 진동했다. 정환의 눈이 붉게 달아올랐다. 누런 택의 오줌이 정환의 얼굴을 타고 방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불행이 입을 벌렸다. 파삭-소릴 내며 전등이 꺼졌다. 정환의 발끝에서부터 분노란 분노는 죄다 모여 날카로운 사물이 되었다. 택은 온몸을 비틀며 정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단수 조치를 한다는 협박성 고지서가 정환의 발아래 밟히고 있다. 정환은 마지막 남은 약봉지 옆 물컵을 집어 들고 다짜고짜 개수대를 향해 집어던졌다. 컵은 연약하지 그지없었다. 정환은 혀가 뽑힐 듯 택을 향해 소릴 질렀다.

 "씨발!!!!!!!!!!!!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개새끼! 왜 아프냐고! 왜 아프고 지랄이야! 죽어!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왜 나타나서 나를 괴롭혀!! 오줌도 똥도 제대로 못 누는 병신 새끼!! 네가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돈만 축내고 먹으라는 밥은 안 처먹고. 씨발 죽어!!! 죽으라고 병신 새끼야!!!!!!!!!!!!"

 방안의 공기가 얼얼할 정도로 정환의 고함이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을 찔렀다. 한 줌의 햇빛도. 이미 커질 대로 커진 검은 봉투 같은 그늘도. 처연한 색을 지니게 된 택도. 붉게 발설하는 정환도. 무언가를 흘러내리고 있었다. 땀과 섞인 것들이 방바닥을 채웠다. 택은 바싹 굳어버린 채 씩씩거리고 있는 정환을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어 벌린 입을 통해 나온 건 그저 으으-거리는 별 볼 일 없는 소음뿐이었다. 택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정환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정말 병신이 되어버린 택을 바라보다 답답해진 나머지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교한 아이들이 웃으며 골목을 가로질렀다. 빌어먹게도 화창한 날씨. 행복에 겨운 세상의 구름. 결코 자신의 곁에 머무르지 않은 구름 같은 것들. 정환의 몸을 대문에 기대어 쓰러뜨렸다. 찌그러지는 몸이 바르르 떤다. 이게 아냐.. 이게 아니라고. 중얼거리는 말은 뼈대를 잃어갔다.

 "아무것도 못하겠어... 아무것도......."

 정환은 택의 약 값을 벌기 위해 거리로 나설 때까지 한동안 대문 앞에 앉아 그늘의 뒷면 속으로 자신을 밀봉할 뿐이었다.

 

 

 

 7.

 택이 죽고 나서도 정환은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다. 밤에는 대리기사. 낮에는 공단에서 폐기물을 수거해 집합장으로 배송을 한다. 정환은 성실함을 인정받고 점차 일감을 늘릴 수 있었다. 돈은 자연스레 모였다. 월세방을 옮길 만큼 저금이 생겼다. 지금 정환이 다니는 수거 회사의 사장은 정환이 자살기도를 한 뒤 입원했던 병실의 옆자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이봐, 자네라도 살아야지.라는 말에 정환은 이끌리듯 날을 보냈다. 일을 마치고 들어서는 집 안에는 이젠 택의 흔적은 없었다. 택이 가져왔던 옷가지, 책들, 그가 쓰던 식기 전부. 버리거나 태웠다. 그를 따라 죽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그를 기억하지 않으려 애썼다. 처음엔 택을 원망했다. 그다음엔 자신을 탓했다.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세상에 대해. 자신에 대해. 택에 대해. 그 이전의 과거를 채운 불행에 분노했다. 목을 매달았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아직 자신은 죽을 각오가 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택에 대한 기억은 아주 조금만 남겨두기로 했다. 첫 날 만났던 그 모습. 그 뽀얗고 한들거리는 모습만. 기억하였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을 지켜주지 못한 나를 원망하라며 정환은 잠들 때마다 중얼거렸다. 죄책감은 하얀 베개 아래서 가끔 정환을 흔들었다. 어느새 그 죄책감이 동반된 악몽이 요람처럼 안락해질 만큼 익숙해졌다. 이러면 되는 거야. 정환은 하루하루를 남루한 잔등 아래서 빼앗기며 버텼다.

 

*

 

 일 년 가량 정신없이 일만 하고 살았다. 모은 돈으로 서울 근처의 도시에 월세방을 얻을 수 있었다. 짐은 적었기에 일할 때 사용하던 1톤 트럭이면 이사하기엔 거뜬했다. 오래된 것들. 품이 상한 것들은 쓰레기봉투에 버리거나 대형 쓰레기로 분류해 대문 앞에 모아두었다. 밖에 나와 있던 집주인은 정환에게 이젠 잘 살어.라고 첨언하였고. 정환은 겸연쩍어하며 네.라고 대답한다. 다행히 날이 따스하구먼. 주인 할배의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던 정환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러네요.라고 말한다. 한동안 반쪽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 주섬주섬 다시 주위를 정리했다. 이사 올 사람이 쓰기로 한 옷장은 그래도 두고. 이제 버릴 건 택이 간혹 쓰던 앉은뱅이책상 하나뿐이었다. 정환은 한 번도 사용하지 책상 앞에 앉아 엉거주춤 앉아 서랍을 하나 연다. 거기엔 녹이 슨 손톱깎이와 [천국의 문]이라 인쇄된 주황색 라이터를 발견한다. 쓸데없다 싶어 옆에 있던 쓰레기봉투에 집어넣는다. 열려있던 서랍을 닫고 그 옆에 있는 서랍을 연다. 정환의 시선과 서랍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던 손이 한순간에 멈춘다. 알록달록한 메모장. 분명 택의 것이다. 버린 줄만 알았던 거였는데. 정환의 미간 사이가 서서히 일그러진다. 무거운 돌덩이 같은 숨이 입천장을 두드린다. 창백해진 손으로 메모장을 꺼낸다. 수거일 때문에 지문이 닳아 없어진 손가락에 빳빳한 메모장의 커버가 들러붙었다 떨어진다. 정환은 긴 호흡을 한 뒤 천천히 메모장을 하나하나 넘긴다. 만나기 이전의 대화가 있는 메모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최 택 입니다. 스물다섯 살입니다. 말을 못 합니다. 메모장에 적어야 하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첫 모습의 그대로가 담겨 있는 것처럼 차근차근하고 담담한 말씨가 메모장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정환은 하나의 메모를 한동안 넘기지 못한다. '당신이 신경 쓰여요.. 좋은 의미로.' 정환은 입술을 꾹 문다. 죄여오는 가슴을 간신히 풀어내며 나머지 메모들을 살핀다. 그간 나눈 대화들이 팔랑거린다. 한순간에 있다 사라진 나비의 날갯짓처럼. 메모장은 한 장 한 장. 정환의 손에서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 장. 삐뚤빼뚤한 글씨체. 택이 손에 힘이 빠져 제대로 글을 쓰지 못 했던 즈음의 형태. 꾸역꾸역 적혀져 있는 택의 메모를 읽던 정환은 결국 그 위로 얼굴을 파묻는다.

 

 

 

 8.

 날 버리지 말아줘요. 당신 곁에 계속 있고 싶어요.

 

 

 

 9.

 탕진한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과 불행을 통째로. 정환은 무던한 하루살이를 계속했다. 불행에 대해 저속했고. 행복에 대해 성급했던 정환은 후회를 일삼는다. 꿈은 아비의 학대가 나오는 악몽보다. 택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변했다. 그래서 더욱 힘겨울지도 모른다. 택이 목소리를 지녔다면 그토록 은은한 소리로 웃었을까. 꿈에서 깨어 천장을 바라보다. 정환은 몇 번이나 울음을 토해냈다. 택의 환한 미소는 아프다. 아프다는 것이 아비에게 범해지고. 못에 찔려 눈알이 버려지고. 택을 떠나보낸 그 고통보다 아프다. 왜 나는 분노했을까. 한순간의 치기로 인해. 행복이 가져다준 기만으로 인해. 택에게 상처 입혔다. 사랑하므로 상처 입혔다. 무력했기에 택을 차갑게 만들었다. 정환은 거추장스러운 울음으로 목이 쉴 만큼 새벽을 지샌다. 다음날 뜬 눈으로 일을 나선다. 통장엔 의미 없는 숫자들이 늘어간다. 사장은 선 자리가 있다며 여자 사진을 보여주었다. 정환은 정중히 사양했다. 노총각으로 죽을 셈이냐는 사장의 비아냥에 정환은 쓸쓸한 표정으로 웃는다. 그러게요. 힘없는 그의 대답에 사장은 혀를 찬다. 얼마 전 아비의 부고를 먼 친척에게 전해 들었다. 불에 타 죽었다고 했다. 칠 만 원을 빌려 갚지 않는 그에게 앙심을 품은 이웃이 저지른 일이었다. 일이 터지고 가해자 쪽 가족들이 몰려와 정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합의해주기를 바랐다. 정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합의는 필요 없어요. 아니, 합의 따위 안 해도 돼요." 이미 아비의 죽음은 정환에겐 사소한 것이었다. 악몽이라 하기엔 너무도 빈곤해진 일부였다.

 밤늦도록 마감을 하고 돌아오는 길. 덜컹거리는 소음이 심한 1톤 트럭은 예전 택과 곧잘 걸었던 거리를 지나친다. 사람들은 의심이 사라진 표정으로 걷는다. 요란스러운 간판들. 우중충한 전당포. 몰래 개고기를 파는 정육점. '홀리데이'라는 이름의 여관. 탄식이 난무한 이용원. 흰 연기가 대문이 된 고등어자반 먹자골목. 부스러기처럼 망해가는 전파상. 정환은 풍경을 하나하나 비극의 단편으로 내버려 두고서 스쳐 보낸다. 옷깃이 젖을 만큼 가랑비가 내리고. 모든 것의 걸음이 흠칫한다. 정환은 서늘해진 공기에 라디오를 켜기 위해 손을 뻗는다. 지직- 소릴 내는 라디오 속 소음. 오늘따라 주파수가 엉망이다. 비는 거세어지고. 한참을 버벅거리다 주파수를 가까스로 맞춘다. 정환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차창을 바라본다.

 맞은편 도로의 차가 자신에게로 돌진하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썰물처럼 들이닥치는 트럭의 기세에 놀란 정환은 황급히 핸들을 꺾는다. 빗길에 미끄러진 바퀴는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이번엔 가로수의 일그러진 껍데기가 보인다. 다시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정환의 손이 핸들 위에서 바삐 움직인다. 잘만하면 가까스로 피할 수 있을 찰나.

 "날 버리지 말아줘요."

 갑자기 라디오에서 명확한 발음이 들렸다. 노래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느릿한 말투. 꿈에서 들어본 웃음소리와 같은 음계. 달그락거리며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신음 대신 뱉던 음절 사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너인 건가. 정환은 적막한 표정으로 차장에 비친 자신을 본다. 슬로우 모션처럼 거대해지는 가로수의 기둥. 천천히 핸들에서 손을 놓는다. 눈을 감는다. 너를 만나기 위해. 얇은 눈꺼풀 닫는다.

 

 

 

 10.

 나, 이제야 너에게로 간다.

 

 

 

 11.

 분노의 꽃보다. 증오의 우산보다. 회한의 외투가 아닌.

 내 곁엔 너의 초라한 눈길만이 있어주기를. 고여 있기를.

 오로지 너만이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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