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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녕 3월 날씨가 맞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춥고, 심지어 눈까지 꽤 소복하게 쌓여있는 사립 S고 정문에는 눈보다 더 하얀 바탕의 현수막이 걸려있다. 신입생 여러분의 청춘을 응원합니다! - 2010년 사립 S고 입학식. 식이 시작되려면 한 시간 하고도 30분이나 더 있어야 하지만 택은 일찌감치 교문 앞에서 딸기맛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현수막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다. 바로 며칠 전까지 중학생이었단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등학교 교복이 제 피부인양 잘 맞는 택의 모습은 실로 놀라웠다. 작년까지만 해도 얼굴에 통통하게 붙은 볼살이며, 또래보다 약간 작은 키로 같은 반 아이들 손에 볼이 붙들렸었는데.

 “우리 Y중 모찌가 천재 화가시랜다! 오구오구 그래쪄요! 우리 택이 그림 잘 그려쪄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택을 마치 남동생처럼 다루던 아이들 모두 지금 당장 S고 앞으로 와야 할 것이다. 1년 만에 키가 훌쩍 자란 것은 물론 모두 입을 모아 매력 포인트라고 찬양하던 볼살이 쏙 빠지자, 여전히 예쁘장하지만 나름 남자 태가 나는 날렵한 얼굴선을 보면 다들 택을 못 알아볼 것임이 분명하다.

 대학 교수인 어머니와 치과 의사인 아버지를 둔, 금수저라고 하기엔 약간 애매한 그래, 은수저라고 하자. 은수저 택은 여느 천재들처럼 어릴 적부터 미술에 두각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시간을 끔찍이도 싫어하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수업시간 때 백지를 내기 일상이어서 언젠가 부모님을 소환시켰던 적이 있다. 애가 도통 미술에 관심이 없는 건가 싶어 중학교 2학년 때 미술 학원에 보내게 되었고, 그 때 택의 재능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고초를 다 겪어본 사람이 그린듯한 거친 추상화 안에는 온갖 역경이 담긴 듯, 보는 사람들 마다 적어도 하나씩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그림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작은 정사각형 캔버스 안에 치덕치덕 칠해져있는 유화물감의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져 괜히 마른 침을 삼키면서도 절대 시선을 떼지 않는. 중학생 택의 그림엔 그런 힘이 있었다.

 물론 인물화나 정물화도 곧잘 그려냈지만 어쩐지 택은 추상화를 고집했다. 아주 가끔이지만 저 기분 내킬 때 마다 자화상을 그렸는데, 오히려 이 몇 안되는 자화상으로 인해 택이 지역신문에 실리고, 학원 광고지에 등장하고 결국 그 유명한 초록창 메인 페이지에 택의 이름이 실렸다. 헤드라인은 여타 인터넷 기사처럼 진부했었던 게 흠이지만.

 ―이중섭 비켜! 15살 소년 최택, 한국 추상화계의 기라성

 게임머니를 충전하기 위해 인터넷 창을 열었던 택은, 저 민망한 헤드라인을 보고 태어나 처음으로 욕을 했었다.

 딱히 제 꿈을 자신에게 투영하고 싶을 정도로 현재의 삶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부모가 아니었기에, 주위에서 숱한 스폰서 제의가 들어와도 이를 모두 거절하고 택은 무리 없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저씨들이랑 말 안통해요. 그냥 애들이랑 지낼래.”

 열다섯 살 중학교 2학년 아이다운 이유였다. 저에게 비아냥거렸던 미술 선생을 향한 복수 또한 깜찍하기 짝이 없었다. 스폰서 제의를 하던 곳에서 전시회를 열어 택을 초대할 때 마다 꼭 인터뷰를 요구했는데, 그럴 때 마다 택은 이 말로 인터뷰를 마쳤었다.

 “아. 그 때, 제 그림보고 쓰레기 같다고 하셨던 김무성 선생님! 감사해요! 덕분에 이렇게 이 악물고 열심히 그릴 수 있었어요!”

 

 “반가워요, 최택군. 우리 S고에서 순탄한 학교생활하기 바랄게요.”

 “네….뭐…….”

 한 시간 반이나 일찍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다름 아닌 이사장과의 대면이었다. S고의 홍보대사가 되어줄 것이 뻔한 일이었기에 이사장은 자기 학교에 지원한 택을 그냥 가만둘 리 없었다. 6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훨씬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잘 뻗은 택의 손가락을 세게 쥐어 잡은 이사장은 팔에 모터라도 달린 듯 연신 빠르고 큰 악수를 해댔다. 덕분에 택은 입학 전부터 학교에 대한 애정이 빠르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이사장과의 짧은 대면을 마치니 입학식까지 한 시간하고도 10분이 남았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일찍 부른 건지 택은 인상을 구기며 이사장실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작고 익숙한 직사각형 종이곽을 그러쥐며 잠시 복도를 두리번거린다. 역시나 아무도 없는 복도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려는데 저쪽 맨 끝에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1년간 열심히 자라 저도 제법 키가 큰 편이지만 멀리서 보는 것임에도 그 그림자 역시 저만큼 훤칠했다. 제 쪽으로 다가올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실루엣에서 교복을 발견한 택은 다행이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짓고,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림자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뭐.”

 너무나 당연스레 돌아오는 반말에 택은 지었던 미소를 얼른 집어넣었다. 나도 한 또라이하지만 이놈은 싸가지까지 밥 말아먹었네. 하는 생각에 저와 비슷한 눈높이를 가만 째려보았다. 살짝 찢어진 눈은 뭐, 근데, 어쩌라고. 라고 말하는 것 같아 택은 더 짜증이 나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김정환이라 쓰인 명찰의 주인공은 그런 택이 흥미로운지 시선을 거두지 않고 진득허니 눈을 마주쳤는데, 순간 택은 소름이 돋는 기분에 어깨를 움찔거리며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여기 옥상이 어디에요?”

 “학생 출입금진데, 우리학교 옥상.”

 “아이, 씨… 그럼 그 뭐냐, 소각장은 어디에요?”

 정환은 질문의 의도를 이미 파악한 듯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인터넷에서 몇 번 보았던 이쁘장한 얼굴은 제 눈을 피하며 담배를 피울 만한 곳을 물색하고 있다. 누가 봐도 염색한 게 뻔한 갈색 머리로 시선을 옮기곤 정환은 어이없게도, 초콜릿 같네. 맛있겠어. 라는 생각을 하며 픽 웃었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앞머리 밑의 동그란 두 눈은 웃음소리에 반응하며 검은색 바탕에 저를 비추었다. 살짝 갈라진 코끝, 촉촉해 보이는 예쁜 입술. 정환은 반걸음 앞으로 다가가 목을 쭉 빼며 택의 왼쪽 귓가를 간질였다.

 “여기, 본관 뒤쪽.”

 “으아!”

 담백하고 부드러운 귓속말에 택은 깜짝 놀라 얼른 제 귀를 손으로 감싸며 정환에게서 떨어졌다. 길고 매끈한 손가락으로 헝클어진 택의 앞머리를 다듬어주는 것도 모자라, 교복 마이를 정리해주는 정환은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왼쪽 귀를 감싸던 손으로 제 교복을 정리해주는 다정한 손길을 쳐내고 미친놈. 이라는 말로 호의에 답하는 택의 얼굴은 약간 붉어져있다. 입꼬리가 올라간 것도 모자라 정환은 기분 좋게 눈웃음을 치며 또 보자. 라는 말만 남기고 이사장실로 들어갔다.

 다시 혼자가 된 택은 이사장실의 닫힌 문을 노려봤다. 아직도 끈적한 숨이 귓가에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에 연신 왼쪽 귀를 후비며 저 미친놈은 대체 누구인가 생각하며 그 미친놈이 알려준 소각장에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소각장은 물론 소각장으로 가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은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택은 주머니 안에 있던 담뱃갑을 꺼냈다. 익숙하게 한 개비 꺼내드는 모습이 늘 바른 생활만 할 것 같은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배덕함이라는 것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반대쪽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곤 조용히 담배를 태우며, 피곤함이 몰려오는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저처럼 구름 하나 없는 하늘에 혼자 떠있는 아침 해를 보며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멀리 퍼져가는 뿌연 연기의 끝에, 건물 한쪽에서 저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정환의 시선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담배 냄새를 없애기 위해 딸기맛 막대사탕을 쪽쪽이던 택은 억지로 떠맡게 된 신입생 대표를 준비하기 위해 대강당 한쪽에 있는 대기실에서 익숙한 미친놈을 발견했다. 젠장. 속으로 젠장을 수십 번 외치던 택은, 저를 대기실로 안내한 선생이 다리를 꼬고 식순이 적힌 종이를 읽고 있는 미친놈이 이번년도 학생회 부회장이라 소개하는 것을 듣고는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어이라는 것을 잃어버렸다. 미친놈이 부회장인 미친 학교라니. 택은 다시 한번 이 학교에 오게 된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둘이 악수나 하라며 택을 정환의 앞으로 이끌었지만 정환은 택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전히 종이에 시선이 머물러있다. 식이 곧 시작될 것이었기에 선생은 둘이 자주 보게 될 사이니 낯 좀 그만 가리라는 말만 남기고 대기실을 나섰다. 정환은 기다렸단 듯 식순지를 반으로 접어 무릎 위에 올려두고 택의 왼쪽 손을 낚아채 제 얼굴 앞에 두고 이리저리 구경하더니 곧 코앞에 갖다 댄다. 천천히 손에 남아있는 옅은 담배 냄새를 맡는 정환의 부드러운 입술이 택의 손가락에 닿자 순간적으로 열이 오른 택이 얼른 제 손을 빼낸다.

 “미친놈!”

 “낯가리지 말라는 말씀 못들었어? 생각보다 머리 나쁘네.”

 “너 진짜 또라이냐?”

 “아니? 김정환인데. 그리고 2학년이야. 한 살 차이라 해도 반말 하는 건 별론데.”

 “하!”

 “그리고 담배 피는 것도 별론데.”

 “남 이사 담배를 피든 말든 니가 뭔 상관이야.”

 글로 배운 듯한 어색한 욕지거리가 귀여운지 정환은 아까보다 더 대놓고 웃으며 택을 올려다본다. 정환은 그 어색한 욕을 다시 뱉으려는 택의 왼손을 다시 낚아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고 예상치 못한 행동에 택은 맥없이 끌려갔다. 꼬고 있던 다리 덕에 택의 무릎 사이가 벌어져 순식간에 정환의 위에 올라앉게 되었고, 마치 이를 기다렸단 듯 정환은 나머지 한 손으로 택의 작은 뒤통수를 감쌌다.

 무슨 짓이냐며 말을 하려던 택의 빨간 입이 그대로 정환에게 먹혀버린다. 정환의 입술보다 훨씬 부드럽고 뜨거운 혀가 마치 숨겨둔 보물이라도 찾는 듯 택의 입안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축축하고 이상한 느낌에 오른손에 들린 막대사탕을 꽉 쥐고, 제 왼손을 붙들고 있는 정환의 손에 손톱을 세워 박아 보았지만 딱히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새끼 고양이 같은 반응이 귀여워 혀에 더 힘을 주고 입천장을 쓰다듬어주자 택은 순간적으로 허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기 위해 정환의 목에 오른팔을 둘러 세게 끌어안았다. 방금 전까지 택의 입안에 있던 끈끈한 딸기맛 막대사탕이 제 왼쪽 볼을 눌러대는 것이 영 기분 나빴지만, 가느다란 몸을 바르작거리며 저에게 매달리는 것이 귀여워 정환은 미간을 구기던 것을 멈췄다. 붙잡고 있던 택의 왼손을 놓아주고 등허리를 살살 쓸어내려주자, 교복 위로 느껴지는 그 손길이 너무나 뜨겁고 다정해 결국 택은 나머지 왼쪽 팔도 정환의 목에 걸었다.

 ―신입생 대표 최택, 최택 학생. 학생회 부회장 김정환, 김정환 학생. 이상 두 학생은 지금 즉시 교무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신입생 대표…

 저와 정환의 이름이 스피커에서 크게 울리자 깜짝 놀란 택이 튕겨져 나오듯 정환의 무릎 위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저에게서 떨어진 입술이 아쉬운지 정환은 택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혀로 한번 훑으며 끈적거리는 왼쪽 볼을 교복 소매로 대충 닦아낸다.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터질 것 같은 제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 택을 보던 정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택의 오른손에 들려있던 막대사탕을 빼앗아 제 입에 넣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키스할 때 담배 냄새 나는 거 싫어하거든, 나.”

 사탕을 문 채 입술에 가볍게 뽀뽀를 하고 정환이 대기실을 나가자 택은 그제야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변태 미친놈이라며, 결국 그 미친놈에게 매달렸던 자기는 까맣게 잊고 속으로 정환에게 온갖 욕을 퍼부으며 손등으로 입을 벅벅 문질렀다. 그러다가도 문득 뜨거웠던 키스가 떠올라 검지로 괜히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저를 찾던 교내 방송이 떠올라 급하게 대기실 밖으로 나가며 아무나 붙잡고 교무실이 어딘지 물어보는, 그런 멍청한 택이었다.

 학생 네 명, 그것도 하필 저와 같은 신입생에게 교무실이 어딘지 물어보느라 택은 한참을 헤맨 끝에야 교무실에 도착했다. 미닫이문을 열고 교무실 안을 두리번거리자 한쪽 벽에 기댄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막대사탕을 물고 택을 기다리는 정환의 모습이 보였다. 태연하게 왜 이제 왔느냐는 제스처를 보이며 저가 물고 있던 사탕을 택에게 물리고 잘빠진 손으로 다시 택의 손을 붙잡고 둘을 기다리고 있는 학생회 고문 겸 학생주임에게 다가갔다.

 “어어, 이제 왔니?”

 “죄송합니다. 신입생이라 그런지 길을 좀 헤매더라구요.”

 둘은 자주는 아니겠지만 앞으로 택이 학교 모델 겸 홍보대사 일을 도맡아 하게 될 것 같으니 학생회랑 스케줄 조율을 해야 한다는 얘길 나눴지만, 택은 붙잡힌 손에 땀이 가득해지는 것이 정환에게 들킬까 긴장하여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심장이 왼손에 옮겨 간 것도 아닌데 손바닥을 통해 요동치는 제 맥박이 들킬까봐 침을 꿀꺽 삼키며 정환의 하얗고 고운 손을 몰래 훔쳐본다. 인체 드로잉을 하면서 손 전문 부분 모델도 숱하게 봐왔지만 평범한 고등학생의 손이 더 아름답게 느껴져 넋을 잃고 정환의 손을 눈에 담았다. 분명 학생주임과 눈을 마주하며 대화하고 있는 정환이었지만 너무나도 열렬하게 제 손을 바라보는 택의 시선을 못 느낄 리 없었다. 지켜보는 눈들이 없었다면 당장에 아까처럼 입술을 부비는 것은 물론 교복 밑에 숨겨진 부드럽고 뽀얀 살을 입에 물고, 예쁜 얼굴을 제 밑에서 울게 만들고 싶었다.

 얘기가 끝나고 학생주임의 수고했으니 이만 돌아가 보라는 말도 들리지 않는지 택은 숙인 고개를 들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정환은 잡고 있는 택의 손을 일부러 꽉 쥐었다 놓았다 하는 것을 반복했고, 택은 놀라서 정환과 학생주임을 번갈아 보다 감사합니다. 인사하고는 정환의 손을 뿌리치고 교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졸업식 날, 중학교 1학년 때 잠깐 좋아했던 여자애가 고백을 했을 때도 이렇게 가슴이 일렁인 적이 없었기에 택은 혼란스러웠다. 미친것도 전염이 되는 건가, 자기만한 아니 자기보다 조금 더 큰 남자의 손을 보고 가슴 설레다니. 입 안의 사탕에서 정환의 혀가 느껴져 달아오른 얼굴이 좀처럼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분홍 막대사탕은 복도 바닥에 부딪혀 깨지고 먼지를 가득 묻힌 채 쓸쓸하게 나뒹굴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부모님과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택은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무슨 일 있냐는 엄마의 물음에도 그저 고개를 저을 뿐. 지금 택의 머릿속엔 강당에서 학생회 임원들과 신입생 대표의 악수가 진행 될 때, 제 손에 전화번호가 적힌 작은 종이를 몰래 쥐어주던 정환의 능글맞은 얼굴만이 가득했다.

 담뱃갑이 들어있는 주머니에는 검지 반만 한 작은 쪽지가 택의 손에 의해 열심히 꼬깃 해지고 있다. 혹시 땀에 젖어 번진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슬쩍 꺼내보면 정환처럼 곧고 멋진 글씨체로 적인 11개의 숫자가 번지기는커녕 하얀 종이 위에 선명히 적혀있었다. 첫 키스라는 것 때문에 괜히 마음이 쿵쿵대는 건 아닐까. 나도 모르는 새에 손 페티시가 생겼던 건가. 순식간에 정환의 의해 흔들리는 제 마음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택은 작은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딱히 이거다 하는 이유는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해 외식 전 옷을 갈아입으러 제 방에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그토록 인정하기 싫었던, 온갖 변명으로 꽁꽁 숨겨뒀던 진짜 이유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미쳤네. 나 그 미친놈한테 반한 거네.”

 택은 벗어둔 교복 바지의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찢어버렸다.

 

 자주 보게 될 거란 말이 민망할 정도로 입학 후 한 달이 지나도록 택과 학생회 사이의 교류는 전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택의 반에 찾아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그를 불러낼 수 있는 정환은 그저 택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사실 여유로운 것처럼 보여도 평소 수업 시작 전에 핸드폰을 꼬박꼬박 제출하던 정환은 매 쉬는 시간마다 택에게서 문자나 카톡이 하나라도 오진 않았을까 확인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드디어 김정환이 제대로 미친 거라며 하나같이 그를 안타까워했다.

 강당에서 악수를 하던 순간에도 정환은 택의 우는 얼굴을 떠올리곤 머리에 열이 잔뜩 몰렸었다. 여자친구가 있을 때에도 욕정이란 것을 느껴본 적이 없어 설마 성 기능 장애가 있나 싶었던 작년의 자신을 떠올리고 헛웃음을 쳤다. 사탕 때문인 건지 달콤하고 말랑거렸던 택의 입안과 제 목을 꼭 끌어안고 떨고 있던 잘빠진 팔과 기다란 손가락, 교복 위로 대충 쓸었는데도 얼마나 가느다랗고 예쁜 곡선을 지닌 건지 여실히 느껴져 생각만 해도 아랫배가 뻐근해지는 잘록한 허리. 한 달 내내 불에 덴 것처럼 뜨겁고 질척거리던 키스를 떠올리며 몇 번이나 수음을 하고, 꿈에서 택과 혀를 섞었는지 감히 셀 수도 없었다. 상상 속에서라도 진도를 빼고 싶었지만, 철저한 경험주의자인 정환은 태어나 처음으로 상상력이 부족한 제 자신에게 진심으로 화를 냈었다.

 택이처럼 자기가 왜 처음 본 남자애한테 허우적거리고 있는지 애써 이유를 찾지 않았다. 처음 본 순간 반한 것을 인정했으니까. 새삼 성인군자마냥 연락을 기다리던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처럼 들이대면 되는 일 아니던가? 대강당 대기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면 지금 제 행동이 너무나 모순적이었다.

 직접 만나진 않아도 얼마 후에 있을 S 기업 부속 갤러리 전시회에 택의 그림이 걸릴 예정이라는 걸 이사장의 주책맞은 입방정으로 건너건너 듣게 되었다. 덕분에 택은 미술실을 독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잘 풀리지 않는 건지 야자시간이 끝나 학생들이 전부 집에 돌아갈 때까지 미술실에 불이 켜져 있었단 소리를 몇 번 들어본 적도 있는 것 같았다. 늦게까지 고생하는 택이 딱하기도 했지만, 덕분에 기회가 생겼단 사실에 정환은 올라가는 광대를 주체할 수 없었다.

 

 10시가 되고 야자시간이 끝났다는 종이 울리자 아이들을 일제히 가방을 둘러매고 사자를 피해 도망치는 물소 떼 마냥 순식간에 학교를 빠져나갔다. 정환은 여전히 택에게서 문자 한통 오지 않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복도에 아무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즈음에야 가방을 메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택을 만날 생각에 콧노래도 흥얼거리며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별관 2층의 미술실을 쳐다봤다. 역시 오늘도 있구나. 한쪽 입꼬리를 슥 올리곤 교실 밖으로 나와 순찰을 하고 있는 경비 아저씨께 예의 바르게 인사까지 하며 별관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계단을 오르고 불이 꺼지지 않은 미술실 문 앞에 선 정환은 문에 달린 작은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봤다.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는 이젤과 마주 앉아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택의 옆모습이 보였다. 실눈을 뜨고 좀 더 자세히 관찰하던 정환은 순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커다란 그림을 가만히 노려보던 택은 금방 얼굴을 붉히곤 꾸물거리며 왼손을 제 아랫도리에 슬쩍 올리기 시작했다. 바지 위로 서툴게 제 것을 꽉 쥐는 시늉을 하거나 우는 아이 달래듯 살살 쓸어내리고는 침을 꿀꺽 삼키고 바지 지퍼를 내리는 모습이 여태까지 봐왔던 그 어떤 야동 보다 훨씬 야살스러웠다.

 “하으….”

 “최택.”

 “뭐, 뭐야! 미친놈 너 여기 왜 있어!”

 점점 가쁜 숨을 내쉬는 택을 본 정환이 가만히 참고 있을 리 없었다. 문을 열어젖히고 택의 이름을 부르며 성큼성큼 다가가자 택은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풀어진 바지춤 사이로 보이는 택의 하얀 드로즈를 본 정환의 침 삼키는 소리는 미술실을 다 채울 정도로 크고 선명했다. 묘하게 아래를 향하고 있는 정환의 시선을 느낀 택이 그 끝에 자신의 하반신이 있는 것을 알고 급하게 바지춤을 정리하려 하자, 정환은 짐승마냥 택에게 달려들어 한 달 전보다 진한 키스를 퍼부으며 택의 중심에 손을 올렸다.

 뒷걸음질 치며 정환에게서 도망치려 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택도 곧 정환의 키스에 응하며 열심히 혀를 섞었다. 마주한 두 입술에서는 한 달 전 옅은 담배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질척이는 두 입술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고, 드로즈 위로 제 것을 아래위로 쓸어 올리는 정환의 뜨거운 손길에 택은 적극적으로 허리를 흔들며 쾌감을 느끼려 애썼다. 이런 택이 기특한지 정환은 슬쩍 눈을 떠 눈물이 맺힌 택의 까만 속눈썹을 바라보며 그대로 속옷 안에 제 손을 넣었다.

 “으응!”

 잔뜩 예민한 피부에 직접적인 손길이 닿자 택이 본능적으로 허리를 움찔거려 한 몸인 양 붙어있던 입이 떨어졌다. 정환은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한 발자국 물러나 달콤한 숨을 내쉬는 택을 천천히 훑어봤다. 어디서 물이라도 뿌렸는지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얼굴은 촉촉하게 젖어있었고 제 타액이 가득 묻어있는 입술은 형광등에 의해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택은 정환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온몸으로 느끼며 점점 더 흥분했다. 그러던 와중 정환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이젤에 시선을 옮기고 화들짝 놀라며 그림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순간 택이 도망가는 거라 생각한 정환은 몸을 돌려 택의 어깨를 붙잡았고 택이 교복을 벗어 필사적으로 가리려 하는 그림을, 결국 봐버렸다.

 “야….”

 “봐, 봤어?”

 “이거 나냐?”

 “아, 아니거든! 미친놈이네 진짜! 야, 너 그냥 가!”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진 다리를 꼬고 있는 남자. 오른손에는 A4 용지 한 장이 들려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한 달 전의 정환이었다. 이목구비는 일부러 뿌옇게 그린 택이었지만 지금 미술실 안의 둘은 누구보다 이 남자가 정환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 가운데로 고개를 푹 숙인 택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택을 본 정환은 씩 웃으며 택에게 다가가 뒤에서 끌어안으며 은근슬쩍 다시 아래로 손을 뻗었다.

 “야. 너 내 그림 보면서 딸친거야? 한 달 내내?”

 “흐읏! 미, 쳤나! 아, 손 치워…….”

 “방금까지 허리 흔든 건 너야, 최택.”

 

 

 정사 후 나른함에 취해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든 택은 저를 누르고 있는 무게감에 답답함을 느껴 눈을 떴다. 허리 밑의 모든 부분이 울리는 것을 꾹 참고 상반신을 일으키자 저를 끌어안고 있던 정환의 팔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와이셔츠와 양말만 덜렁 입고 있는 제 몸을 내려다보니 제 뒷부분에서 흘러넘치는 이 얄미운 놈의 정액이 허벅지에도 가득 묻어 있었다. 순간 짜증이 밀려와 마른세수를 하다 얼굴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자신의 정액에 택은 절망감을 느꼈다.

 고개를 흘끗 돌리니 뭐가 그리 좋은지 보조개가 생기도록 실실 웃으며 자는 김정환의 모습을 보자 순간 짜증과 절망이 눈 녹듯 사라졌다. 뻐근한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움츠리고는 커다란 캔버스 안에 그려진 정환을 올려다보며 슬쩍 웃어 보인다.

“하. 다시 그려야지.”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이제는 필요 없어진 자기위로용 그림을 이젤에서 내려 놓는다. 캔버스의 뒷면에는 붉은 제목이 적혀있었다. Nerd. 라고.

 철이 들기 전부터 고양이라면 치를 떨었다.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한, 제일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아버지라는 작자는 항상 손에 초록색 병을 들고 있었다. 그것이 소주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마, 어머니의 머리가 깨진 병에 찢어지고 온 몸은 그 우악스러운 주먹에 퍼렇게 멍이 들어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마냥 짐승처럼 울부짖으셨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 남자가 술에 취해 온갖 욕을 입에 달고 집에 들어올 때면 어머닌 나를 대문 앞에 내보내놓고 오백까지 센 다음에 들어오라 하셨다. 고작 네 살 난 아이가 오백까지 셀 수 있을 리가. 그저 당신의 얼굴이 터지고 멍이 들어 울긋불긋 해지는 것을 보여주기 싫어서, 정환 아빠 제발 그만 해달라고 오열하는 그 소리를 들려주기 싫어서, 괜히 불똥이 튀어 어린 자식이 그 커다란 손에 맞아 잘못될까 두려워, 불지옥보다 더 끔찍한 열 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나가게 한 것일 테지. 어린 나는 어머니 말씀이니 그저 밖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 하나부터 열일곱까지 세는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렇게 숫자를 되뇔 때면 이 동네에서 가장 성질이 고약하기로 유명한, 무식하게 큰 검은 고양이가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나있었다. 녀석은 가만히 웅크려 앉아 나를 노려봤는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노란색의 커다란 두 눈동자는 어린 나를 겁먹게 하기 충분했다. 까만 하늘에서 빛나는 별도 그것만큼 또렷하진 않았다.

 처음엔 마냥 신기했다. 성질 사납기로 소문난 녀석이 몇 분이고 가만히 내 앞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를 따라 밤에 슈퍼에 가서 작은 미쯔 한 봉지를 얻어 콧노래를 부르며 집에 돌아갈 때도, 주인아줌마가 찾아와 어머니 대신 나가 대문을 열 때도 녀석은 우리 집 앞 골목을 지나고 있었지만 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술에 취한 그 자식에게 어머니가 맞는 날. 나 홀로 대문 앞에 앉아 멍청하게 숫자를 세며 어머니가 맞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날. 녀석은 내 앞에 나타나 나를 그저 가만히 쳐다봤다. 어느 순간부터 녀석도 내가 저에게 겁을 먹는 것을 아는 건지 괜히 한 번씩 꼬리를 살랑거렸다. 깜빡이는 불빛에 의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이리 한 번 와 보라고 하는 손짓 같기도 했고, 금방이라도 날 물어버릴 것만 같은 뱀 같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웅얼거리는 소리로 엄마 엄마를 부르며 누군가 나를 도와주길 바랐다. 그마저도 녀석이 우애웅 하고 낮게 우는 소리에 잡아먹혀 그 골목, 그 동네에서 내 간절함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주일에 두어 번 일을 나가는, 어머니 없이 혼자 일어나야 했던 푸르스름한 새벽에 느꼈던 불안감보다 더 큰 것이 어린 나를 뒤덮었고, 끝내 나는 고장 난 수도꼭지마냥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흔히들 말하는 세상에 나 혼자 남은 기분? 그런 흔해빠진 말로는 그 뒤틀리다 못해 구역질나던 기분을 감히 표현할 수 없다. 음식물 쓰레기나 뒤적거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 짐승새끼가, 나는 물론 술에 찌든 개자식과 그 개자식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는 어머니를 비웃는 기분. 지금이라도 그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녀석의 부른 배를 구둣발로 걷어차고, 사지를 절단시키고 싶은 그 엿 같은 기분. 굳이 표현하자면 그렇게 초라해질 바에 죽고 싶었던 것 같다. 네 살인 나는 고작 고양이 한 마리의 울음소리에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고양이보다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던 그 망나니 새끼가 술에 뻗어 코까지 골며 편하게 자는 동안 깨진 술병을 목에 찔러 넣고, 울다 지쳐 방구석에서 새우잠을 자는 어머니의 마르고 울긋불긋한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베개로 입과 코를 푹 막아 편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아직 더러운 피에 흠뻑 젖은 떨리는 손으로 그 고양이를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는 것. 그러면 아무도 비참하지 않고 편해졌을 것이다. 진작 그랬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 아니 버텨가고 있던 걸까.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던 답답한 꼬맹이가 원망스럽다.

 아니지. 살아있어야만 했다. 잘 버텨주었다. 살아있기에 어머니의 비명소리에 마침 순찰을 하던 순경들이 집안에 들어와 그 개자식을 끌고 나와 우리 눈앞에 다시는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인 삶을 살아가며, 봄날 아지랑이처럼 따뜻하고 기분 좋게 아른거리는 어머니의 미소도 볼 수 있었다. 끔찍했던 단칸방에서의 나날엔 절대 볼 수 없었을 꽃을 볼 수 있었으니 죽지 않았던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봄이 오면 어느새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오듯 그 예쁜 아지랑이가 어머니 얼굴에 항상 피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교복을 맞추던 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앞에서 교복을 한번 입어보고는 바로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하여 어머니 얼굴에 서리가 내리다 못해 그 고운 꽃밭을 파랗게 질리게 만들었었다. 곧 뻔하디 뻔한 실랑이가 오갔던 것 같다. 없는 살림에 짐이 되기 싫다. 자식을 짐으로 여기는 부모가 어딨느냐. 대학에 간들 지금이랑 뭐가 달라지겠느냐. 나는 네가 남들처럼 떳떳하게 살았으면 한다. 나는 지금도 떳떳하다. 입이 마르도록 서로 침을 튀어가며 설전을 벌였고, 그날 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몸소 경험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영광은 허울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시작한 공사판 일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힘들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는 날 보는 어머니를 걱정케 만들었다. 내 어린 아집의 결과였기에 함부로 힘든 내색을 할 수도, 어머니를 위로할 수도 없었다. 그저 훌쩍 자란 몸으로 더 좁아진 단칸방에서 주말 내내 녹초가 된 몸을 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여느 날과 크게 다를 것 없던 스무 살의 칠월. 형식상 뚫려있는 작은 창에 제대로 바람이 들어올 리 없었고, 선풍기는 더운 바람만 내뿜으며 고갯짓을 하던 그런 여름날. 끈적이는 누런 장판 위에 달라붙은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작년 여름엔 어땠더라. 그땐 이렇게 안 더웠던 거 같은데. 뭐하고 있었지. 라는 잡생각으로 머리를 채우다 보니 불현듯 유달리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차갑던 동네 책방이 떠올랐다. 인심 좋은 주인 할아버지 덕에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책 냄새를 맡으며 하루를 온전히 책에 파묻혀 보낼 수 있던 작지만 너르던 그곳. 머리에 떠오름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섰다. 뜨거운 햇볕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도 잊은 채, 아무도 없이 중장비만 덩그러니 서있는 공사현장을 지나 좁은 골목길의 끝자락, 대로변과 마주하고 있는 책방으로 달려갔다.

 책방에 다다르자 열려 있는 문을 통해 쿰쿰한 종이 냄새와 한기가 내 뺨을 스쳐 지나갔고, 이마에 맺힌 땀을 손바닥으로 대강 쓸어내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기억은 역시나 하나도 날조되지 않았었다. 한발 한발 안으로 들어갈수록 뼈에 사무칠 정도로 한기가 맴도는 강한 에어컨 바람에 잠시나마 긴팔을 입고 나왔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했었던 것 같다. 3년 동안 내 지정석이나 다름없던 참고서 코너 바로 옆의 구석자리. 학교 앞 서점에서 보다 많고 다양한 문제집과 참고서를 취급하고 있던 터라, 내 중고등학생 시절 6년을 통틀어 그 책방의 참고서 코너 진열이 바뀌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스무 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대로인 책장과 비어있는 구석자리. 지난 여름날처럼 아무 책이나 뽑아 들고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분명 얼음장 같은 돌바닥 때문에 정수리까지 냉기가 차오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깥의 열기가 훅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 이제 막 펼친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이 흐르는 그런 열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온기에 가까웠다. 분명 봄은 훌쩍 떠나버린 지 오래인데, 어째서인지 어머니 얼굴에 피어나던 아지랑이보다 따뜻하고 익숙한 꽃향기가 느껴졌다. 그해 봄, 흙은커녕 모래 한 줌도 없는 먼지 가득한 공사장 시멘트 바닥을 뚫고 나왔던, 청초하다 못해 눈이 부시던 꽃잎 끝에 보랏빛 물이 들어있던 하얀 꽃. 그 향기였다.

 열일곱의 자운영, 너는 그렇게 불쑥, 메마른 내 스무 살 심장을 꽃향기로 가득 메우고 검은 때가 낀 차가운 나를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경로 안내를 종료합니다.

 고덕 주공 3단지. 수많은 칙칙한 회색빛 아파트 사이에 유달리 위화감이 드는, 흔히들 말하는 유럽풍의 작은 카페 앞에 흰색 SUV가 멈춰 섰다. 차의 시동은 꺼졌지만 운전석의 문은 도통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흠집 하나 없이 깔끔하고 차분해 보이는 차와는 달리, 운전석에 앉아있는 남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얇은 왼 손목에 찬 은색 손목시계가 마치 수갑이라도 되는 것처럼 핸들에 올려져 있던 양손이 아래로 맥없이 곤두박질친다. 가을이라고 말할 새도 없이 일찍이도 찾아온 겨울바람이 엔진으로 뜨거워진 보닛을 완전히 식히고 나서야 운전석의 문이 열린다. 어렵게 차에서 내려 허리를 숙이곤 사이드 미러를 보며 베이지색 코트의 깃을 세웠다, 접었다를 반복하던 남자는 결국 코트 깃을 세우기로 하고, 잘 정돈된 머리를 괜히 한 번 넘기고는 크게 숨을 들이켠다. 오른손으로 주먹을 만들고 가슴께를 툭툭 소리가 나도록 두 번 치고는, 적장의 목을 베러 가는 장군처럼 비장한 표정을 짓고 카페로 향한다.

 작은 개인 카페 안은 무슨 행사라도 있는 건지, 몇 개 안되는 테이블이 한쪽에 몰려있었고 그 뒤편 벽에는 여러 장의 A4용지가 일렬로 붙어있다. 김정환 작가와 함께하는 꽃. 문을 연 남자는 저를 반기는 열하나의 글자들을 보고선 방금 전까지 숨 막힐 정도로 긴장하던 것을 거두고, 눈에 불을 켜고서 누군가를 찾는 듯 연신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다급한 시선의 끝에는 턱을 괸 채 카운터에 비스듬히 기대어 정환을 보며 어깨를 으쓱이는 동룡이 있었다. 정환은 벽과 동룡을 한 번씩 번갈아 보고는 머리가 아픈 듯 인상을 구기며 미간을 쓸어내린다. 방금 오븐에서 나온 쿠키들을 단번에 식힐 기세로 차갑고 낮은 한숨을 토하는 정환과는 달리 동룡은 입꼬리까지 샐쭉이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의 속을 있는 대로 긁기 시작한다.

 “우리 소녀감성 개정팔 작가님! 팬들과의 첫 만남인데 얼굴이 왜 이리 어두우신가요! 좀 웃어야 하는 거 아니니!”

 “너 이, 아오…….”

 “새 책이 나왔어도, 굳이 굳이 이렇게 데뷔작으로 낭독회를 갖자고 하는 어여쁜 팬들의 마음! 너무 모르는 척 하는 거 아니니? 좀 해맑게 있을 순 없겠니? ……세상에 상갓집 온 거니? 오늘 양복 왜 그러니. 차라리 츄리닝을 입지 그랬니 친구야. 너 절대 코트 그거 벗지 마라.”

 동룡이 제 할 말을 맺음과 동시에 정환은 곧장 그에게 달려가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순간 턱을 괴고 있던 팔의 팔꿈치가 삐끗하고 미끄러져 앞으로 고꾸라질 뻔 하여 안경이 벗겨졌지만, 꽤나 자주 있는 일인 듯 동룡은 태연하게 떨어진 안경을 주워들고 맞은 머리를 긁적인다. 작가 인생에서는 물론 생애 처음으로 열린 팬미팅 겸 제 책의 낭독회로 잔뜩 얼어붙은 저를 녹여주기 위해 짓궂은 너스레를 떨었다는 것을 알기에 정환은 괜히 구둣발로 동룡의 무릎 밑을 걷어찬다. 은근히 동룡의 말이 신경 쓰이는 듯, 정환은 베이지색 코트 안에 수줍게 숨어있는 아래 위 모두 검은색으로 갖춰 입은 양복을 슬쩍 흘겨본다. 70년대 교복도 이처럼 각이 살아있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묘하게 다른 색이 섞인 그런 어두운 색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검정, 칠흑 같이 검은 양복을 입은 채 표정을 굳히고 있으니 지금 정환의 모습은 누가 봐도 작가님이 아닌 상주님이었다. 돌이켜보면 동룡의 말 중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기에 구겨진 미간에 더 깊은 주름이 생기고 그 안에 짜증이 잔뜩 고였다.

 동룡에게 괜한 화풀이를 마저 하려던 순간,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서 진동을 느낀 정환은 주먹을 쥐던 손에 힘을 빼고 얼른 핸드폰을 집어 든다. 짧은 진동을 연달아 울리는 핸드폰 액정에는 뮤즈라고 저장된 발신자의 이름이 찍혔고, 이 두 글자는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짜증의 불길이 솟구치던 정환의 얼굴을 단번에 누그러뜨렸다.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동룡에서 멀어지기 위해 그렇게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던 낭독회를 알리는 종이가 잔뜩 붙은 벽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잠기지도 않은 목을 헛기침까지 하며 가다듬고 방금까지 동룡에게 당장이라도 욕을 퍼부을 것 같던 날 선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형, 도착 한 거예요?

 “어. 지금 막.”

 ―어때요? 설레죠, 막? 나는 어제부터 두근거려서 아까도 환자분 이름 잘못 부른 거 있죠? 히히.

 “그게 웃을 일이냐.”

 ―그만큼 떨린다는 거죠! 아, 보고 싶다. 어떡하지. 눈꺼풀에 문신이라도 할까요? 오늘 아침에 봤는데 벌써 보고 싶어요. 나 그냥 지금 퇴근하고 바로 상일동으로 갈까요? 응? 김작가니임, 우리 화니혀엉!

 “까분다, 또.”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정환을 무장해제 상태로 만들만큼 낮고 부드러웠지만 묘하게 앳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자연스러운 애교에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손으로 가려보지만, 이미 어깨까지 들썩이고 있는 모습을 숨기기엔 역부족인 것 같다. 담당자인 동룡도 모르는 정환의 꽃이자 뮤즈의 정체는 이 남자였다. 출판사 공모전에서 처음 꽃을 접한 동룡은 밀어내고 싶어도 어느새 붙잡고 있는 주인공의 절절한 사랑 고백 같은, 거절 아닌 거절로 이루어진 문장들을 읽으며, 이 작가 참 여리구나, 맨날 울겠어. 라는 섣부른 판단을 내렸었다. 정환과 처음 대면하던 날,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는 하지만 찢어진 눈에 다소 냉철해 보이는 정환의 외모 덕분에 동룡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었다.

 한국형 스릴러에 최적화된 출판사라는 수식어를 지닌 푸른 밤에서 정환 같은 로맨스 소설 작가에게 먼저 연락을 취한 건, 출판사 설립 이래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스무 살의 정환이 열일곱의 뮤즈를 만난 이후로 매일 하루도 빼먹지 않고 쓰던 일기를 하나의 글로 묶어 공모전에 낸 것이 당시 신입이었던 동룡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여느 팀의 막내들이 하는 일이 그렇듯, 무식하게 공모전에 제출된 모든 글들을 읽느라 지쳐있던 때에 웬열. 로맨스 내는 놈이 있네. 우리 출판사 잘 모르는 놈인가. 하며 한 페이지씩 대충 거들떠보았던 것이 동룡의 몸을 점점 모니터 앞으로 기울이게 만들었다. 누가 봐도 습작 수준의 서툴고 거친 글이었지만, 따분해 죽을 것 같아 하품이나 하던 제 자신도 첫사랑의 간지러움이 발끝부터 목 언저리까지 천천히 타고 올라오는 기분에 화면 구석에 옮겨두었던 출판사 메신저 창을 다급하게 열었다. 앞뒤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김정환 - 꽃’이라는 짧은 단체 메시지를 돌린 후, 동룡은 마른침을 삼키며 남은 글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동네 책방에서 우연히 첫눈에 반하게 되었지만 상대방이랑 마땅한 대화 하나 없이 그저 3년 내내 주말마다 서로의 옆에 앉아 책만 읽는 것이 항상 돌직구를 날리는 제 스타일과는 영 딴판이었지만, 올가미에 걸린 꽃사슴마냥 꼼짝 못할 정도로 저를 사로잡는 것이 어이없었다. 아니, 3년간 지 옆에 앉아서 책 읽는데, 빼박 쌍방 아닌가? 존나 답답하네. 둘 다 연애고자구만. 구운 계란 다섯 개를 물도 없이 연달아 먹은 것 같이 목이 막혀왔지만 동룡은 스크롤을 내리며 정환의 글을 마저 읽었다.

 3년 만에 처음 들어 본 너의 목소리는 네 향기보다 감미로워 나도 모르게 눈시울에 열이 올랐다. 저기요, 라는 세 글자일 뿐인데 사랑의 노래라도 들은 것처럼 가슴이 뛰었고, 이는 마치 경고 같았다. 더 이상 너에게 어떠한 연심도 갖지 말고, 내 이상을 함부로 너에게 덧씌우지 말라고. 감히 너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그 무엇도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음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 일순간 너의 향기로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겨울 바다 한가운데에 빠져버린 것처럼 손끝이 저려와 주먹을 꽉 쥐는 날 보던 너는, 너의 두 깊은 갈색 호수로 나를 천천히 녹여주며 떨리는 내 손을 감싸주었다.

 ―좋아해요. 서로 이름도 모르고, 얘기해 본 적도 없는 거 알아요. 그런데 좋아해요. 계속 좋아해도 돼요? 정말 죄송한데, 욕심 부려도 돼요?

 어느새 스무 살이 된 너는 죽을 때 까지 내 심장 한 가운데 박혀있을 그 아름다운 모습, 열일곱의 싱그러운 너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잊게 만들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다. 꿈에서만 그리던 너의 말이 현실로 다가와 내 귓가를 간질였지만 나는 애써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의 이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일을 쉬는 날이면 너의 학교 근처를 서성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너를 몰래 쫓았고, 파란 명찰에 쓰인 네 하얀 이름을 훔쳐보고는 집에서 수백 번 아니 수천 번도 더 되뇌었던 나다. 너의 이름 두 글자를 입 밖으로 꺼낼 때 마다 죄를 짓는 것 같아 얼굴을 감싸고 한숨만 쉬던, 이런 나를. 언제나 빛이 나는 네가 날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를 감싸고 있는 너의 두 손은 겨우 숨이 붙어있는 것처럼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나는 뿌리칠 수 없었다. 너무나도 비겁하게 너의 시선을 피하기만 할 뿐, 이 작은 책방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당장이라도 나는 너를 처음부터 사랑했노라고 외치고 싶어 입이 달싹였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너는 정말로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기에, 나와 함께하는 순간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때가 절대로 찾아올 것임을 슬플 정도로 잘 알고 있기에. 너 역시 이를 알고 있음에도 나에게 좋아하노라 말했다. 너는 대체 어디까지 내 가슴을 조여 오려고 이러는 것일까. 오래전 그 날, 나는 죽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너에게 이런 고통과도 같은 설렘을 주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잔뜩 열이 오른 내 눈은 메말라 있는데, 붙잡혀있던 두 손이 축축해져왔다. 아, 꽃 같은 네가 울고 있다. 내 첫사랑아, 나의 꽃아. 울지 마라. 제발 울지 마라. 못난 나 때문에 울지 마라.

 

 “촉촉해지는 너의 갈색 두 눈을 끝끝내 나는 모른척하지 못했다. 모질지 못한 나는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이 여리디 여린 너를 끌어안았다. 너는 메마른 내 심장을 뛰게 할 셈인건지 따뜻한 눈물로 내 가슴을 흠뻑 적시고 있다. 내 끝사랑이여, 이것이 부디 너의 마지막 눈물이길 바란다. 그래, 시작하자. 우리 둘이 감히 사랑을 시작해보자, 나의 꽃아.”

 얼마나 많이 읽었던 것인지 표지가 다 닳아버린 얇은 단편집에 실린 자신의 데뷔작, 꽃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 정환의 모습을 열세명의 팬들이 조용히 지켜봤다. 정환과 제일 가까운 테이블에 앉은 두 여자는 훌쩍거리다 결국 눈물이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려 커피 잔 옆에 놓여있던 티슈를 들었다.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동룡도 정환의 글 중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었기에 코밑을 훔치며 가슴이 먹먹한 것을 숨겼다. 만 9년, 햇수로는 10년을 담당자와 작가로써 혹은 친구로서 알고 지내온 어떻게 보면 꽤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작 정환의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 정환의 꽃, 뮤즈의 정체를 모르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라 생각하는 동룡이었다.

 9년 전의 아린 가슴이 새삼 다시 떠올랐는지 정환은 잠시 눈을 감고 감상에 빠진 후, 책을 덮으며 감사하단 말을 전했다. 팬들은 조용히 박수 세례를 보냈고 동룡이 다음 순서를 진행하기 위해 테이블로 다가가 정환이 앉을 자리에 팬들이 각자 질문 하나씩 적어온 열세장의 종이를 올려놓는다. 가게 안은 이미 사람들과 히터의 열기로 후끈해졌지만 베이지색 코트를 벗을 생각이 없는 건지 제일 밑에 달린 단추 두 개를 풀고는 자리에 앉는다.

 앉아있는 순서에 따라, 눈물을 훔치던 두 여자 중 머리가 긴 여자부터 질문을 시작했다. 일주일 전부터 미리 예상을 해왔던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고, 덕분에 정환은 막힘없이 물 흐르듯 답할 수 있었다. 글을 시작하게 된 계기, 작품의 원동력, 이상형 등 평범한 질문들에 정환은 살짝 따분함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기특하게도 정환의 이런 무료함을 알아차려 준 것인지 팬들의 질문이 끝나자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삐딱하게 기대어 있던 동룡이 정말 마지막 질문이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작가님, 베일에 싸인 그 꽃과는 아직도 ing인거 맞으시죠?”

 정환만 바라보던 열세개의 시선이 일제히 동룡에게 꽂힌다. 뭐지, 담당자는 누군지 아나봐. 진짜 작가님 얘기 맞나봐! 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만나시는 건가? 처음 만난 게 스무 살 때라고 쓰여 있었으니까… 대박! 12년 동안?! 정환의 좋은 목소리와 잘생긴 얼굴에 수줍어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질문도 겨우 했던 여자들은 금세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정환이 자기를 죽일 듯 노려보거나 아무도 모르게 테이블 밑으로 허벅지를 꼬집고 제 발을 밟을 거라 예상했던 동룡은, 의외로 얌전하게 가만히 앉아있는 그를 보며 눈썹을 씰룩였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팬들도 수군거리던 것을 멈추었고, 고요의 중심에 앉아있는 정환은 아랑곳 않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형, 흡, 나 오늘…

 “택아, 왜 그래? 울지 말고 천천히 얘기해봐.”

 이제 본과 2학년이 되어 첫 해부 실습을 하게 된 택은, 온갖 약품 냄새가 가득한 실습실에서 분장이라도 한 것처럼 비이상적으로 하얗게 변한 죽은 살을 가르던 메스의 느낌이 아직도 손에 남아있는 것 같아 떨리는 손으로 겨우 정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2년 전 정환에게 고백을 하고 울던 것보다도 처량하고, 처음 배를 맞추던 날 잔뜩 긴장했던 것보다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이제 막 잠들기 시작하던 정환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택이 예쁘고 해맑게 웃으면 정신이 아득해지곤 했지만, 이처럼 울음을 감추지 못할 때엔 이성을 잃을 정도로 제 꽃을 걱정하는 정환이었다. 평소 달래던 것처럼 세상 그 무엇보다도 말랑한 목소리로 택을 쓰다듬어 주었지만 잔뜩 겁에 질린 울음소리는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늦은 밤 택시를 잡아 택이 있는 기숙사로 가는 내내 택아, 괜찮아. 를 반복하며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애를 썼다.

 차창 밖으로 XX대 정문이 보이자마자 정환은 다급히 지갑을 꺼내 계산을 하고 정문과 가장 멀리 있는, XX대 끝자락을 알리는 기숙사 A동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기숙사 현관 앞에 다다르자 전화 너머로 여전히 울고 있는 택에게 밖으로 나오라 말했다. 1분도 지나지 않아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박박 문지르는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기숙사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어깨를 들썩이던 검은 그림자가 정환에게로 달려가 푹 소리가 나도록 세게 안겼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선 정환은 말없이 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찌나 세게 안긴 것인지, 정환의 목덜미에 잘 뻗은 코와 예쁜 입술이 꽉 틀어 막혀 자동차 타이어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조용한 현관에서 구슬프게 울렸다. 눈물로 목덜미는 물론 옷까지 점점 젖어갈수록 가슴이 찢어지던 정환은 어렵게 택을 제게서 떨어뜨리고는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다 자연스레 턱을 붙잡고 조심스레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 작은 얼굴엔 세상 모든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듯했다. 끝이 한껏 내려간 눈썹은 얼마나 무거운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지 도통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퉁퉁 불은 눈꺼풀 사이로 겨우 보이는 갈색 바다는 슬픔의 파도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애초에 골목에 웅크리고 있는 길고양이만 봐도 눈물이 차오르던 택이 의대 생활을 잘 견뎌 낼 리 없었다. 그저 착한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 택의 수많은 삶의 낙 중 하나였기에 부모님 말씀에 따라 의대에 들어와 이렇게 고생하는 모습이 달가울 리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만두라고, 니 성격에 의사는 무슨. 헛짓거리 하지 말라는 모진 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손끝으로 살짝 건드려도 바스러질 것 같은 택을 보며 정환은 말을 삼켰다.

 “나, 정말 잘 하고 싶은데.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힘들어요. 정말 좋은 사람 되고 싶어서, 그래서 시작한 건데. 지금이라도 그만 둘까요? 나중에 실수하면 어떡해요? 형, 나 너무 무서워요. 그냥 아무도 없는데서 이런 걱정 없이 형이랑 둘만 있고 싶어. 나 그냥 나쁜 사람 할까요? 나 그래도 돼요?”

 마음이 약해질 때면 언제나 정환에게 허락을 구하듯 그동안 꽁꽁 감춰오던 바람을 말하는 택이었다. 얼마나 속앓이를 한 것인지, 택을 본 지 5년이 지난 정환도 도망가잔 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제 속을 비추고는 어린 아이가 엄마를 찾듯 조심스럽게 한발자국을 떼곤 정환의 어깨에 이마를 부볐다. 그 고갯짓이 너무나도 애처로워 정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불안감으로 축 처진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렇게 힘든데 기댈 곳이 저 뿐이라는 사실에 행복함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택아.”

 “안된다고 할 거잖아요. 나 때문에 니 인생 망치는 거 싫다면서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할 거잖아요.”

 “……. 잘 알면서 왜 그랬어. 왜 그런 말해서 힘들어하고 있어.”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그냥 한 번만. 딱 한 번만. 나 데리고 도망가 준다고 하면 안돼요?”

 왜인지 정환이 떠나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택은 다급하게 정환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사실 늘 그랬다. 항상 자신이 못났다며, 택을 사랑하면서도 언젠간 놓아줄 것만 같은 얼굴을 할 때마다 택은 지금처럼 불안감이 제 세상을 뒤덮어버려 정환을 미친 듯 찾았다. 그 여린 몸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온 것인지 놀라울 정도였다. 정환은 허리가 으스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의 마음이 훤히 보이기에 걱정 마, 형 어디 안가. 너랑 평생 있을 거야. 라는 말을 귓가에 속삭였다. 하루 종일 심란했던 택의 마음이 정환의 이 말 한마디에 눈 녹듯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이 착하고 어린 연인을 위해서라도 글을 계속 써야 한다고, 얼른 당당히 자신에게 의지하고 기대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노라 생각하는, 등단 3년차, 스물여섯의 정환이었다.

 

 “제 꽃은 지금도 빛나고 있습니다. 그냥 이렇게만 알아주세요. 다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뭐라고, 참……. 앞으로 더 좋은 글로 만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천천히 눈을 뜬 정환이 옅게 웃으며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낭독회를 마쳤다. 카페 입구에 준비해 놓은 꽃의 특별 제본판과 정환의 사인이 담긴 작은 액자를 챙기고는 하나둘 카페를 나간다. 몇몇은 카페가 마음에 들었는지 각자 음료를 하나씩 더 주문하고 반대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정환은 그제야 제 코트의 단추를 다 풀고는 피곤한지 고개를 숙이며 좌우로 목을 한 번씩 쭉 빼며 우드득 소리를 낸다. 동룡은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손을 뻗어 정환의 등을 두어 번 쳤다. 역시나 동룡의 마지막 질문이 거슬렸는지 제 등을 친 손을 얼른 낚아채 꺾는 시늉을 하며 뒤늦은 복수를 한다. 괜히 아픈 척을 하며 미안합니다, 김작가님! 아이고 제가 감히 뮤즈를 알아내려고 무례한 질문을 퍼부었네요! 라고 오버하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팬들이 둘을 바라본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꺾고 있던 동룡의 팔을 놓고는 코트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을 꺼낸다. 낭독회와 질문 시간이 진행되는 동안 뮤즈에게 몇 통의 문자가 와있었다.

[오늘 완전 칼퇴! 지금 병원에서 출발하는 중이에요!]

[이거 어때요? 맛있어 보여요?]

[와인 어때요? 레드와인으로 하나 사갈게요]

[집 앞. 대박 큰 고양이 발견! ^^]

[보고 싶은 형은 안 오고, 대신 고양이가 찾아왔네. 분발해주세요 김작가님]

[끝났어요? 빨리 와요.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메시지 중간 중간에 병원 주차장, 연어 샐러드, 레드 와인, 어릴 적 소름 끼치도록 죽이고 싶던 고양이와 너무나도 닮은 덩치 큰 검은 고양이 그리고 뮤즈의 사진이 섞여 있었다. 오른손으로 꽃받침을 하고 활짝 웃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정환은 동룡이 옆에 있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광대를 들썩인다. 야, 뭔데 그렇게 좋아 죽냐. 동룡이 슬쩍 고개를 들이밀고 핸드폰 화면을 보려 하자 황급히 잠금 버튼을 누르고 아무것도 아니라 하는 정환의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오늘 낭독회는 택의 권유와 설득이 없었다면 평생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스무 살의 택이 스물셋 정환에게 고백한 그날, 정환은 말로써 대답하는 대신 택의 손을 잡아 제 집으로 이끌었다. 침묵이 곧 거절이라 생각해 절망에 빠져있던 택은 갑작스레 제 손을 붙잡은 것도 모자라 밖으로 끌고 나가는 정환 때문에 슬픈 것도 잊은 채 어리둥절했다. 초록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낡은 철제 대문 앞에 택을 세우고는 잠깐 기다리라 하고 집 안에 쏙 들어갔다. 그 모습에 괜히 불안해진, 아직 어린 택은 눈물도 닦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었다. 혹시 기분 나빠서 나 때리려고 그러나? 어떡하지. 괜히 말했어. 근데 어떡해, 너무 좋은 걸. 첫눈에 반했는데 어떡하겠어. 다신 못 보겠지? 사진이라도 한 장 몰래 찍어둘걸. 작은 머리로 오만가지 상상을 하며 고개를 푹 숙인 택은 다시금 열리는 대문 소리에 깜짝 놀라며 한걸음 물러나 얼굴을 들었다. 눈앞엔 붉어진 얼굴로 목덜미 긁적이는 정환이 있었고, 그의 오른손에는 공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 큰 눈만 깜빡이는 택을 보며 한숨을 쉰 정환은, 얼마나 매만졌는지 표지가 다 닳아버린 그 공책의 첫 장을 펴고는 택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20XX년, 7월 XX일

 오늘 동네 책방에서 나의 꽃을 만났다. 까맣고 동그란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칼 사이에서 연보라색 자운영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대충 보니 이 근처에 사는 고등학생 같았다. 몰래 훔쳐본 얼굴엔 갈색 호수 두 개가 박혀있었다. 그 눈에 빠져 죽어도 좋으니 내 모습이 담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찾는 문제집이 없던 건지 새빨간 입술을 죽 내밀었다. 병아리 같은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괜히 귀 끝이 간질간질했다.

 예쁜 네 얼굴이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어왔다.

 20XX년, 7월 XX일

 일하는 내내 어제 본 꽃이 눈에 아른거렸다. 네 생각에 정신이 없어 처음으로 소장님에게 혼났다. 곰같이 큰 소리로 화를 내는 소장님을 보니 문득 너의 목소리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꿀처럼 달콤하고 봄처럼 따스하겠지. 너의 하얀 얼굴에서 보랏빛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오늘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이번 주말에도 널 볼 수 있을까.

 20XX년, 7월 XX일

 오늘은 잠시 학교 앞을 지날 일이 생겼었다. 내가 다녔던 이 학교 안 어딘가에 네가 앉아서 수업을 듣고 있진 않을까. 미친 척하고 은사님을 뵈러 왔다며, 교무실로 들어가 출석부를 뒤져 너를 찾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았다. 너에게 반한 미친 나는 한 번의 해프닝으로 끝나겠지만, 혹시나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세계에 사는 너에게 해가 될까봐. 그게 가장 두려웠다. 내 꽃아. 너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다.

 “이거…….”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택은 얼굴을 붉히며 겨우 입을 열었지만, 정환은 공책으로 택의 시선을 가로막으며 제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리기 바빴다. 기대가 실망으로 변할까 두려운 택이 말을 잇지 못하자 정환은 한 손으로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택이 제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푹 숙여 공책을 제 앞으로 가져와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찾던 부분이 나오자 다시 택의 얼굴에 들이밀고는 터질 것 같은 심장소리가 들키지 않도록 침착한 목소리로 읽어. 라고 말했다.

 20XX년 9월 XX일

 오랜만에 쉬는 평일이었다. 집에 누워서 피곤한 몸을 다독여도 모자랄 판에 나는 대체 뭐에 홀린 건지 너의 학교로 갔다. 괜히 정문 앞을 서성이다가 안에 벤치에 앉아있기도 해보고. 점심시간에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 틈에 혹시 네가 있진 않을까 목을 쭉 빼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주말마다 너의 책 읽는 옆모습만 봐야 하는 운명인가 싶어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너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 돌리던 발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니 매점에서 파는 주스 중 가장 먹을 만했던 유리병에 담긴 오렌지 주스를 들고 경비 아저씨께 가는 네 모습이 보였다. 꽃아, 너는 어쩜 그렇게 곰살 맞은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까. 예쁘게 웃는 너의 왼쪽 가슴 위에 파란 명찰이 보였다. 하얀 두 글자. 최 택. 너의 이름은 최 택. 당장이라도 불러 보고픈 마음을 꾹 참고 집으로 돌아와 빈 방에 서서 너의 이름을 한참 불렀다.

 꽃아, 너의 이름 두 글자는 내 가슴에 새겨져 평생 지워지지 않을 거다. 네 하얀 이름이 목을 울릴 때마다 눈물이 난다. 택아, 내 이름은 정환이다. 김 정환.

 20XX년 9월 XX일

 택아. 오늘은 일이 힘들어서 잠깐 쉬는 동안 네 이름을 몰래 불러 봤다. 터질 것 같던 발의 열기가 거짓말같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괜히 힘이 나서 평소보다 두 배는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다. 문득 너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고 있는 건지, 친구들과는 잘 지내고 있는 건지. 마치 엄마라도 된 듯 네 걱정을 하는 내가 우스워 웃음이 났다. 너는 내 존재를 모를 텐데. 그저 주말마다 옆에서 같이 책을 읽는 형이 있었다고 생각해주기만 해도 나는 기뻐서 날아갈 거야. 택아, 너는 오늘도 싱그럽겠지?

 자꾸 욕심이 난다. 점심시간마다 너의 학교에 찾아가 매일 너의 얼굴을 보고 싶다. 주말이 일주일 내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일기를 쓰는 지금도 네 향기가 내 머릿속을 뛰어놀고 있는데, 너는 알고 있을까? 평생 몰라도 좋으니 너는 거기에 피어만 있어주어라, 나의 꽃 택아.

자기답지 않게 닭살스러운 말투가 가득한 3년 치 일기가 새삼 부끄럽게 느껴졌지만, 첫눈에 반한 것이니 어쩔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정환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택은 가슴이 벅차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만 계속해서 흘리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정, 흡. 정환. 김… 정환.”

 고운 입이 손에 가로막혀 발음이 잔뜩 뭉개졌지만, 정환은 울면서 제 이름을 쉼 없이 불러주는 택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렸다. 어떤 얼굴로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인지, 그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해 정환은 들고 있던 공책을 내렸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울고 있는 택이 새벽이슬을 머금은 꽃 같아 넋을 잃고 바라봤다. 저와 눈을 마주하는 정환의 따뜻함에 택은 한 손으로는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정환의 공책을 집어 들었다. 이미 이곳저곳 벗겨진 공책의 표지임이 분명한데 유달리 반짝거리는 부분이 있었다. 벗겨지지 말라고 투명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여 놓은 부분, 그 부분엔 단 두 글자. 최택. 정환의 꽃이 적혀있었다. 택은 결국 정환의 이름을 부르던 것을 멈추고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 울며 두 손으로 공책을 가슴팍 위에 두고 꼭 끌어안았다. 정환은 뒤늦게 택의 고백에 좋아한다 대답하고 울고 있는 꽃을 따스히 감싸 안았다.

 각자 일방통행이라 생각했던 관계가 쌍방통행임을 알게 된 후부터, 택은 정환에게 거침없이 제 마음을 표현했다. 그럴 때마다 정환은 까분다며 저에게 들이미는 작은 얼굴을 살짝 밀어내었고, 이렇게 무뚝뚝한 형한테 어떻게 그런 예쁜 글이 나왔을까요오. 하며 되받아치는 택이었다. 그러던 와중 택은 학교에 붙어있던 푸른 밤의 공모전 관련 벽보를 떼어와 정환에게 건넸다. 정환의 두 손을 꼭 쥐어 들고는 이제 요 예쁜 손 아픈 일 그만하면 안 돼요? 공사장에서 생긴 작은 상처들에 입을 맞추며 말간 얼굴로 공모전에 글을 보내보라는 부탁을 했다. 저 웃는 얼굴이면 껌뻑 죽는 정환이란 걸 모를 리 없는 택이었기에 일부러 애교도 더 부렸었다.

 택을 만나 연인이 되기까지의 시간 동안 매일 적었던 일기들을 소설 형식으로 묶어 공모전에 제출했고, 그 이후엔 택이 바랐던 것처럼 정환은 마치 꿈 인양 단번에 등단하게 되었다. 푸른 밤 최초의 로맨스 소설 작가로 반짝 떴다가 질 것이라는 다른 소속 작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정환은 꾸준한 독자층을 유지했다. 3년간 제대로 된 대화 한번 없이 택을 그리며 일기를 써왔던 것처럼 여전히 찬란한 제 꽃을 생각하며 여태까지 총 다섯 권의 책을 써내려왔다. 택을 향한 마음이 변치 않는 것처럼 정환의 글 역시 ‘너’를 향한 무조건적인 순애보와 어딘가 온전하지 못한 불안감이 감돌아 큰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항상 글을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연히 제 글을 사랑해주는 팬들에게 고맙지만, 감히 상상할 수도 없던 작가라는 호칭을 갖게 해준 택에게 더 큰 고마움을 느꼈다. 정환은 옆에 앉아있는 동룡에게 너도 수고했어. 라는 말을 건네고 카운터로 향한다. 택이 좋아할 만한 초콜릿 무스를 한조각도 아닌 무려 홀 케이크로 주문하고는, 입가 여기저기에 초콜릿을 묻히며 아이처럼 좋아할 모습이 눈에 선해 미소를 머금었다. 곧 하얀 케이크 상자를 건네받고는 바로 차로 향했다.

 조수석의 문을 열고 무슨 공주님이라도 모시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의자에 앉히고, 저는 운적석으로 돌아가 차에 오르며 뭐라고 답장을 해야 좋아할까나. 라는 생각을 하며 잔뜩 신이 난 표정을 짓는다. 택의 메시지를 복습한다는 핑계로 꽃받침을 한 채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며 흐뭇해하던 정환의 귀에 익숙한 두 여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정환이 꽃의 마지막 챕터를 읽는 동안 맨 앞자리에서 누구보다 공감하며 눈물을 보였던 바로 그 두 여자였다. 두껍게 선팅 된 차 유리에 서로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는 머리 모양을 다듬으며 아까보다는 다소 앙칼진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간다.

 근데 확실히 김정환 작가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잘생겼더라. 봐봐 내가 괜히 오자고 한 게 아니라니깐. 야, 근데 솔직히 책이 죄다 거기서 거기 같지 않냐? 내말이. 다 데뷔작이랑 비슷해서 솔직히 이게 어느 책에서 나왔던 내용인지 헷갈릴 때도 많아, 나는. 그게 개성이지 뭐. 야, 개성은 무슨. 그냥 발전이 없는 거야. 솔직히 그 뮤즈라고 하는 자기 여친 없었어봐, 꽃 같은 게 나왔겠어? 아니지, 뮤즈 있다고 다 그런 글 쓰겠냐. 다 김작가 실력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지. 누가 실력이 없댔냐, 그냥 좀, 뭐랄까, 진부하단거지. 아 그건 나도 격공. 여친도 참 대단하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영감을 준다는 거잖아. 에이, 여친이 대단한 게 아니라 김작가 실력이 대단한 거라니까. 헐, 야 그거 어디꺼야? 발색 개쩐다, 진짜.

 머리를 다듬고 립스틱을 바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여자는 정환의 머릿속을 새까맣게 태워버렸다. 눈물을 글썽이는 반응에 잠깐이나마 감동을 받았고, 평범한 질문일지라도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어 조금이나마 기뻤던 것 역시 사실이다. 지금 정환의 온몸을 스멀스멀 덮고 있는 검고 진득한 이 감정은 단순한 배신감이 아니다. 나의 꽃이, 아무것도 모르는 저 여자들이 감히 내 뮤즈를 언급한 것도 모자라 욕보이려 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 저를 삼키는 와중에 정환은 무언가 가슴 한구석에서 기분 나쁘게 꼼지락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인정하기 싫지만 어릴 적 부터 뱀처럼 똬리를 틀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그것. 검은 뱀은 은근슬쩍 칭칭 감고 있던 몸을 풀고 순식간에 꼬리를 흔들며 이를 세우곤 정환의 가슴 한 쪽에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바늘구멍이나 다름없는 이 작은 구멍으로 어둡고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와 정환의 혈관 하나하나를 전부 채워버렸고, 살이 바짝 오른 사슴을 본 굶주린 호랑이 같은 눈빛을 하며 왼 손목의 시계를 노려봤다.

 “씨발, 진짜…….”

 화면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택을 본 정환은 표정을 더욱 굳히며 핸드폰을 조수석 창문으로 집어던졌다. 기분 나쁜 충격음이 들렸지만 두꺼운 유리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지금 정환은 다섯 살의 그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다 못해 이 좆같은 상황을 만들어버린 그 모든 것에 대해 화가 난 어린아이.

 

 ―우애웅

 집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온통 희미한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그 고양이 새끼의 울음소리만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터덜거리는 엔진 소리마저 녀석의 그르렁거리는 소리처럼 느껴져 재빨리 시동을 끄고 차 키를 손에 꽉 쥐었다.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쥐면 고통에 취해 잠시나 생각을 멈출 수 있을까 싶었지만 헛된 기대였다. 왼손 위에 자리 잡은 시계를 보니 네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택아, 이 더러운 나를 어서 구해줘. 이 못난 나를 어서 너의 색으로, 너의 향기로 물들여줘 택아.

 조수석의 케이크를 잊지 않고 챙겨, 거의 인테리어용이나 다름없는 낮은 나무 울타리 대문을 열고 현관으로 향했다. 이상하다. 왜 열려있지? 또 깜빡하고 안 닫았나?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신발을 벗고 부엌으로 가는 내내 네 이름을 불러보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불안감에 휩싸여 일단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거실로 향했다. 켜진 TV 화면엔 매일 아침 네가 날씨를 체크하고, 시간 날 때마다 이슈를 확인하는 뉴스 채널의 광고 방송이 나오고 있다. 테이블 위엔 내 취향을 잘 아는 네가 골라온 레드 와인, 보랏빛 자운영으로 가득한 꽃다발, 그리고 정사각형의 작은 검은색 벨벳 상자가 놓여있다.

 “우애웅-”

 작은 벨벳 상자에 손을 뻗는 순간. 들릴 리 없는, 들려서는 안 되는 그 녀석의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천천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까 택이가 보내준 사진에 담겨있던 그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팔자 좋게 소파 위에서 기지개를 켜는 듯한 자세로 자고 있다. 감히 우리 집에 더럽고 추잡스러운 니녀석이. 택이가 깜빡하고 문을 못 닫은 틈에 들어왔구나. 알고 있다. 20년도 더 지난, 그날 봤던 그 녀석이 아니란 걸. 너는 다른 고양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녀석보다 크고 뻔뻔하잖아? 그러니 니가 잘못한 거야. 이 짐승새끼.

 발뒤꿈치로 녀석의 배를 세게 내리찍자 노란 눈을 번쩍 뜨며 앙칼진 울음소리를 낸다. 겨우 이 정도로? 내 어린 시절을 그렇게 좆같은 기억으로 만든 주제에.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벌써 울면 안 되지. 네 발을 버둥거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니녀석에게 보란 듯이 웃어 보였다. 아무리 짐승새끼라도 사람 표정 정도는 읽을 수 있나? 어디서 감히 컁! 하고 소릴 질러. 재수 없게. 이번엔 다리를 들어 녀석의 배를 내장이 터져라 더 세게 짓누른다. 녀석이 숨을 쉴 때마다 꿀렁이는 것이 느껴지는데, 기분이 썩 나쁘진 않다. 아니, 오히려 좋은 것 같다.

 고통스러워하며 앞발로 내 다리를 밀쳐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장면을 내려다보았다. 정복욕이라는 것이 온몸 휘감는 쾌감에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 같다. 배를 몇 번 더 발로 차니 비온 다음 날 지렁이처럼 온몸을 배배 꼰다.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묘하게 촉촉해진 것 같다. 고양이도 우나? 알게 뭐야. 감히 상처받았다는 듯한 눈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는 곧장 녀석의 얼굴에 처박아 버렸다. 우둑 하는 소리가 났고, 녀석의 얼굴은 코에서 흐르는 피로 범벅이 되었다. 코가 심하게 깨진 건지 기침을 하는데 입에서 피가 튀어나온다. 보기 좋다.

 아. 택이가 제일 좋아하는 개나리색 쿠션에 녀석의 피가 튀었다. 가지가지 하네, 진짜. 등을 돌려 테이블 위에 있는 와인병을 들었다. 죽으려나? 쉽게 죽는 건 싫은데. 망설임 없이 꽤 무거운 와인병으로 녀석의 머리를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병이 깨지진 않았다. 아쉽네. 깨질 줄 알았는데. 덥수룩한 검은 털 때문에 잘 몰랐는데, 와인병에 미끈한 검붉은 피가 묻어있는 걸 보니 머리가 깨진 것 같다. 얼핏 숨은 쉰다. 다행이다. 이제 막 재밌어지고 있었는데.

 너무 흥분했나. 목이 탄다. 부엌으로 가 와인 오프너를 찾았다. 싱크대 옆 선반에 있었던 것 같은데. 이건 택이가 잘, 맞다 택이. 우리 택이 또 문 닫는 거 깜빡하고 장 보러 갔구나. 매번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도. 졸업하면서 혼자 살겠다 했을 때, 이럴 줄 알고 같이 살자 한 거였는데. 다시 생각해도 잘한 결정인 것 같다. 아, 전자레인지 위 선반에 있었구나. 돌아오려면 좀 걸릴 것 같으니 먼저 한잔하고 있어야지. 삐져서 또 부루퉁하게 병아리처럼 입 내밀겠지? 아, 귀엽다, 귀여워 최택. 케이크 사 왔으니 봐 줘라.

 와인 오프너 옆에 있던 와인잔을 하나 챙겨와 코에 피떡칠을 한 녀석을 보며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택이가 알면 화내겠지? 택이가 사 온 와인은 떫은 맛이 강하고 약간 시큼한 게 내 입에 딱 맞았다. 자긴 디저트 와인 아니면 입도 못 대면서 맨날 나 맞춰준다고 레드 와인만 사 오지. 돌아오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오늘 낭독회에서 나 좀 멋있었다고 할까? 아니야, 그러면 눈에 불을 켜고 다신 양복 입거나 여자들한테 웃어주지 말라고 하겠지. 아, 그 여자들. 그 미친년들. 이 고양이 새끼보다 못한 것들이 감히 널 욕보일 뻔했단 걸 알면 어떤 반응일까. 나한테 괜히 화내지 말라고 하겠지. 그래, 이 얘긴 하지 말아야지.

 기절한 와중에 녀석의 발이 움찔거린다. 굼벵이도 아닌 것이 꿈틀대는 게 퍽 이상해 보인다. 이상해? 아니다, 그냥 기분이 나쁜 거야. 그때도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하고 싶었지? 아. 맞다.

 다시 부엌으로 가 전자레인지 밑의 서랍장을 열었다. 첫 번째 칸은 아니고. 두 번째도 아니. 아 세 번째 칸이었구나. 택이가 그렇게 사달라고 졸랐던 쌍둥이칼이었나.. 손잡이와 이어진 일체형 칼과 부엌 가위 네 개가 보인다. 그중에 가장 날이 선 것을 골라 들었다. 이정도면 무리 없겠지? 여전히 소파 위에 널브러진 녀석은 기절했다기보단,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세상 편하게 낮잠 자고 있는 것 같아 다시 짜증이 치민다. 발찌인가. 보통 목걸이 채우지 않나? 주인이라도 있는 건가. 버려진 거겠지. 감히 너 따위가 돌아갈 집이 있을 리가 없다. 화를 주체할 수 없어 입술을 꽉 깨무니 비린 피 맛이 감돈다. 젠장.

 오른발을 누르니 숨겨져 있던 발톱이 마치 기다렸단 듯 나를 냉큼 노린다. 날이 잘 선 부엌 가위로 발가락을 하나 둘, 중간 중간 뼈마디에 걸려 단번에 잘리지 않는 것도 있었다. 젤리 같던 발이 점점 흉측하게 변해가자 거실에 낮은 천둥소리가 울린다. 축 처져있던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녀석은 필사적으로 고갤 들어 내 손을 깨물기 시작한다. 이가 박히는 생경한 느낌에 짜증이 솟구친다. 택이가 선물한 하얀 양복 와이셔츠가 내 피로 검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눈밭에 매화꽃이 하나 둘 떨어지는 것 같아 잠시 넋을 잃었다. 버둥거리는 몸을 무릎에 힘을 실어 눌러버리고, 아직 멀쩡한 검은 두 뒷발로 시선을 옮겼다. 고새 한번 해봤다고 뒷발은 앞발보다 일이 수월했다. 뿌득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금방이라도 죽을 듯한 얼굴이 보인다. 어디서 난 소리지? 아. 소파에 떨어진 부러진 이빨을 보고 나서야, 고통에 겨운 울음소리를 참느라 이를 악 물어 니놈의 그 잘난 이빨이 힘없이 으스러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작고 검은 스무 개의 발가락이 피에 절어 거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뭉툭해진 네 개의 발에서 흐르는 피는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아, 너무 성급했다. 소파 다 버리겠네. 어떻게 지우지.

 노란 눈이 점점 탁해져 간다. ‘생명의 불길이 점차 꺼져가는 것을 보며 쾌감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언젠가 보았던 책의 구절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제멋대로 으스러지고 제대로 부러지지도 않아 덜렁거리는 앞니를 보이며, 겨우 입을 열고 있는 모습이 우습다 못해 꼴사납다. 옅은 숨에서 묘하게 단내가 올라온다. 온몸을 베는 겨울바람을 일순간 쫓아내버릴 정도로 폭신한 꿀내음이었다.

 점점 강해지는 향기에 순간 눈앞이 아지랑이마냥 일렁이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온다. 내 뒷걸음질에 테이블이 밀려나며 와인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왼쪽 양말이 와인으로 축축해지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멍이라도 든 건지 심장이 파랗다 못해 보랏빛으로 변해가는 게 느껴졌다. 죄책감인가? 이제 와서? 그것도 이 고양이 새끼한테? 말도 안 돼. 맞아. 죽였어야 했어, 진작에. 28년 전 그날, 골목에서 날 비웃던 검은 고양이. 그 녀석과 닮은, 감히 나와 택이의 보금자리에 함부로 들어온 모두 네 잘못이다.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않아.

 테이블 옆에 두 동강 나버린 와인병이 시체처럼 누워있는 것이 보인다. 한 걸음 움직이니 꽤 큰 조각이 발바닥을 뚫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졌지만, 이상하리만큼 아프지 않다. 병목을 손잡이처럼 쥐어 잡고 깨진 병의 윗부분을 주워 든다. 생각보다 꽤 나가는 무게감과 검은 피로 미끄러운 손에 병을 놓칠 뻔 했지만, 얼른 바로 잡아 들어 간신히 붙은 숨으로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녀석의 배에 그대로 꽂아 넣었다. 불규칙하게 깨진 부분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찔러 넣자 녀석의 마지막 발버둥이 시작됐다. 소용없어. 죽어버려, 제발. 내 앞에 다신 나타나지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려.

 우애웅. 버둥거림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며 한없이 울어 젖힌다. 핏자국은 어떡하지. 소파를 세탁소에 맡길 수도 없고. 아 양복 더러워졌다.

 ―Rrrr

 택이 벨소리다. 왔구나, 택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다. 뭐지? 다시 소리에 집중하니 우리 방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 핸드폰 두고 나갔구나.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아, 침대 위에 놓여있는 네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발신자 이름은 성선우. 택이 동기. 그러고보니 선우 만난지도 꽤 됐네, 오랜만에 셋이 밥이나 먹자고 할까.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고 자리를 비운 택이 대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항상 말로는 툴툴거려도 그 안에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가 잔뜩 묻어 나온다는 걸, 형은 알고 있을까? 알고 그런 거라면 더 귀여운데. 오늘 아침 보았던 멋있는 형의 양복 차림을 떠올리며 병원 비상계단에서 혼자 얼굴을 붉히는 내 모습이 꼭 열일곱 살 난 소녀 같아 스스로도 살짝 부끄럽다. 새벽부터 취객이 찾아와 난동을 부려, 결국 경찰을 부르게 된 일로 피곤했던 게 싹 가시는 것 같다. 낭독회 당일인 오늘 데이 근무가 잡힌 게 흠이지만, 곧 있으면 퇴근이고 내일부터 이틀 연속 오프니까! 오랜만에 형이랑 긴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는 생각에 심장이 또 두근거린다. 텅 빈 추운 계단에 내 심장소리가 꽉 차도록 울리는 것 같아 가운 주머니에 핸드폰을 꽂아 넣고 얼른 응급실로 돌아간다.

 최택, 데이트 가냐? 데스크에서 차트를 정리하던 덕선이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실눈을 뜨며 말을 걸어온다. 내 얼굴이 그렇게 티가 많이 나는 타입인가. 인턴 때 만나게 된 덕선인 몇 년째 그렇게 잘나신 여친님 좀 보자고 보채지만, 여자친구 대신 세상에서 가장 잘나고 따뜻한 남자친구가 있는 나는 아무 대답 않고 늘 웃음으로 대신했다. 스무 살의 형을 그 동네, 그 책방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나에겐 다신 없을 너무나도 멋있는 사람인데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끔 슬프다.

 ―형, 제 룸메 선우 알죠? 걔 우리 사귀는 거 알아요.

 아마 본과 3학년 때였나.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오랜만에 동기 애들이랑 술자리를 가졌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나는 언제나처럼 기본 안주로 나오는 마카로니 과자를 하나씩 집어먹으며 중간중간 정환이형이랑 카톡을 하고 있었다. 다들 여친님에게 잡혀 사느라 바쁘냐, 손가락 좀 쉬게 해줘라, 줘! 등의 말을 하며 먹던 과자를 던지는 동안 선우는 말없이 술을 마시며 나를 흘끗흘끗 쳐다봤었다. 얘가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숙사에 돌아가자마자 잔뜩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내게 말했다. 야, 저번에 그 형이지? 뭐가. 해부실습 첫날, 그 형. 니 여자친구, 그 형 맞지?

 물어봐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그때 선우의 얼굴은 내가 여태까지 봐왔던 것 중 가장 어두웠고 불안감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나는 드디어 내 애인을 자랑할 사람이 생겼단 사실에 신이 나서 맞다고, 우리 형 엄청 멋있지 않느냐고 대답했었다. 마냥 좋아 죽을 것 같다는 듯이 대답한 나를 보며 선우는 당사자인 나보다 현실적으로 나를 걱정해주었다. 야, 바로 맞다고 하면 어떡하냐. 내가 너 아웃팅시키면 어떡하려고? 헉, 할거야? 안 해, 이 등신아! 그리고 기숙사 앞에서 시커먼 새끼 둘이 그렇게 부둥켜안고 있으면 그게 봐 달라는 거야 뭐야 대체! 다행히 선우는 딱히 편견이 없던 건지 아니면 그저 제 친구니까 이해해준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에게 저 질문을 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고민을 해왔을지, 그날 얼마나 많은 술을 먹고 겨우 용기를 내 물어본 건지. 독한 술냄새에 괜히 나까지 취하는 것 같아 둘이 실없이 웃으며 밤을 보냈던 것 같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형에게 전활 걸어 신나게 자랑을 했었고, 결국 그 전화로 형은 다시 기숙사에 소환되었다. 전날 선우의 말이 떠올라 형에게 내가 차에 가겠노라고 문자를 보냈고, 기숙사 근처에 시동이 꺼진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형의 차가 있었다. 운전석으로 가기 위해 차 앞부분을 도는 동안 슬쩍 앞 유리 너머로 보이는 형의 모습을 보았다. 내가 처음 자자고 졸랐던 날보다 훨씬 굳어있는 얼굴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형은 비이상적으로 자기 자신이 더럽다고, 나는 너무 새하얗기 때문에 더럽힐 수 없다며 제 자신을 열등감으로 감싸버리고는 좀처럼 틈을 내주지 않았다. 누구보다 멋있고 빛이 나는 내 사랑인데, 형은 왜 자꾸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조심스레 조수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자 형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다그쳤었다. 왜 그렇게 생각 없이 사냐고. 좋은 말 못 들을 거란 건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었다.

 “그게 그렇게 잘못한 거예요? 나는 그냥……. 됐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가서 아니라고 할 테니까, 형도 그냥 집에 가요.”

 “택아. 내가 왜 이러는지 알잖아. 나는 너 잘못되는 게 싫어. 그러니까,”

 “사랑하는 게 잘못된 거예요? 아니면 남들이 알게 되는 거? 나 그런 걸로 상처 안 받아요. 지금 나 상처 주고 있는 건 형이잖아. 나 제일 아프게 하는 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정환 너잖아.”

 날 걱정하는 형의 마음은 고백했을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세상 좋아졌다지만 동성애자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에 경멸과 같잖은 동정이 섞여 우리를 평가하기 시작할 거란 걸. 그 화살이 나는 물론 형에게도 날아가게 될 텐데 형은 오로지 내 걱정뿐이었다. 답답할 정도로. 형의 이 답답함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그날 난, 차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크게 울어버렸다. 일곱 살 난 어린애가 잃어버린 엄마를 찾듯 꼴사납게 울었다. 온몸이 말라버릴 정도로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는 동안, 나를 달래기 위해 손을 뻗다가도 곧 거두는 행동을 반복하는 형을 보며 더 서럽고 야속한 감정이 솟구쳤었다. 이내 한숨을 쉬고 차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우린 정말 어이없게 헤어지는구나. 함부로 평생이란 말 쓰는 거 아녔는데. 라는 후회를 하며 숨이 넘어가도록 울었다. 진짜 그때는 울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했었다.

 갑자기 차 문이 열리며 내 인생에서 절대 지울 수 없는, 미워 죽겠지만 이끌릴 수밖에 없는 편안함이 담요처럼 나를 감싸 안았다. 됐다고, 뭐 하는 짓이냐며 소리치고 그 따뜻한 품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하나에 바보같이 미운 마음이 녹아내렸다. 겨우 헐떡이던 숨이 평소처럼 돌아오자 형은 자기 옷 소맷자락으로 내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 눈물, 콧물을 닦아내주었다. 너무나 상냥한 손길이라 방금 전 모진 말을 한 사람이 맞는 건지, 다시금 서러움에 눈물이 흘렀고 형은 나에게 미안하다며 자기가 잘못했다고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화가 나는 건 단순히 우리 사이를 남들에게 알리지 못한다는 것 때문만이 아녔다. 형은 이제 유명한 작가인데, 나는 그저 의대 본과 3학년생일 뿐인데. 따가운 시선을 받고 그 때문에 상처받는 것도 형이 훨씬 크고 아플 게 뻔한데. 미련하게 나만 바라보는 게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 진짜 너무 부끄럽다. 맨날 형한테 연하라고 무시하지 말라고, 애처럼 대하지 말라고 해놓고는 엄청 애처럼 굴었었다. 그날 처음으로 형과 우리 관계에 대한 약속을 했다. 늘 하는 우리 헤어지지 말자, 이번 주 일요일에 보자. 같은 약속이아니라, 일종의 서약 같은 것이었다. 서로 자기가 당당하다고 느껴질 자리에 올라서면 그때는 꼭 말하겠다고. 부모님께도 찾아가 인사도 드리고, 말뿐인 결혼이겠지만 정말 둘이 반지도 맞추고 같이 살자고. 곧은 두 눈에서 진심이 느껴져 나는 아쉬움도 잊고 금방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 다음날 바로 반지 맞춘 사실을 알면 분명 한숨 쉬고 한마디 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자신에 대한 형의 기준은 턱이 너무 높다. 덕선인 이틀간 잘 쉬고 오라며 차트로 내 등허리를 툭툭 쳤다. 진상 취객 아저씨가 왔던 것이 꿈인가 싶을 정도로 마치 내과에 있는 것처럼 일이 없어, 생각보다 오래 자리를 비웠지만 따로 콜이 오지 않았다. 응급실로 돌아가니, 심지어 차선배는 베드에 걸터앉아 꾸벅거리며 졸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형한테 문자라도 하나 더 보낼 걸. 사진도 좀 찍어 보내라 하는 거였는데……. 은근슬쩍 코 고는 소리도 내는 차선배에게 들릴 듯 말듯하게 말을 걸어본다.

 “차선배-님.”

 “으어어….”

 “…저 퇴근 하겠습니다.”

 “으응. 잘 쉬고 오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혹시나 깨면 분명 다시 돌아오라고 할 것이 뻔하기에 최대한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한다. 다행히 탈의실로 가 옷을 갈아입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선배들과 마주치지도 않고,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치만 오프 끝나고 돌아가면 분명 정강이를 걷어 차일 거야. 벌써부터 오른쪽 다리가 아파오는 것 같다. 일찍 끝난 김에 주차장에서 기특하게 잘 기다리고 있던 차를 찍어 형에게 보낸다. 낭독회 이제 막 시작했겠지? 오늘 형 어제보다 더 멋있었는데… 여자들 많이 왔으려나? 다 반해서 막 사진 찍어가고 그러면 어떡하지? 안되는데……. 아무한테나 웃어주지 말라고 할 걸.

 맘 같아선 직접 팔을 걷어 붙이고 형에게 요리를 해주고 싶지만, 나조차 내 음식을 싫어하기에 고민 없이 늘 가던 대형마트로 차를 몰았다. 초밥을 사 가려는데 네 가지 모둠 초밥세트에 전부 연어알이 들어있다. 형이랑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데. 짜기만 하고 가끔 비린 맛도 나구…. 그냥 로스트 치킨이나 나시고랭 사갈까…. 근데 그 둘은 양이 너무 많잖아. 바로 먹어야 맛있는데. 맨날 그래서 형이랑 남은 거 그냥 다 버렸잖아. 내 고민을 덜어주려는 듯 마트 조리장에서 방금 쥔 연어초밥 세트가 줄줄이 트레이에 담겨 나왔고, 아주머니가 냉장칸에 정갈하게 정리하신다. 나도 좋아하지만 형이 제일 좋아하는 연어, 게다가 양도 적당하니 오늘 저녁 메인은 이 연어초밥으로 해야겠다.

 배열이 바뀐 건지 늘 조리식품 옆 코너에 있던 초콜릿들이 도통 보이질 않는다. 아, 그 초콜릿 여기서만 살 수 있는데. 아쉬운 발걸음을 떼던 찰나 그 옆의 와인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아 죄다 프랑스꺼네. 단 와인을 좋아하는 나는 그냥 제일 달콤한 걸로 추천해 달라 하거나 화이트 와인 아무거나 집어오면 되지만, 떫고 시큼한 걸 좋아하는 정환이형은 레드 와인을, 그것도 꼭 이태리 와인을 좋아했다. 형 축하파티니까 꼭 형이 좋아하는 와인이어야 하는데. 바로 옆에서 화이트 와인을 정리하던 직원에게 이태리 와인이 있냐고 물어보니 딱 두 종류 있다고 한다. 알려준 곳으로 가보니 다행히 형이 맛있다고, 이게 진짜 와인이라며 노래를 부르던 게 있다. 기분 좋게 한 병을 카트에 싣고 내 군것질거리를 사러 냉동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에 아이스크림이며 와플, 츄러스 심지어 치즈케이크까지 사느라 예상보다 많은 금액이 영수증에 찍혔다. 이런 와중에도 초코케이크가 없어서 아쉬운 내가 우스워 차 안에서 혼자 헛웃음을 짓는다. 토요일인데도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 건지 생각보다 도로에 차들이 많지 않다. 다행이다 아이스크림 때문에 약간 걱정하고 있었는데.

 차를 대고 낮은 울타리 대문을 여니 낯선 그림자 하나가 나를 반기고 있다. 다시 보니 그림자가 아니라 커다란 검은 고양이였다. 커다랗고 노란 눈이 너무 예뻐 한참을 바라보는데, 이 녀석도 딱히 날 피하지 않고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날 올려다본다. 아, 진짜 예쁘다. 야옹아, 잠깐만! 다급하게 기다리란 말을 남기고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짐이 불편해 문 앞에 아이스크림과 다른 냉동식품을 내려놓고 도어락을 열었다. 곧장 부엌으로 가 냉장실에 연어초밥을 넣고 다시 현관문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너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나머지 짐들을 각각 테이블과 냉동실에 넣고 집안 어딘가에 있을 참치캔을 찾기 시작했다. 분명 기름기 제거하면 괜찮다고 했던 것 같은데…. 체까지 꺼내가며 기름기를 최대한 제거한 참치를 그릇에 담아 밖으로 나갔다. 용케 잘 기다리고 있던 야옹이 앞에 그릇을 내려놓자 기다렸단 듯 허겁지겁 참치를 먹기 시작한다. 덩치가 꽤 큰 편인데 너무 조금 가져다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미안해, 집에 한 캔 밖에 없어. 형이 참치김치찌개 좋아해서.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그릇을 비운 너는 내 말을 알아듣는 듯 가만히 날 바라보고는 쪼그려 앉아 있는 내 앞으로 와 무릎에 얼굴을 비빈다. 얼마나 힘이 센지, 조금 과장해서 뒤로 밀릴 것 같았다. 큰 덩치에 비해 곧잘 애교를 부리는 성격이 왠지 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보다 아주 조금, 정말 정말 조금 크지만 여튼 큰 키에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차가운 인상이라고 하지만, 매일 아침 뽀뽀로 깨워주고 자기 전에도 내 입술을 찾는 키스쟁이라는 걸 사람들은 절대 모르겠지? 게다가 요리도 잘하지, 맨날 좋아 죽겠다는 듯 날 바라봐주지. 막상 형 본인은 자기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행동을 하는지 잘 모를 거야. 그래서 더 귀엽다.

 네 사진을 찍기 위해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 코트 자락이 머리를 건드린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너는 내게서 떨어져서는 코트 자락을 가만히 노려본다. 으아,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 있지. 혹시나 네가 도망가 버릴까 봐 얼른 카메라 어플을 켜서 연속촬영 버튼을 눌렀다. 파바박 소리가 나도 도망가지 않는 널 보고 다행이라 생각한다. 야옹아, 형아들이랑 같이 살까? 진짜로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우애웅 하는 울음소리로 대답하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고양이도 겨드랑이라고 하니? 네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널 들어 올리는데 역시나 덩칫값을 하는구나. 꽤 나가는 몸무게를 버티고 너를 집안으로 모셔갔다.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원래 살던 집인 것처럼 바로 소파 위로 향하는 네 모습에 웃음이 난다.

 곧장 따라가 테이블에 대충 걸터앉아 널 다시 찬찬히 보니 오른쪽 앞발에 무슨 금속 같은 게 보인다. 실눈을 떠서 더 자세히 보니 그간 쓰레기통이라도 뒤졌던 건지 철사가 발찌처럼 이리저리 뒤엉켜있다. 꽤나 여러 겹이 겹쳐있어 가위로는 잘릴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잠깐만 기다려봐, 형아가 이거 풀어줄게. 내 방으로 가서 책상 위에 코트를 벗고, 의자 옆에 있던 공구함에서 니퍼를 찾아 꺼내들었다. 가만히 소파 위에 앉아있는 네 오른쪽 앞발을 잡아들자 얼른 반대쪽 발의 발톱을 세워 내 손등을 할퀸다.

 작은 쓰라림이 느껴지는 손등을 내려다보자 어느새 핏방울이 두어 개 맺혀있다. 여기서 더 하면 네가 더 크게 발버둥 칠 것 같고, 그러면 아무래도 내가 널 다치게 할 것 같아 일단 지금 당장은 포기하기로 했다. 이따가 형 오면 둘이서 붙잡고 해봐야지. 방으로 돌아가 니퍼를 공구함에 도로 집어넣고, 책상 서랍 맨 밑 칸, 한쪽 구석에 두었던 작고 검은 벨벳 상자를 꺼내들었다. 형이 좋아할까? 좋아해야 할 텐데.

 방을 나서니 소파 위에 있던 검은 그림자가 사라졌다. 밖으로 나간 건가? 검은 벨벳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후, 온 집안을 살펴봤지만 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쉽지만 잠시 방문한 손님이라 생각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전에 형이 선물해줬던 검은색 니트 폴라티로 옷을 갈아입고, 소파 위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노란 쿠션을 껴안고 TV를 켰다. 아, 형 언제 오지. 핸드폰을 보니 아직까지 답장이 오지 않았다. 보고 싶은 마음에 괜히 안 하던 꽃받침 포즈까지 하며 셀카를 찍어 형에게 보내본다. 김작가님 빨리 왔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김정환씨. 빨리 와요.

 

 “야, 너 죽었어 이제. 차선배 너 어디 갔냐고 난리도 아니야 지금. 야 최택, 쫄았냐? 대답 좀 해봐, 임마.”

 “아, 죄송한데. 택이가 지금…….”

 자리에 없다는 짧은 뒷말이었지만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다. 이럴 수는 없어. 택아, 왜 니가 거기 누워있어? 응? 떨리는 손으로 어렵게 전화를 끊고 다시 소파를 내려다봤다. 이건 아니다. 다시 봐도 소파 위에 누워있는 건 너였다. 코 뼈가 부러진 듯 코가 이상하게 휘어있고, 겨우 벌리고 있는 입안에는 빠진 앞니들과 금이 간 이들이 보인다. 사실 그나마도 코에서 잔뜩 흘러내린 피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가슴에 올려진 네 왼손은 분쇄기에 집어넣었던 것처럼 손가락이 지저분하게 잘려있다. 너의 그 하얗고 예쁜 손이 흉측하게 변해있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바닥에 주저앉으며 미끈거리는 것이 느껴져 아래를 바라보자 네 피로 흥건한 거실 바닥이 이제야 보인다. 간신히 손을 뻗어 피로 축축해진 네 배를 만져본다. 검은 니트가 피에 잔뜩 절어 질척이는 소리를 낸다. 늦게나마 피를 멈추기 위해 상처 부위를 눌러보지만 소용없다. 이곳저곳에서 피가 배어 나온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 꽃이 빠르게 시들어간다.

 “……택아.”

 겨우 네 이름을 부르자 반 이상 감긴 두 눈이 내 모습을 담는다. 미친 걸까. 차라리 미친 거라서 이게 꿈이라고 해줘, 택아. 제발.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너무 슬프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거였다. 너무 아프면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거였다. 그 어릴 적 감히 죽고 싶고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이 고통은 너무 크다. 차라리 내 살가죽을 벗겨내어 뜨거운 기름을 부어버렸으면 한다. 이게 꿈일 수만 있다면 지금 난 뭐든지 할 수 있다.

붉게 물든 뭉툭한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쓸어내린다. 손가락이 잘린 부분에서 네 뼈마디가 느껴진다. 대체 왜. 다른 사람도 아닌 너를. 왜 너를 못 알아 본 걸까. 겨우 고개를 돌려 다시 네 얼굴을 바라보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을 뻥긋거린다. 차라리 아무 말하지 마, 택아. 그냥 버텨줘 제발. 아니면 욕을 해, 평생 저주할 거라고. 당장 눈앞에서 죽어버리라고. 너는 대체 어디까지 착할 셈 인지 나대신 눈물을 흘린다. 얼굴 이곳저곳에 말라붙어있는 피가 네 눈물로 조금씩 씻겨 내려간다. 말하지 말라는 내 부탁에도 여전히 입을 뻥긋거리는 내게 귀를 기울였다.

 ―나랑 결혼해주세요.

 엉망이 된 입이라 발음이 잔뜩 뭉개졌지만, 분명 이 말이었다. 결혼해달라니. 너는 아직도 그 약속을 기억하는구나.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너를 바라본다. 얼마나 아플까. 택아. 내가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미안하단 말을 하려는 찰나 네가 말갛게 웃어 보인다. 네 코를 부러뜨리고, 손가락 발가락을 모두 자르는 잔인한 짓을 한 나를, 네 배를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린, 당장에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나를 보며 웃어 보인다. 새빨갛게 물든 열일곱의 자운영이 내 앞에서 시들어가고 있다.

 너의 하얀 이름을 계속 불러보지만, 너는 감은 눈을 좀처럼 뜰 생각을 하지 않는다. 피범벅인 얼굴을 양복 소매로 닦아보지만 잘 지워지지 않는다. 네 예쁜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잘 보이지 않는다. 입을 맞춰 보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부드러운 네 입술에 내 것을 겹쳐보지만, 그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를 간질이던 너의 귀엽고 작은 숨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감히 내가 너를 꺾어버렸다.

 

 바쁜 병원 일로 제대로 된 옷도 갖춰 입지 못하고 가운차림으로 상을 치르고 온 선우의 얼굴이 유달리 어둡다. 덕선 역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다. 병원 내의 그 아무도 택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지 않는다. 모두들 빈소에 다녀왔지만 애써 모른 척, 잊으려 하고 있다. 이들의 노력이 가당찮은 듯, 병원 이곳 저곳에 매달려있는 TV는 전부 같은 뉴스를 보도하고 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8시 뉴스, 김채연입니다.

 오늘 저희 8시 뉴스는 다소 충격적인 소식과 함께 시작하겠습니다. 평소 부드러운 문체와 애절한 감성을 잘 살린 글로 인기가 두터웠던, 작가 김정환씨가 경기도 외곽의 한 주택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된 곳의 명의자는 김작가가 아닌 최모씨, 그는 S대 출신 3년차 레지던트였습니다. 집주인 최모씨 역시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약물 자살인 김작가와 달리 배에는 깨진 병으로 인한 자상 여러 개가 있었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잘린 상태로 발견되어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폭행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와인병과 가위 등에서 김작가의 지문이 검출되어 경찰은 김작가가 최씨를 고문한 후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평소 교류가 없던 걸로 보이는 이 둘이 어떻게 최씨의 집에서 발견된 것인지, 김작가가 왜 최씨를 헤쳤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잠시 후 현장조사와 함께 자세한 사항 알려드리겠습니다.

다음소식입니다. 최근 국회의원 김무성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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