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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덕선이랑 사귀고 있어”

 택의 말에 쌍문동이 뒤집어졌다. 택의 얼굴엔 꽃이 피었고 덕선의 얼굴에도 꽃이 피었다. 동룡의 얼굴엔 황당함, 선우의 얼굴엔 흐뭇함, 그리고 마지막 정환의 얼굴엔 짙은 어두움이 피어났다. 꼭 자신의 것을 덕선이나 택에게 빼앗긴 것처럼.

 정환은 어릴 때 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은 가족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은 자신에게 가족뿐 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쌍문동의 친구들을 만나고 나서부턴 행복은 모든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환은 덕선을 보며 행복해했고 그런 정환을 귀찮게 느꼈던 덕선은 자신을 택에게 맡겼다. 정환은 언제나 덕선을 생각했지만 이미 택에게 자신을 바친 덕선은 정환을 무시하거나, 멀리할 뿐 이였다. 정환은 어느날부터 자신을 멀리하던 덕선을 느끼며 큰 상처를 얻었고 그 상처는 쉽게 아물어지지 않고 더욱 넓어졌다. 큰 상처가 천천히 나아가듯, 그렇게 정환은 상처를 스스로 치료해나가고 있었다.

 어느날부터 정환은 스스로의 감정을 짧은 글로 표현하고 있었다. 덕선에게 받은 상처를 시라는 연고로 새살이 돋게했고 정환의 마음엔 시와 택의 대한 복수, 이 둘뿐이였다. 볼펜으로 한자 한자 눌러쓴 정환의 시엔 어느날은 꽃이, 어느날은 바다가, 어느날은 사랑이 보였다. 정환은 시를 쓸 때만큼은 온 공간이 우주로 물든 곳에서 볼펜으로 넓은 우주를 조금씩 채워나갔고 정환의 손이 빠르게 움직일수록, 손이 점점 커갈수록 정환의 볼펜은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정환이 덕선에게 받은 상처를 치료하듯 볼펜은 더더욱 쌓여만 가고 있었다.

 “정환아, 다시 생각해보자. 응? 우리아들.”

 “그래, 정화이 너 시인인가 뭔가 하면 돈도 많이 못 번다. 그냥 공사가라.”

 “저 공사말고 시 쓸래요, 제가 하고싶은거 하고싶어요.”

 정환은 공군사관학교를 포기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부모님께 말한건 이번이 처음이였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이젠 더 이상 혼자 마음속에서 썩히지않고 곪은 상처를 보여주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 꺼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인 듯 가족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왜 돈을 못 버는 직업을 하냐고, 안정적이지도 않은 직업을 왜 선택했냐고, 2년 전 잔비가 내렸던 날처럼 정환의 심장엔 유리조각들이 박히고, 볼펜으로 색칠되었다.

 정환은 조용한 집안에서 시를 쓰고 있었다. 넓은 집안에서 할 것은 자신의 직업이자 자신을 먹여 살리는 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환을 먹여 살리고 가장 좋아하는 시라는 존재와 그걸 도와주는 볼펜이란 것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정환은 달라졌다. 정환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최택 라는 존재와 성덕선이라는 존재를 뿌리치고 자신을 찾으려 볼펜을 빠르게 놀렸다. 정환이 종이 위 눈물을 흩뿌리며 볼펜으로 꾹꾹 눌러쓰던 5년전과 달리 지금은 볼펜을 빠르게 놀리며 마음을 표현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환이 볼펜을 빠르게 놀려도 상처는 밝은 글 속에 드러나 있었다. 아무리 시 속에서 꽃밭과 푸른 바다, 사랑을 표현했어도 드러나는 것은 아픔뿐이였다. 7년전, 자신이 덕선에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땐 그리 아프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환의 아픔은 정환의 시 속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똑같은 볼펜을 사용해도 남는건 그 상처였기 때문에 정환의 가슴은 더욱 타들어가고 있었다. 왜 덕선과 택은 자신을 막는 것인지, 덕선에 대한 상처는 아물었는데 택에 대한 마음은 커져가는지.

 정환은 처음 시를 쓸땐 택의 대한 복수와 순수한 시의 대한 마음으로 시를 제 것인 것 마냥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갈수록 덕선에 대한 마음을 접고 상처를 치료해 나갈수록 생각나는 것은 택 이였다. 처음 정환은 택을 증오라는 감정 때문에 생각나는 것인줄 알았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사랑이라는 감정을 앞세워 택을 자신의 시속에서 꽃이나 우주로 표현해가고 있었다. 택은 정환의 시 속에선 소녀로, 우주로, 향기로 표현되어가고 있었다. 그 감정을 정환이 느꼈을땐 이미 정환은 택을 사랑하고 있었다. 증오로 느끼던 택을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정환에게 택은 사랑이었다, 택을 알게 된 순간 정환은 택을 사랑으로 느끼고 있었다. 택의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을 봤을 때 심장이 멋대로 뛰고 있는 것이 사랑이었는지 몰랐던 고등학생 정환은 그저 자신의 덕선을 빼앗어간 택에 대한 증오심과 혐오감으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택에 대한 마음이 커져갈수록 덕선에 대한 마음도 점점 식어가기 시작했다.

 “나 덕선이랑 결혼해.”

 7년전 그 날, 그날 친구들이 택의 방에 모였던 날처럼 택은 충격적인 말을 뱉어냈다. 순간 정환은 눈을 떴어도 보이는 우주에 잠시 휘청였고 볼펜으로 색칠된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덕선과 택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도 택을 덕선에게서 빼앗어가고 싶다고 생각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나지막히 들리는 둘의 목소리에 정환은 정신을 차렸고 정환의 눈엔 볼펜으로 색칠된 하늘과 우주가 지워져갔다. 정환은 청첩장은 언제 돌릴까?, 드레스는 뭘로 할까? 사소한 이야기를 들으며 택을 흘깃 쳐다봤지만 택은 눈길조차 주지않고 덕선과 이야기만 했다. 정환은 느껴지는 무관심 속 방문을 열었다. 볼펜으로 색칠된 검은 방도 싫었고 자신이 택을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정환에겐 큰 혼란이였기 때문이다. 정환은 방문을 열고 한걸음씩 자신의 길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그 길을 만들땐 택이 필요했고 또 덕선은 없어야했다. 덕선은 택과 정환의 길에 방해가 되는 존재였고, 또 덕선은 택에게 불필요한 존재라고 정환은 생각했다. 정환은 순간 올바르지 않은 생각을 했다 생각하였지만 정환이 덕선이 불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였을 때부터 비극은 시작되었다.

 처음 정환은 그리 나쁜존재가 아니였다.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고 악마도 아니였다. 단지 택 이라는 존재와 덕선이라는 두통이 정환을 그렇게 만들었다. 택은 정환이 사랑했던 사람이라 그렇게 아꼈던 걸까, 아니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감춰두고 증오와 혐오감으로 둘러싸여 있던 모든 것이 부딪혀 오묘한 감정을 나타내게 되어버린 것 이였을까. 정환의 오묘한 감정은 언제쯤 끝나게 될까. 수많은 고민거리를 안은채 정환은 하루, 일주일, 한달을 버텨왔다. 하지만 정환의 고민들은 점점 커지다 터져버렸고 그렇게 정환은 난생처음 칼을 잡았다.

 “살려주세요.. 목숨만 살려주신다ㅁ..”

 텅빈 방안, 덕선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덕선의 목소리엔 두려움이 묻어있었고 또 두근거리는 덕선의 심장소리가 텅빈 방안을 울리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뛰는 덕선의 심장소리를 덕선의 앞에서 듣고있던 남자는 바로 정환이였다. 성덕선이라고 쓰여진 검정볼펜을 들고 덕선의 앞에서 볼펜 꼭지를 달칵거리며 덕선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덕선은 달칵거리며 움직이는 볼펜의 소리를 들으며 두려움에 떨었고 정환은 그런 덕선을 보며 비웃기 시작했다.

 “머리는 안 굴러가는 년이 또 말 하나는 잘하네. 그래, 목숨은 살려달라고? 싫은데, 이 악연은 니가 먼저 시작한거야 성덕선. 니가 나랑 최택의 사이를 갈라놓은 거야. 그러니까 죄값을 받아야지.”

 정환은 입에도 담기힘든 험한말들을 하며 덕선에게 겁을 주었고 덕선은 어딘가에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에 김정환..? 이라는 말을 했지만 정환이 딸깍거리는 볼펜소리에 묻혀버렸다. 딸깍, 정환이 볼펜을 길게 한번 딸깍거렸다. 그때 정환은 장갑을 꼈고 칼을 잡았다. 딸깍, 딸깍, 정환이 볼펜을 길게 두번 딸깍거렸고 정환은 오묘한 빛깔로 휩싸인 칼날을 덕선의 심장부근에 갖다대었다. 딸깍, 딸깍, 딸깍. 볼펜이 세번 딸깍거렸고 그렇게 덕선은 차가운 방, 서늘한 칼에 꽂혀 차가운 피를 흘리며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최택, 성덕선도 치워줬잖아. 근데 왜 나한테 그러는건데. 왜 나한텐 성덕선 그 꼴 사나운 기집애한테 했던것처럼 사랑해주지 않는데. 내가 걔를 죽여서 그러는 거야? 응? 내가 걔를 죽여서 그러는 거냐고.”

 “바빠. 나 내일 대국있어.”

 “아니 넌 왜 날 사랑해주지 않냐고. 너도 성덕선처럼 칼에 찔려서 죽어볼래? 내가 묻잖아 최택. 응?”

 “너 싸이코냐? 나가라고. 꺼져.”

 “택아. 미안해.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한번만 봐줘.”

 “꺼져 김정환, 내 눈앞에서 꺼져.”

 정환이 결국 덕선을 죽이고 택에게 자신의 범행사실을 말했을 때, 택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방안, 자신에게 달려드는 정환을 밀쳐내기만 했다. 덕선의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 입가엔 미소를 머금고 말이다.

 처음 택은 덕선을 이용할 목적으로 갖고 놀았던 것 이였다. 덕선이 택에게 자신을 바친 순간부터 비밀로 하자고 했던 덕선과의 연애를 선우와 동룡, 그리고 정환에게 말한 것은 모두 계획된 것이였다. 덕선은 택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택은 덕선의 대한 마음, 사랑은 없었다. 단지 택도 정환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정환을 진심으로 사랑했었지만 18살, 그때 그 청춘은 정환이 덕선을 좋아했었기 때문에 택은 혼자 아픈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다. 하지만 덕선이 정환을 싫어하는 걸 알았던 택은 덕선을 더 챙겨주었고 덕선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거짓으로라도 사랑을 하자고 제안했었다. 그 일로 덕선은 잡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정환은 잡지 못 한 채 그렇게 7년이란 시간을 지나왔다. 7년 후 택은 덕선이 누구보다 싫고 누구보다 증오하고 누구보다 혐오스러웠지만 남들 앞에선 덕선을 좋아하는 척을 하고 사랑하는 척하고 아끼는 척하고. 그렇게 택은 또 다른 자신과 마주하고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데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다른 한 사람을 향햐여 칼을 겨눈 것, 그게 정환과 택의 공통점이였다.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있었고 서로를 사랑했지만 타이밍이 문제였었다. 정환이 덕선을 좋아했을 땐 택이 정환을 마음에 품고 있었고, 택이 덕선을 받아들였을 때는 정환이 택을 마음에 품고있었다. 그렇게 엇갈린 둘의 사이는 덕선의 죽음으로 인하여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버렸다. 둘 서로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감정이 메말라버린 18살, 그때 그 청춘의 시작으로 돌아가버렸다.

“택아, 너 우리 덕선이 어딨는지 알어?”“아저씨, 덕선이 없어졌어요?”

“응, 그려. 어제 비행기도 안 탔는디 전화도 안 받어.”

“아저씨, 제가 비밀 알려드릴까요?”

“뭐여?”

‘사실 정환이가 덕선이 죽였어요. 쌍문동 부잣집네 아들 김정환이 아저씨 둘째딸 성덕선 칼로 찔러서 죽였어요.’ 택의 입에선 저 말이 계속 맴돌았다. 정환이 덕선을 죽였다고 동일 아저씨께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환이 택의 방을 나가기 전, 택에게 ‘택아, 이거 다른사람한테 말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거야. 알았지?’ 라는 말을 했었다. 그래서일까, 택은 입안에서 맴도는 정환의 범행사실이 입안에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택의 입에선 아니에요 라는 말만 나올뿐 정환이 덕선을 죽였다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듯 택은 정환이 덕선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정환이 덕선을 칼로 찔러서 죽였다는 이야기를 동일 아저씨께 하지 못 했다. 택은 정환을 사랑해서 정환의 범행사실을 숨겨준 것일까, 아니면 정환의 협박이 무서웠던 택이 정환의 범행사실을 숨겨준 것 일까. 겉으로는 택이 정환을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 처럼 보였겠지만 그도 한때는 정환을 사랑했었다. 지금은 예전의 정환이 택을 대하는 방법인 겉과 속이 다른 사랑, 그걸 택이 정환에게 똑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택이 혼란을 겪고 있을때, 정환은 침대에 누워 느긋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정환은 죄책감 따위가 자신과 택의 사랑을 막을 수 있냐는 듯 침대에 누워 야구공도 던져보고, 책도 읽어보았다. 그렇지만 정환도 죄책감이 아주 조금 있다는 듯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가만히 있어보고, 그러다 눈물을 하나씩 떨어뜨렸다. 지금 정환의 모습을 쌍문동 친구들이 봤다면 어땠을까, 웃다가 우는 정환을 보면 어땠을까. 마치 가면을 쓴 삐에로 같았던 정환에게 한마디씩 건네고 등을 때리거나 허벅지를 때렸을것 같았다. 정환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쌍문동 친구들이 할 말을 생각해보니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정환이 좋아했던 덕선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은 정환이 웃어도, 울어도 사라지지 않는 사실이였다.

 “택아 이게 뭐야?”

 “거기 써 있잖아 한자로 최택이라고.”

 “이걸 왜 나한테 준거야?”

 “나 좀 죽여줘, 정환아. 너 나 사랑하지? 그럼 제발 나 좀 죽여줘.”

 어두운 밤, 정환과 택은 같은 방에 누워있었다. 달빛이 차갑게 빛나고 바람이 무섭게 부는 밤 택은 나지막히 볼펜을 정환에게 건넸다. 한자로 최택 이라 쓰여있는 볼펜은 창문 아래서 달빛을 받았다. 정환은 볼펜을 건네받았고 이어지는 택의 말에 놀라 볼펜을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곧 볼펜이 방바닥을 조용히 굴러갔다. 정환은 정적을 깨기위해 택의 몸을 자신의 쪽으로 돌려 택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하얀 눈과 함께 서슬퍼런 달, 그 아래서 빛나고 있는 택의 눈동자가 정환의 까만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환은 택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것을 알았을까 정환은 택의 작은 입술의 자신의 입술을 비볐다. 천천히, 또 조심스럽게. 여우같이 가볍고 토끼같이 사랑스럽고. 그렇게 둘은 서로의 입술을 맞대며 처음이자 마지막인 둘의 사랑을 확인했다. 해가 뜨기 전 새벽, 정환과 택은 서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들이 한 짓을 뉘우치는 듯 둘의 눈엔 맑은 물이 방울 모양으로 택의 입술을 타고, 정환의 턱선을 타고, 결국은 택의 쇄골에 눈물이 쌓여 택의 가슴팍으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은 마치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고 정환과 택은 자신들이 덕선에게 한 짓이 얼마나 끔찍하고,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이제야 알게 된 것처럼 끊임없이 정환과 택의 눈에선 방울을 지어 볼을 타고 뚝 눈물이 떨어졌다. 참회의 눈물일까, 아니면 둘 중 한명이 죽어야 끝나는 정환과 택의 악연 때문일까. 덕선에 대한 미안함과 정환과 택의 악연 그 사이를 걷는 둘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아침 해가 밝아오고 새가 지저귀며 아침 햇살을 알릴때까지 정환과 택은 암막커튼 속 작은 빛 사이에서 둘의 빛을 잃고 점점 어둠 속 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어둠속 빛 한줄기로 정환과 택의 빛을 지켜내기엔 무리였는지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한자로 崔澤 이라고 새겨진 볼펜도 달빛을 받아 빛났지만 어둠이 깔린후의 볼펜은 회색빛이 도는 볼펜이였다. 모든게 탁해지고 어두워진 순간 정환과 택의 상반신만 색이 돌았다. 하지만 정환과 택의 하반신, 발목부터 골반까진 온통 어둡게 물들었다. 그것은 정환과 택이 어두운 곳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증표같은 것이였다, 덕선을 죽인 정환, 덕선의 죽음을 기뻐했던 택의 악연은 7년전 그날, 택이 덕선과 사귄다 라고 이야기 했을 때. 그때부터 시작되었고 다신 돌릴 수 없는 사실이 정환과 택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정환은 택과 하룻밤을 보낼때 택이 한자로 최택 이라고 쓰여있는 볼펜을 줬을때 착잡했다. 그 이후 택이 정환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했을때 정환은 택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정환의 입장에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하는 것이였기 때문에 정환은 택이 자신을 죽여달라는 요구를 하고 택이 볼펜을 줬을 때 정환은 택을 사랑했고 정환과 택의 인연은 정환과 택, 둘 중 한 사람이 죽어야 끝나는 운명이였기 때문에 정환은 택을 죽이긴 보단 자신이 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지 오래였다. 둘의 인연, 아니 악연은 언제쯤 끝나는 걸까. 정환의 아픔은 여태까지 정환 혼자 썩혀왔다. 덕선이 죽고 이제야 택을 만나 사랑하는데 왜 덕선의 죽음은 정환과 택을 괴롭힐까. 정환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아픔을 혼자 앓고, 혼자 생각했다. 아픔과 죽음 사이에도 서 보았다. 그렇지만 항상 결론은 최택 이라는 자신의 사랑이였다. 그렇게 택을 앓고, 혼자 사랑하는 정환은 택과의 인연을 마무리 짓고 싶어했다. 사람과 사람대신 사랑과 사랑, 그것이 정환이 원하는 택과의 관계였다.

 정환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택은 자신의 손을 매만지고 있었다. 최택이라 한자로 쓰인 볼펜, 그 볼펜을 정환에게 준 것은 정환에게 자신을 죽여달라는 이야기밖에 안 됐다. 하지만 정환은 택의 표정 대신 택이 준 볼펜만 보았다. 그래서일까, 정환은 택에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도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택은 정환이 자신의 표정을 보지 못한것에 안타까워했고 택은 애써 정환 앞 자신의 미소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사실, 택은 정환을 귀찮아했다. 아쉽다 라는 말로 정환을 위로해주던 택의 얼굴엔 비웃는 표정이 따라왔고 정환의 어깨를 두들리땐 택의 얼굴은 온통 찌푸리고 있었다. 그만큼 택은 정환을 귀찮아 했고 택은 정환을 덕선과 같은 종류라고 여기고 있었다. 덕선을 이용한 것처럼 정환을 이용하고, 덕선을 남의 손으로 죽인 것처럼 정환을 정환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 위해 자신을 정환에게 주고. 그렇게 택은 정환과 돌이킬 수 없는 악연이 되었다.

 ‘내가 이걸 받을 수 있을까. 내가 최택을 죽일 수 있을까?’

 정환은 택에게 볼펜을 받은후 의자에 앉아 가만히 생각을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택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다는 것은 택이 자신을 순수하게 바라봐준 날들을 저버리는 것 이고, 택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환은 갑자기 든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광대를 타고, 마른 볼을 타고, 까칠한 턱을 타고 정환의 바지로 떨어진 눈물은 정환에게 큰 아픔이였다. 7년 전 그날, 덕선이 택에게 자신을 준 이후 정환은 혼자 이겨냈다. 하지만 현재, 자신이 사랑하는 택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것은 정환에게는 너무나 힘들었다. 정환은 택이 준 볼펜을 매만지며, 崔澤이라 새겨진 부분을 만지며, 그렇게 정환은 긴 고민을 마치고 자신의 서랍을 열었다. 서랍을 여는 정환의 손등엔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져있었고 정환의 입에선 울음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환은 서랍을 열던 손을 멈추고 자신의 침대 위 7년전 그 날처럼 앉아 하늘이 푸른 빛으로 물들어 갈 때, 서서히 내리는 비가 정환의 귓가를 간지럽힐 때 정환의 침대엔 붉은 꽃이 피고, 검은 볼펜 여러 자루가 나뒹굴었다.

 3개월 후, 정환은 그렇게 자신의 침대에서 붉은꽃이 피어난 날 그때 그렇게 검은 볼펜 여러자루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붉은 꽃은 정환의 팔에서 피어났고 검은 볼펜 여러자루는 정환의 피와 섞여 오묘한 색을 만들어냈다. 정환의 죽음은 쌍문동 식구들 모두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고 끝내 택은 정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정환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혹은 정환의 죽음이 자신에겐 행복한 일인지, 그것은 오직 택 자신만 아는 사실이였다.

 

 7년 후

 택이 혼자 자신의 방에서 울고 있다. 7년전 그 밤 정환이 울었던 것처럼 택은 구슬프게 울었다. 택의 손엔 빛바랜 사진과 누런 종이가 있었고 누런 종이엔 볼펜으로 쓴 글씨가 있었다. ‘붉은 피는 내 온몸을 적셨고 밝게 빛났던 하늘은 어두워졌다. 너도 그랬을까’ 라는 작은 글씨가 택과 정환이 함께 찍은 사진아래 적혀있었다. 정환이 죽기 전, 택에게 남긴 메시지 였고 택은 자신을 원망했다. 왜 그날 정환에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볼펜을 주었는지, 정환의 장례식엔 왜 가지 않은것인지. 택은 자신의 가슴을 쾅쾅 쳐보았지만 답은 하나였다. 자신이 죽는 것, 정환의 죄를 덮기 위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자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방법은 그것 뿐 이였다.

 “속보입니다. 프로기사 최택 9단이 오늘 새벽 자살한 채 자신의 방 안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텅빈 방안,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티비에서 이 모든 상황은 죽은줄만 알았던 덕선이 모든걸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입가엔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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