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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상 위에서 못 보던 볼펜을 발견했다. 아빠가 사오셨나... 그러기에는 꽤나 사용한 흔적이 있는 볼펜이라 낯선 볼펜을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 볼펜 끝에 작게 쓰여 있는 ‘김정환’이라는 세 글자에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정환이 볼펜이구나. 지난번에 선우랑 동룡이랑 같이 방에서 공부했다더니 그 때 흘리고 갔나보다. 잘 챙겨뒀다가 줘야겠다고 5초 정도 생각했다가 고개를 좌우로 슬쩍 저으며 자주 들고 다니는 가방 안에 조심스럽게 볼펜을 챙겨 넣었다. 혹시나 찾으면. 찾으면 주고, 안 찾으면 내가 써야지. 어쩐지 남의 물건 훔쳐다 쓰는 기분이 들어서 양심의 한 구석이 콕콕 찔려왔지만 흘리고 간 물건이니까, 하며 스스로 합리화를 시켰다. 찾으면 줄 거니까 괜찮아. 진짜 찾으면 줄 거야. 듣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지만 스스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기원에 갈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섰다.

 한동안 잡힌 대국도 없고, 인터뷰 같은 스케줄도 없어서 기원에서 하는 일이라곤 그저 기보를 보며 지나갔던 대국을 되짚어보거나 연습생들을 조금씩 봐주는 일들이었다. 부장님도, 대리님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쉬겠냐며 얼른 들어가서 쉬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어쩐지 집에 있으면 정말로 백수가 된 기분이 들어서 그러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을 꺼내기는 조금 부끄러워서 “기보도 좀 보고, 이럴 때 아니면 연습생들 언제 봐주겠어요.” 라고 대충 얼버무리고는 소파에 몸을 더욱 푹 파묻었다. 부장님과 대리님은 그 고집을 어떻게 꺾겠냐며 고개를 저으셨고, 나는 슬쩍 웃어 보이는 것 외에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새 볼펜이 생긴 이후에,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환이 손에서 제법 오랜 시간을 보낸 볼펜이 내 손에 들어온 이후에 필기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책을 워낙 깨끗하게 봐서 기보에도 메모를 하는 일이 잘 없었는데 괜히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끄적거려보기도 하고, 어느 날은 일기를 써보겠답시고 문구점에 들러 자그마한 노트도 샀다. 아무 무늬 없는 단순한 까만색 노트였지만 그 단순한 까만 노트에서 어딘가 정환이가 연상이 되어서 망설임도 없이 집어온 노트였다. 고작 노트 따위에서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게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정환이가 이 노트와 같은 노트를 일기장으로 쓰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단지 그냥... 그냥 노트를 보자마자 정환이가 떠올랐다.

 일기장은 매일 채울 수는 없었지만 기원에서 일찍 돌아온 날에는 한 줄이라도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일기장에 끄적거렸다. 며칠씩 날짜가 이어지는 날도 있었고, 이틀, 사흘을 건너뛰는 날도 있었지만 딱히 날짜를 채우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날짜가 이어지지 않은 것은 내게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일기장에 채워지는 내용들은 대부분 사소한 일들이었다. 가령 아침에 우유를 가지러 평소와 같은 시간에 나갔는데 배달해주시는 분이 늦으셔서 20분이나 평상에 앉아 기다렸던 일이나, 기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피자를 사왔더니 동룡이가 행국이처럼 반겨준 덕에 기분이 좋았던 일. 그리고 조금 사소하지 않은, 김정환에 관한 마음을 조심스럽게 꾹꾹 눌러 털어놓은 페이지도 있었다.

 - 아무래도 좋아하는 것 같다. 정환이를.

 그렇게 시작한 페이지에는 무어라 망설이듯 글자 몇 개를 나열했다가 새카맣게 그 위를 덮은 볼펜 자국만 남아있었다. 원을 그리듯 새카맣게 칠해진 곳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매만졌다. 꽤나 전에 쓴 일기라 가려진 부분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지금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는 내가 정환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아무래도 좋아하는 것 같다.' 가 아니라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로 변했다는 것이다. 나는 썼던 페이지들을 뒤로 넘겨 빈 페이지를 펼치고 그 위에 머릿속에서 맴돌던 말을 작은 글씨로 끄적거렸다.

 - 보고 싶다. 정환이 보고 싶다.

 잘 쓰지도 못한 글씨를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보고 싶다. 분명 어제도 봤고, 오늘 아침에도 우유를 가지러 나갔다가 학교에 간답시고 선우랑 동룡이랑 시끌시끌하게 골목을 벗어나는 모습을 봤는데도 또 보고 싶었다. 어떡해. 진짜 많이 좋아하게 됐나봐. 볼펜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쩐지 서러워졌다.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시작해서 짝사랑으로 끝날 게 뻔한 일이라는 걸 알아서 더 서러워졌는지도 모른다. 정환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스스로 인정을 한 뒤에 처음으로 가져본 생각이었다. 애초에 이 마음을 털어놓지 못할 걸 알았고, 고백을 한다고 해도 친구로써 지낼 수 있는 기회마저 틀어질 것을 알았기에 더더욱 할 수 없었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느리게 위아래로 쓸어내렸다가 한숨을 쉬듯 숨을 푹, 크게 내쉬고 일기장을 덮었다. 치솟기 시작한 마음을 천천히 고르고 진정시키며 깔아둔 이불 위로 몸을 뉘였다. 어쩐지 쉽게 잠들지 못할 밤이 될 것 같았다.

 

 기원에서 돌아왔더니 한동안 잠잠하던 방에 덕선이를 제외 한 선우, 동룡이, 그리고 정환이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방으로 들어서는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건 동룡이었다.

 "오랜만에 다 모였네. 바빴어? 덕선이는?"

 "최희동, 너 학교 그만둔지 너무 오래 돼서 시험 기간도 다 잊어버렸나보다. 우리 오늘 시험 다 끝났어. 덕선이는 내일 끝나고."

 웃으며 내 말에 대답하는 선우의 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가 앉았다. 언제 다 끓인 건지 작은 상 위에는 라면이 끓여진 냄비와 김치가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고, 내가 자리를 잡고 앉자 정환이가 익숙하게 접시와 젓가락을 챙겨 내 앞에 놓아주었다. 내 앞으로 접시와 젓가락을 내미는 그 손도 새삼스럽게 좋아서 잠깐 멍하게 그 손을 바라봤더니 정환이가 내민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야, 최희동. 뭐 해? 안 받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접시와 젓가락을 받아 들고 서툴게 냄비에서 라면을 조금 덜어 냈다. 손만 봐도 좋아, 어떻게... 괜스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일기장에 이거 써야지. 정환이는 손도 멋있다.

 다들 점심을 굶고 온 건지 제법 많은 양의 라면을 빠르게도 비워냈고, 라면을 다 먹은 뒤에는 다 함께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얼마간 별 의미도 없는 농담들을 주고받았다. 조용하던 방에서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 시간을 보내는 게 꽤나 즐거웠다.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을 둥둥 떠올리며 얼굴 가득 미소를 띄웠다가 넷 중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돌아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라면을 먹느라 벗어둔 외투도 단정하게 정리하고, 매일같이 매고 다니는 가방에서 기보와 필기구들도 꺼내 제자리에 놓아 정리를 하는데 가방의 앞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그 볼펜이 보이지 않았다. 필통을 따로 가지고 다니지 않아서 항상 같은 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녔는데 감쪽같이 볼펜이 사라져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방을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동룡이와 선우는 누운 채로 또 칠칠치 못하게 뭐 흘리고 왔냐? 라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지만 정환이는 몸을 일으켜 가방을 뒤적거리는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뭐 잃어버렸어?"

 "어... 볼펜. 볼펜 하나가 없어졌어. 그거 그... 좋아하는 건데..."

 볼펜심이 다 떨어져서 볼펜심만 따로 구입하기까지 하면서 쓰던 거였는데. 중얼거리듯 덧붙이는 내 말에 정환이는 그렇게 좋아하는 볼펜인데 그걸 잃어버리냐고 타박을 하면서도 책상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내가 찾는 볼펜이 어떤 볼펜인지도 모르고 찾는 걸 도와주었다. 그거 사실 네가 흘리고 간 볼펜이야. 네가 쓰던 거라서 좋아진 볼펜이야. 그래서 찾는 거야. 책상을 뒤적이는 너를 잠깐 바라보다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목구멍 아래로 꾹 눌러 삼켰다. 결국 볼펜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고, 기원에 두고 왔거나 어딘가 길에서 흘렸을 거라는 정환이의 말에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야. 그 볼펜 비싼 거냐?"

 "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런 거 아니면 내가 하나 사줄게. 뭐 그렇게 중요한 거라고..."

 그러니까, 네가 쓰던 볼펜이라서... 그렇게 말을 하려다가 제 입을 양 손으로 틀어막았다. 볼펜을 찾는 것에 집중했더니 저도 모르게 담아둔 이야기가 흘러나올 뻔해서 토끼눈을 하고 입을 다물었더니 정환이가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한 채로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뭐."

 "아, 아냐. 아무것도."

 정환이는 싱겁다는 듯이 피식 웃고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나도 정환이를 따라 웃으며 어질러진 책상 위를 다시 정리했다.

 정환이에게는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중요한 볼펜도 아니었다고 말은 했지만 그 날 이후 볼펜을 찾으려고 기원 곳곳을 다 뒤지고, 혹시나 싶어 봉황당까지 다 뒤졌지만 볼펜은 끝끝내 찾아낼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흘린거지... 볼펜에 발이 달려서 도망을 간 것도 아닐 텐데. 한 번만 딱 더 찾아보고 포기해야지. 그런 생각으로 다시 한 번 방 안을 구석구석 찾아보다가 답답한 마음에 책상 의자에 걸터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비싸고 좋은 볼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잠깐사이에 제법 정이 들었었는데. 그렇게 빈 방을 한숨으로 가득 채워대다가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고도 없이 들어온 사람은 정환이었고, 정환이는 독서실 가는 길에 들렀다며 책상 위에 잘 포장된 상자 하나를 툭 던져주고 인사를 할 틈도 없이 손을 흔들며 그대로 나가버렸다. 잠깐 열렸다 닫힌 그 방문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책상 위에 놓인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뭐지...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며 상자를 살폈다. 지금 보니 예쁘게 리본까지 달려있는 상자의 포장지를 뜯어내자 투명한 아크릴 상자 안에 하얀색 볼펜이 가지런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에 흘렸는지도 모르게 잃어버린 플라스틱으로 된 싸구려 볼펜이 아니라 은은하게 펄이 들어가 있는, 보기만 해도 예쁜 볼펜이었다. 무게도 조금 묵직해서 쓰기에도 편할 것 같았다. 상자 안에는 자그마한 쪽지도 하나 있었는데, 정환이가 직접 써서 안에 넣어둔 것 같았다.

 - 백화점에서 비싸게 주고 산거야. 이거 잃어버리면 죽는다.

 글씨에서 정환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쪽지를 읽으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한참을 그 볼펜을 들여다보다가 볼펜을 잃어버린 뒤부터 잘 쓰지 않았던 일기장을 꺼내 중간쯤을 펼치고 새로 선물 받은 볼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눌러 썼다.

 - 정환이가 준 볼펜 예쁘다. 고마워, 정환아.

 - 좋아해.

 쓴 글자들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다가 좋아해, 라고 쓰인 글자 위에 마구 선을 그려내 아무도 모르게 꺼낸 고백의 말을 덮었다.

 

 

 

 

 

 

 성덕선과 콘서트에 갔다가 찍었던 사진을 인화했다. 사진속의 내 손은 어색하게 성덕선의 어깨위로 안착해 있었고, 성덕선은 긴장한 듯 굳은 몸을 하고서는 카메라를 향해 시선을 고정해 어색한 내 손과 같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같이 찍은 사진이라 당연히 두 장을 인화해서 한 장을 성덕선에게 쥐어줄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했다가는 내가 정말 성덕선과 사귀는 사이라도 되어 버릴까봐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성덕선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그것이 오래 된 친구에게 갖는 정인지, 남자로써 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다 큰 어른인 척 굴었지만 나는 아직 어렸고, 구분하는 데에 있어서는 어른인 척 굴 수 없었다. 그래, 아직 서투르다는 말이 맞겠다.

 성덕선과 함께 찍은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지갑 속에 사진을 넣는 대신 서랍 깊숙한 곳에 조심스레 사진을 넣고 그 위에 이제는 눈길도 주지 않는 중학교 교과서를 올려두었다. 그래, 급한 거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보자. 시선을 닫힌 책상에 꽤나 오랜 시간 고정했다가 한숨을 낮게 내쉬고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진을 인화하고 책상 서랍에 그 사진을 숨긴지 꽤나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 숨겨둔 사진을 가끔 떠올렸고, 그리고 금세 잊어버렸다. 성덕선에 대한 마음도 더 이상 커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에는 꿈을 꾸었다. 꿈에는 짧은 청치마를 입은 성덕선이 나왔다. 저렇게 입고 다니니 춥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지. 혀를 끌끌 차고 있는데, 성덕선은 내게 왜 사진을 제게 주지 않았냐고 세모꼴로 눈을 치뜨며 타박을 했다. 나는 ‘우리가 사귀는 것도 아닌데 같이 찍은 사진을 나눈다는 게 이상하잖아.’ 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깟 꿈에서까지 나는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꿈속의 성덕선은 나를 향해 한숨을 푹 내쉬고 등을 돌려 멀어졌다. 이상하게도 그 뒷모습에 성덕선을 잡아야겠다는 생각보다 마음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크게 불쑥 솟아올랐다.

 눈을 떴을 때는 아직 해가 채 뜨지도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했을 때가 불과 얼마 전인데, 이렇게 꿈 하나에 마음을 정리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면 내가 성덕선을 품었던 마음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침대 시트에 몸을 묻고 아무것도 없는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눈만 꿈뻑거렸다.

 그렇게 내 첫사랑은 끝이 났다.

 시작도 하지 않은 내 첫사랑은 그깟 꿈 하나에 끝이 났다.

 사랑에 실패한 남자가 꼴사납게 우는 모습을 가끔 엄마가 보시던 드라마에서 접하곤 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 지는 않았다. 시작도 하지 않은 사랑이라 고이 접어 마음속에 품는 것도 쉬웠나보다. 아니, 이게 사랑이긴 했나. 성덕선을 좋아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고민할 때보다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고민거리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 앉아 가지런하게 모은 무릎 위로 이마를 기댔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그 감정 자체를 너무나 쉽게 생각 했던 것만 같아서 스스로에게 화가 날 지경까지 감정이 치솟았다.

 한심한 새끼.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손에 들고 방문을 벌컥 열었다. 아직 조용한 집 안을 한 번 둘러본 뒤 망설임 없이 현관을 벗어났다. 외투를 몸에 꿰어 입는 것은 현관을 조용히 닫은 뒤였다. 아직은 찬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자 방 안에 있었을 때보다는 머릿속이 정리가 되는 것도 같았다.

 사실 정리를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은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마음대로 마음에 품었다가, 아닌 것 같으니 품었던 마음을 그대로 묻었을 뿐인데 이게 이렇게나 죄책감을 가질 일인가. 뒷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파란 대문을 열고 나가자 골목 평상에 앉아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최택이 눈에 들어와 눈을 둥그렇게 떠올렸다. 우유를 가지러 나오는 시간 치고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약 먹고 그러더니 이제는 아예 잠을 못 자나 싶은 어이없는 생각까지 떠올랐다. 최택은 몸을 꿈틀꿈틀 움직여 평상 가운데로 자리를 잡고 앉더니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앉으라는 거지, 이거. 잠깐 바람만 쐬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숨을 한 번 내뱉고 최택의 옆으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너 안 잤어?”

 “정환아. 아니... 그냥 눈이 떠졌어. 너는?”

 “어, 나도. 자다가 깼어. ... 너 발 안 시렵냐?”

 어딘지 멍해 보이는 최택을 잠깐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더니 슬리퍼만 신고 있는 하얀 맨발이 보였다. 그제야 다시 최택의 몸을 찬찬히 살피는데, 외투도 하나 제대로 입지 않고 얇은 반팔 티에 후드 집업 하나만 걸친 모습에 절로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이러고도 감기 안 걸리는 게 신기하다, 신기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며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최택의 어깨 위로 툭 걸쳐줬더니 뭐가 좋은지 최택이 실실 웃었다.

 “웃지 마, 새끼야. 정들어.”

 최택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걸까. 이유도 없이 웃는 건 잘해요, 하여튼. 여전히 헤실 대며 웃는 최택의 모습에 괜히 혀를 한 번 차고는 헝클어진 최택의 뒷머리를 슥슥 쓸어내렸다.

 “나 추워서 먼저 들어간다. 외투 나중에 갖다 줘.”

 조금씩 날이 풀어지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은 차가운 새벽 공기에 어깨를 움츠려 몸을 덜덜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택은 어딘지 서운한 얼굴로 일어나는 나를 바라봤고, 나는 다시 한 번 무심하게 최택의 머리카락을 쓸어준 뒤 파란 대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해보니 최택이랑 둘이 찍은 사진은 없네.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왜 들었는지 모르겠다. 현관을 열고, 언제부턴지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시는 엄마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욕실로 들어서서 아직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얼굴을 찬 물로 씻어내며 문득 차오른 생각이었다.

 왜 없을까. 둘이 찍은 사진.

 수건으로 얼굴을 투박스럽게 닦아내며 어릴 때부터 하나씩 모아둔 앨범 속의 사진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최택이 쌍문동 골목으로 이사를 온 뒤부터 다 같이 어울려 다니며 제법 사진도 많이 찍었던 것 같은데 최택과 함께 찍은 사진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없나? 생각의 끝에 결국 책장 구석진 곳에 자리한 앨범까지 찾아 꺼냈다. 오랜만에 어린 시절 추억을 되짚어보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최택과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을 찾기 위해 펼친 앨범이었다. 꽤나 두꺼운 앨범의 끝자락에는 최택과 같은 교복을 입는 중학교 마지막 날의 사진도 함께 꽂혀있었다. 사진 속의 최택은 지금보다 더 앳된 얼굴을 하고 최택과 닮은 하얀 꽃다발을 품에 안고 예쁘게도 웃고 있었다. 그래, 이건 예쁘다는 말 외에 설명이 되지가 않는다. 사진 속에는 학교를 배경으로 나란히 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선우도, 도롱뇽도, 나도 있었지만 유난히 최택의 웃는 얼굴이 뇌리에 콱 박혀들었다. 처음 보는 사진도 아닌데 유난스럽네... 앨범에 꽂혀있는 졸업식 사진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고 다시 한참을 사진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잠깐 고민하다가 책상 서랍 깊숙하게 넣어두었던 성덕선과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 그 옆에 나란히 두었다. 사진 두 장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사진속의 성덕선과 최택에게 번갈아가며 시선을 두었다. 애초에 성덕선과 최택을 왜 번갈아가며 보고 있는 건지는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한숨을 푹 내쉬고 성덕선과 찍은 사진을 다시 서랍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 아오, 진짜. 이게 뭐라고...”

 그 졸업식 사진이 뭐라고. 최택과 함께 찍은 사진이 뭐라고 이렇게 뜬금없이 머릿속에 꽂혀 복잡하게 생각을 헤집는 건가.

 책장에서 잘 쓰지 않는 노트를 하나 꺼내 종이 하나를 북, 찢어 선우와 동룡이의 모습을 가리느라 사진의 반을 가렸더니 나란히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내 모습과 최택의 모습만 사진 속에 남았다. 그렇게 반을 가린 사진을 바라보다 앨범에 제대로 사진을 넣어두고 책장에 앨범을 꽂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그냥 사진을 하나 찍자고 하지. 이게 뭐하는 짓이냐.”

 마른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가 책상 서랍을 뒤적거려 한참을 쓰지 않았던 빈 액자를 꺼내 들었다. 언젠가 최택과 함께 사진을 찍게 되면 그 사진을 여기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액자를 손에 들고 어디에 둬야 사진이 조금 더 잘 보일지 고민했다. 아직 찍지도 않은 사진을 두고 액자의 위치부터 고민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지만 일단은 이 문제가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 더 큰 고민거리였다. 책장 위에도 올려보고, 벽에 걸어볼까도 생각했다가 스탠드 아래에 조심스럽게 액자를 올려둔 뒤 다시 한 번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 일단 사진이나 찍고 생각하자. 사진이나 찍고. 근데 액자가 너무 지저분하네. 깨끗한 걸로 사야겠다.

 

 

 

 

 

 

 이상하게 눈이 번쩍 뜨여 쉽게 잠이 달아난 아침이었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마치 제게 인사라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를 비웃었다. 기분 좋다고 아주 별 생각을 다 하네. 유치원생이냐? 어쨌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방을 나서자 엄마가 부엌에서 분주하게 아침 식사를 차릴 준비를 하고 계셨다. 엄마의 뒤통수에 대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더니 깨우지도 않았는데 어쩐 일로 알아서 일어났냐고 꽤나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셨다. 그래도 꽤나 부지런하게 잘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머쓱한 얼굴로 뒷목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고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물을 한 잔 가득 따라 마셨다. 물을 마신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으며 아침으로 된장찌개 끓였으니 얼른 씻고 오라는 엄마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최택의 얼굴을 떠올렸다. 최택은 일어났나... 밥은 먹었는지 모르겠네.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떠오른 최택의 얼굴을 멍하게 생각하다가 고민을 하느니 데려오자 싶어 현관으로 빠르게 걸어가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김정환. 너 어디가? 이제 밥 다 됐는데.”

 “택이 방에요. 택이 데려올게요. 아침 같이 먹게요.”

 엄마는 아침도 안 먹고 어딜 가냐고 잔소리를 할 예정이었는지 주걱을 들고 현관까지 따라 나오셨다가 안 봐도 아침식사 따위 가볍게 건너 뛸 최택을 데려온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셨다. 하여튼 최희동, 동네 상전이지. 엄마에게 손을 슬쩍 들어 흔들고 곧장 최택의 방으로 향했다. 아저씨는 봉황당에 나가신 건지 집에 계시지 않았고, 아니나 다를까 최택은 아침밥 대신 잠을 선택한 듯 이불에 파묻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자기 전에 무슨 약을 얼마나 먹은 건지 머리맡에는 물병과 컵, 그리고 비워진 약 봉지 몇 개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약 좀 줄이라니까, 말은 더럽게도 안 듣지.“

 약 봉지에 시선을 두었다가 혀를 쯧, 하고 한 번 차고는 약 봉지를 한데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아무렇게나 널려진 물병과 컵도 쟁반 위에 잘 정리해 책상위로 올린 뒤 최택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빨리 이 등신을 깨워서 라 여사님이 정성스레 차린 아침 식탁 앞에 앉혀야 할 것 같은데, 한 편으로는 곤히 자는 이 모습을 조금 더 눈에 담고 싶기도 했다.

 “... 뭐... 5분 정도면...”

 5분만. 딱 5분만. 방 한쪽에 걸려있는 시계를 잠깐 응시했다가 다시 최택의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이게 뭐라고 자꾸 생각이 나냐, 이게 뭐라고. 자는 최택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뺨을 긁적이며 흐트러진 앞머리부터 찬찬히 시선을 내리며 최택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속눈썹 엄청 기네. 성덕선보다 더 긴 것 같다. 최희동 코가 이렇게 오똑했던가? 입술은 또... 왜 이렇게 예쁘냐. 저도 모르게, 어딘가 홀린 듯 손을 뻗어 최택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살짝 쓸었다. 마냥 부드러울 줄만 알았던 입술은 생각보다 까끌한 촉감으로 손가락 끝에 걸려왔다. 여자애들처럼 뭐, 입술에 바르는 거라도 사줘야하나.. 눈썹 사이를 좁혀 인상을 쓰며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조금 벌려냈더니 안쪽으로 입술이 터져서 검붉게 피딱지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이건 피곤해서 그런 거야, 아님 뭐 어디가 안 좋아서 그런 거야. 남 걱정이라고는 잘 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최택은 예외였다. 어린 시절부터 예외였다. 쌍문동 등신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좀,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게 자꾸 눈에 밟혔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성덕선이, 도롱뇽이, 성선우가 최택을 챙기고 걱정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뭐가 다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5분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정신없이 최택의 얼굴을 눈에 담다가 다시 시계로 시선을 돌렸을 때는 생각했던 5분이 한참 전에 지나있었다. 더 늦으면 라 여사님이 골목이 다 울리도록 제 이름을 불러댈 것 같아서 죽은 듯 곤히 잠들어있는 최택의 어깨를 살살 붙잡아 흔들었다.

 “야, 최택. 일어나. 엄마가 밥 먹으러 오래.”

 최택은 어깨를 흔들며 깨우는 내 목소리에도 잠에 취한 듯 잠꼬대로 무언가 웅얼거리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잠을 못 잤기에 이렇게 아침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나 싶어 조금 더 자게 내버려 둘까 고민하는 사이 최택이 눈을 부스스하게 떠서 멍하게 천장을 바라봤다.

 “일어났냐?”

 최택은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여전히 눈은 반만 뜬 상태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보여서 나도 모르게 최택의 앞머리를 쓸어주다 다 갈라져 피딱지가 앉은 최택의 입술 위로 내 입술을 포개어 겹쳤다. 그게 최택과 나의 첫 입맞춤이었다. 나는 내가 최택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한참을 입술을 마주대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쓸어낼 때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것 같기도 하고... 사탕을 빨 듯 최택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살며시 빨아내고 고개를 살짝 떼어냈다. 최택은 조금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제야 최택에게 한 짓을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야, 어... ... 야, 빨리... 그, 일어나서 밥 먹으러... 그, 야. 빨리 일어나.”

 사람이 당황하면 아무 말도 안 나온다더니 그게 진짜였네. 아직도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최택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급하게 최택의 방을 벗어나 파란 대문 안으로 향했다. 엄마는 택이 데리러 간다더니 왜 혼자 왔냐고 물으셨지만 금방 올 거라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방으로 후다닥 들어가 이불에 몸을 파묻었다. 웬열, 진짜 미쳤네. 미쳤어. 아침이라 잠이 덜 깼나. 그렇게 방 안에서 한참동안이나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현관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최택 특유의 낮고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이제 오냐며 최택을 마치 막내아들 반기듯 반기셨고, 내 방을 향해 빨리 안 나오고 뭐하냐는 성화에 어쩔 수 없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방을 나섰다. 최택은 안경을 쓰고 있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가가 조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먼저 나가신 아빠를 제외하고 최택과 나, 그리고 엄마와 형. 넷이서 둘러앉은 식탁은 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아마 그 어색함은 최택과 나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정봉이 형은 최택이 안경을 쓴 걸 처음 본다는 표정을 지으며 젓가락질을 서툴게 하는 최택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 형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최택은 제 안경을 가리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눈이 좀 뻑뻑해서요. 쓰면 좀 편하거든요.”

 형은 궁금증이 해결 됐다는 듯 시원한 얼굴로 음식에 집중을 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최택의 안경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흘끔흘끔 최택의 안경에 시선을 두었다가 생각의 끝에 저걸 쓴 채로 뽀뽀를 하면 엄청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는 게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했다.

 “동생아. 너는 왜 밥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렇게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니?”

 그렇게 최택의 얼굴을 흘끔거리며 훔쳐보다가 뜬금없이 들려오는 형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형 쪽으로 휙 돌렸다. 다행인지 형은 내 얼굴이 아닌 내 밥그릇에 시선을 두고 있었고, 내가 밥을 다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남았으면 형에게 주겠니?’ 하고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밥을 형의 그릇으로 옮겨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아주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 아니, 그래. 안경 낀 거 자주는 못 봐도 어쨌든 가끔씩 보고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 건 뭔데. 아주 그냥... 아까처럼 침대에 몸을 푹 묻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나지막한 최택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 뭐, 뭐. 밥 먹었으면 가지 왜 왔어.”

 “너 보고 가려고.”

 최택은 충동적으로 입을 맞춘 뒤에 얼마나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지 절대로 모를 것이다. 알면서는 저렇게 평온한 얼굴로 내 방에 들어올 수 없을 텐데. 잔뜩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본 건지 만 건지 최택은 침대 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내 어깨를 살살 두드렸다.

 “정환아.”

 “... 아, 왜. 등신아.”

 나는 최택에게 ‘너한테 충동적으로 입 맞춘 거 쪽팔려서 뒤지겠으니 좀 있다가 보면 안 되겠냐?’ 라고 말하지 못했다. 망했네, 진짜. 스스로에게 욕을 한 바가지를 퍼부으며 겨우 고개만 들어 최택을 바라보는데, 내가 최택에게 다시 한 번 왜, 라고 묻기 전에 최택이 내 입술에 제 입술을 요령도 없이 꾹 눌러오는 게 먼저였다. 나는 내 눈가 어디로 부딪히는 최택의 안경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 마주 닿아오는 따뜻한 입술에 눈을 둥그렇게 떠올렸다. 최택은 내가 했던 것처럼 입술을 마주대고 한참을 있다가 천천히 내 위, 아랫입술을 빨아 당기고 고개를 살며시 떼어냈다. 나는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만 같은 기분에 멍하게 최택을 바라보며 어, 그게, 야... 저, 야, 최택... 제대로 된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만 주르륵 늘어놓았다.

 “.... 나 갈게. 나중에 봐.”

 최택은 아까보다 조금 더 붉어진 얼굴로 방을 나섰고, 나는 그렇게 한참을 침대에 엉거주춤하게 엎드린 채 최택이 나간 방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 시트에 얼굴을 푹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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