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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환이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저 멀리 바닥에 앉아 꼬리를 흔드는 갈색의 털 뭉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확 집 밖으로 내쫓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택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어느새 정환이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환이 수줍은 듯 미소 지었다.

 

 

 

 

*

 

 

 

 

 대답한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저 갈색의 털 뭉치는 정환의 원룸 한가운데에 앉아있었다. 정환은 간질거리는 코끝을 문질렀다. 자꾸만 웃고 있는 그 얼굴이 떠올랐다. 그 웃음에 덩달아 올라가는 입 꼬리를 집게손가락으로 내리눌렀다. 대답한 기억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웃음을 보느라 넋을 놓고 있었으니까.

 

 “야.”

 

 털 뭉치는 좁은 원룸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서는 앞발을 들어 열심히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있었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 선 정환이 털 뭉치를 불렀다. 정환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정환에게 일절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고양이 세수에 영혼까지 쏟아 붓는 털 뭉치를 보며 정환은 마른세수를 했다. 멍한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던 정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야, 바둑아. 넌 개도 아니면서 왜 이름이 바둑이냐? 하여튼 최택, 작명 센스하곤. 쓸데없이 귀여워. 금세 택의 얼굴을 떠올린 정환이 또다시 미소 지었다. 바둑이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정환은 푹신한 방석처럼 펑퍼짐한 바둑이의 등을 보며 민망한 듯 턱 밑을 긁적였다.

 

 그 순간,

 

 “푸후엣취!”

 

 정환이 급하게 손을 뻗어 휴지를 뜯었다. 말간 콧물이 인중을 타고 흘렀다. 정환은 휴지로 흘러나온 콧물을 닦으며 좌절했다. 털에는 쥐약이었다. 푸후엣취! 그것도 엄청! 다시 한 번 커다랗게 재채기를 한 정환은 붉어진 코를 휴지로 틀어막았다. 털 달린 동물이라면 같은 공간에 들이기는커녕,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고 순순히 온몸이 털로 뒤덮인 고양이 바둑이를 이 비좁은 집 안으로 들였다.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짝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바둑이의 갈색 털이 공중에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마치 구석에 던져진 양말 뭉치처럼 신발장 옆 구석에 몸을 구겨 앉은 정환이 바둑이가 꼬리를 흔들며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리며 엉덩이로 뒷걸음질 쳤다. 신발장에 막혀 더 이상 뒤로 갈 수는 없었지만. 푸엣취! 한번 터진 재채기는 멈출 줄 몰랐다. 그냥 내가 나갈까. 정환은 찔끔 난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다. 그런 정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둑이는 천하태평이었다. 푸엣취! 정환의 재채기 소리가 다시 한 번 커다랗게 원룸 안을 울렸다. 느릿하게 꼬리만 흔들던 바둑이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노란 눈동자가 정환을 향했다. 마치 침입자를 노려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동자였다. 침입자는 내가 아니고 너야, 바둑아. 심기가 불편한 듯 잔뜩 날이 선 바둑이의 눈빛에 정환이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붉어진 코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개 팔자가 상팔자, 아니 고양이 팔자가 상팔자가 따로 없었다. 뭉친 휴지 더미 사이에 앉아있는 정환은 요 몇 시간 새에 폭삭 늙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붉어진 코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구석에 구겨져 쭈그려 앉은 정환은 양쪽 코에 휴지를 돌돌 말아 쑤셔 넣었다.

 

 "아, 이러고 있는 게 나은 것 같아."

 

 정환이 힘없이 고개를 벽에 기댔다. 한참이나 앉아서 꼬리만 흔들던 바둑이는 낯선 집안을 탐색이라도 하는지 좁은 원룸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걸을 때마다 살랑이며 흔드는 꼬리가 얄미웠다.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털이 열 가닥씩은 빠져 공중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여유가 넘치는 걸음으로 좁은 원룸 안을 몇 바퀴나 돈 바둑이는 난방이 제일 잘 되는 침대 앞에 자리를 잡았다. 몸을 길게 늘리며 기지개를 펴더니 느릿하게 앉았다. 양쪽 코를 휴지로 틀어막고 있는 정환이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진짜 집주인이 따로 없고만.”

 

 정환은 느리게 눈만 깜빡이고 있는 바둑이를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았다.

 

 '최택'과 '고양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정말로. 고양이는커녕 제 몸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허우대‘만’ 멀쩡한 최택에게 고양이는 과분했다. 신발 끈도 못 매고, 심지어는 젓가락질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니까.

 

 "고양이 밥이나 제대로 챙기나 몰라."

 

 하지만 푹신한 방석 같아 보이는 바둑이의 모습은 아주, 매우, 굉장히 잘 먹은 것 같았다.

 

 "목욕은 제대로 시키나. 쟤가 힘으로 이길 거 같은데."

 

 그러나 만져볼 수는 없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바둑이의 윤기나는 털은 꽤 사랑을 받은 티가 났다.

 

 "참나, 지 몸은 못 챙겨도 고양이는 잘 챙기나 보네."

 

 지는 맨날 약이란 약은 다 달고 살면서. 야, 좋겠다, 넌. 정환의 눈이 질투심으로 가득 찼다. 아, 개 부럽다. 진짜. 고양이로 사는 게 낫겠어, 차라리. 홀로 중얼거리던 정환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노래 가사 하나가 스쳐 지났다. 하루만 너의 고양이가 되고 싶어, 워후 베이베. 정환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터져 나온 정환의 웃음소리에 바둑이가 고개를 돌렸다. 노란 눈동자가 정환을 향했다. 매서운 눈동자가 정환을 노려보았다. 정환이 입을 꾹 다물고 마른침을 삼켰다. 정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던 바둑이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정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필시, 최택이 바둑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바둑이가 최택을 키우는 것이었다. 아, 그럼 교제 허락은 바둑이한테 받아야 하나? 정환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양쪽 콧구멍을 휴지로 틀어막은 정환이 멍한 표정으로 바둑이를 바라보았다. 야옹, 정환의 집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바둑이가 울음소리를 냈다. 갑작스러운 울음에 정환이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야옹, 바둑이가 다시 한 번 울었다. 바둑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눈만 깜빡이던 정환의 눈동자가 문득 바둑이 뒤로 보이는 사료로 옮겨졌다.

 

 "배고프냐, 너?"

 "야옹."

 

 정환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바둑이가 한 번 더 울었다. 배고프구나. 정환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 씨."

 

 얼마나 쭈그리고 앉아있었는지 몸을 일으키자 다리가 저렸다. 검지에 침을 묻혀 코 위에 발랐다. 정환의 검지가 혓바닥과 코 위를 몇 번이나 왕복했다. 상체를 숙여 다리를 주물렀다. 으아, 한참이나 다리를 주무르던 정환이 앓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걸음을 옮기려던 정환이 순간 멈칫했다. 멀리 떨어진 이 자리에서도 눈알이 빠질 것처럼 재채기가 멈추지 않고 나오는데, 저기까지 가면. 가만히 멈춰 서 고민을 하던 정환의 눈과 바둑이의 노란 눈이 마주쳤다. 밥 줘, 노란 눈이 말했다. 정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진짜. 한참을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던 정환이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두 주먹을 쥔 채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서서히 사료 봉지로 향했다. 다섯 걸음 만에 사료 봉지에 손이 닿았다. 푸헤엣취! 콧구멍에 쑤셔 넣었던 휴지가 빠졌다. 빠른 속도로 사료 봉지를 집어 들곤, 사료 봉지를 들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숨을 참고 넓은 걸음으로 다시 신발장 옆으로 돌아왔다. 다시 휴지를 말아 콧구멍을 틀어막았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곤 싱크대 위에 사료 봉지를 올려두었다.

 

 "일회용 그릇."

 

 작게 중얼거린 정환이 손을 들어 찬장을 열였다. 신라면, 안성탕면, 짜왕, 짜왕, 짜왕 그리고 짜왕. 일회용 그릇은 없고 라면만 가득했다. 에이씨, 정환이 찬장 문을 닫고 싱크대 아래 문을 열었다. 허리를 숙여 깊은 안까지 구석구석 살펴보지만 역시나 마땅한 그릇이 없었다. 한참을 가만히 서서 갈등하던 정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깨끗하게 씻긴 채 엎어져 있던 제 밥그릇을 꺼내들었다. 한참 동안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밥그릇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정환이 사료 봉지를 들어 사료를 쏟았다.

 

 "집도 모자라서 밥그릇까지."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어. 정환이 고개를 저었다. 사료가 수북이 담긴 그릇을 들고, 휴지로 막은 코 위를 다시 한 번 손으로 부여잡고는 바둑이의 앞으로 다가갔다. 허리를 숙여 바둑이의 앞에 사료가 담긴 밥그릇을 놓아주었다. 정환의 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바둑이는 정환이 밥그릇을 놓고 저 멀리 멀어진 뒤에야 내려놓은 밥그릇으로 다가갔다. 또다시 신발장 옆에 쭈그려 앉은 정환이 팔짱을 끼곤 천천히 사료를 먹기 시작하는 바둑이를 바라보았다. 배고팠냐. 역시 바둑이는 정환의 말은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밥그릇에 머리를 박고 고개를 들 줄 모르는 바둑이를 보며 정환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최택 고양이 아니랄까 봐. 아주 하는 짓이 똑같네."

 

 내가 부를 때는 대답도 잘 안 하더니, 지가 필요하니까 대뜸 찾아오고. 너는 내가 말걸 때는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내가 차려준 밥은 머리를 박고 먹는다, 아주. 숨 안 막히냐. 그냥 밥그릇으로 들어가지 그러냐. 푸엣취. 그러다 머리 끼어서 안 빠지면 어떡하냐. 그렇게 맛있냐. …혹시 너네 주인이 너 굶겨? 쉴 새 없이 말하던 정환이 간지러운 코를 비볐다. 정환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꼬리까지 흔들어가며 먹는 바둑이를 보며 정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걔가 너 굶기고 그럴 애가 아닌데. 솔직히 너네 주인 엄청, 아니 멍청할 만큼 착하지 않냐? 나한테는 세상 제일 가는 나쁜 애긴 한데. 남들한테는 엄청 착한 애잖아.이야, 넌 좋겠다. 최택이 너 엄청 좋아해 줄 거 아니야.

 

 "…나도 최택 엄청 좋아하는데."

 

 근데 걘 내가 지 좋아하는 거 모를걸. 눈치 드럽게 없는 새끼. 처음에 걔 봤을 때 진짜 예뻤다. 넌 안 그랬냐? 우리 과에서 제일 예쁘다고 소문난 여자애들보다 더 예쁘더라. 아니 제일 예쁘던데. 정환은 고개를 뒤로 젖혀 신발장에 기대며 말을 이어갔다.

 

 "오티 뒤풀이였거든, 그때가."

 

 교수님도 낀 자리라 진짜 어수선했어. 나도 신입생이라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가만히 있고. 게다가 자리 선정도 잘못해가지고 교수님 앞인 거야. 아 진짜, 망했다. 그 생각만 계속하면서 교수님 설교에 멍하니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데 누가 들어오더니 내 옆에 와가지고 앉더라. 한참 고개만 끄덕이다가 옆에 딱 봤는데. 와, 진짜. 웬 천사 같은 애가 내 옆에 앉아있는 거야. 아니, 나는 진짜 천사가 내려왔다, 뭐 그런 얘기 진짜 다 뻥인 줄 알았거든?

 

 근데, 진짜 있는 얘기였어. 웬 천사가 하나 앉아있었다니까. 나 진짜 얼굴 보고 그러는 애 아닌데. 진짜로, 너무 예쁘더라. 얼굴도 예쁜 게 하는 짓도 예쁜 거야. 교수님 말씀하시는 거 들으면서 하나하나 웃는 표정으로 다 반응하고, 예의도 바르고, 공손하고. 자기 밥도 못 먹으면서 옆에 챙기고. 근데 생각해보면 젓가락질을 못 해서 못 먹은 거 같기도 하고. 하도 못 먹길래 내가 걔 그릇에 고기 몇 개 얹어줬는데 웃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 근데, 와, 나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다. 너무 예뻐가지고. 입 오물오물거리면서 이름이 김정환, 맞지? 이러는데. 그거 듣자마자 술 다 깼어, 좋아가지고. 내가 집도 데려다주고 싶었는데, 지도 남자라고 여자 동기들 데려다주더라고. 매너도 좋아.

 

 "하, 완벽한 새끼."

 

 그러고 나서 나랑 최택이랑 시간표 네 개나 똑같아가지고 내가 얼마나 환호를 질렀는지 아냐. 진짜 행복했다. 거의 일주일 내내 붙어 다니고. 마주 앉아서 학식도 먹고. 도서관에 나란히 앉아서 공부도 하고. 나 태어나서 학교 가는 게 기다려지는 건, 이십 년 평생, 그때가 처음이었다.

 

 "…최택 여친 생기기 전까지는."

 

 웃음기 가득하던 정환의 얼굴이 일순간 어두워졌다.

 

 누가 알았겠냐, 그렇게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붙어 다니는데 나 몰래 여친 만들 줄. 여자친구 생기더니 마주 앉아서 학식 먹을 때도 여친이랑 전화. 도서관에 나란히 앉아서 공부할 때도 여친이랑 카톡. 툭하면 나한테 여친 얘기하고, 상담하고. 그때마다 학내 식당이고 도서관이고 다 부수고 싶었다, 진짜. 그래서 바로 입대 신청했다. 군대 갔다 오면 마음도 접고 달라질 줄 알고. 근데 제대했는데도 여전히 예쁘더라. 제대하고 제일 기분 좋았던 게 뭔지 아냐? 그 여자애랑 헤어진 거. 좀 못된 거 같지? 근데 진짜 좋았던 걸 어떡해.

 

 "그래서 결국엔 원위치됐잖아."

 

 최택이랑 같은 수업 듣겠다고 몰래 시간표 알아내서 똑같이 짜고, 피 터지게 수강신청하고, 나만 실패하면 또 며칠 동안 밤새우면서 그 수업 잡겠다고 대기 타고. 최택 혼자 실패하면 드롭하고는 신청 못한 척하고. 레포트 붙들고 낑낑대는 거 마음 아파가지고 도서관 가서 밤새 자료 준비해서 슬쩍 보여주고. 시험기간에 모르는 거 있으면 다 가르쳐주고 싶어가지고 코피 쏟아가며 공부하고. 최택 소개팅한단 얘기 있으면 며칠을 밥도 못 먹고. 주선자 멱살 잡을 뻔한 게 몇 번인지. 어쩌다가 손이라도 닿으면 설레서 잠도 못 잤다. 손도 못 씻었어, 이틀은.

 

 "푸엣취! 너네 주인은 이런 내 마음 알고나 있냐?"

 

 휴우, 정환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 최택 존나 좋아서 죽을 거 같은데 나 어떡하면 좋냐, 바둑아. 정환이 두 손을 얼굴에서 떼며 바둑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제 그 수북하게 담아준 사료를 다 먹은 건지 밥그릇에서 멀리 떨어져 바닥에 배를 붙이고 엎드린 채 잠이 들어있었다. 참나, 내가 누구한테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정환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어느새 시곗바늘은 열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 9시 55분. 눈을 반쯤 뜬 정환은 뻐근한 몸을 쭉 폈다. 방 한가운데서 잠들었던 바둑이는 늦은 밤이 되자 잠에서 깨어나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누가 고양이 아니랄까 봐, 완벽한 야행성이었다. 정환은 연실 터져 나오는 재채기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몸을 일으켜 신발장 위에 달린 거울을 보니 퀭한 두 눈에서부터 턱 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이 눈에 띄었다.

 

 "아, 바둑아."

 

 정환은 이마를 짚었다. 정환은 원룸 한가운데 엉덩이를 붙인 채로 앉아 여유롭게 꼬리를 흔들며 제 발을 할짝대곤 얼굴을 문지르는 바둑이를 노려보았다. 자신은 곰 한 마리, 아니 엄청나게 커다란 곰 열네 마리쯤은 등 뒤에 매달고 있는 기분인데, 원인을 제공한 바둑이는 너무나 상쾌한 하루를 열고 있었다. 등 뒤에 달린 거대한 곰 열네 마리와 태평하게 고양이 세수를 하는 중인 거대한 고양이 한 마리. 동물농장이 따로 없네, 따로 없어. 신발장 옆에 주저앉은 정환이 맥없이 벽에 고개를 기댔다.

 

 쾅쾅,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 몰려든 피곤에 기운이 잔뜩 빠진 정환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발 밑의 휴지 뭉치들을 발을 이용해 구석으로 밀어 모으며 현관문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세, 푸엣취, 누구세요? 코밑을 옷소매로 문지르며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밖에는 택이 한 손에 도넛 박스를 든 채 서 있었다. 놀란 정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코밑을 문지르던 손길을 멈췄다. 인사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는 정환을 향해, 택이 멋쩍게 웃었다.

 

 “안녕.”

 

 정환은 말없이 눈만 껌뻑이며 서있었다. 덩달아 한참을 말없이 서있던 택이 입을 열었다. 많이 피곤했지? 그제야 정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택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들, 들어와. 겨우 정신을 차린 정환이 여전히 코밑을 옷소매로 막은 채 옆으로 비켜섰다. 택이 현관으로 들어서며 바둑아, 하고 불렀으나 바둑이는 택이 서있는 곳을 한번 슬쩍 쳐다본 채 다시 세수에 열중했다. 택이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맞다.“

 

 바둑이가 앉아있는 곳으로 향하려던 택이 걸음을 멈추곤 뒤로 돌았다. 택의 동그란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정환이 놀라 몸을 뒤로 뺐다. 이거. 택이 정환의 손을 잡아 자신이 들고 있던 도넛 박스를 쥐여주었다. 고마워서, 이거 사 왔어. 택이 정환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정환의 아랫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고, 고, 고마워, 잘, 잘 먹을게. 정환은 말을 갓 배운 어린아이처럼 더듬거렸다. 귀가 화끈거리며 달아오르고 닿았던 손이 욱신거리는 듯했다. 택이 정환을 보며 웃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제야 뻣뻣하게 굳어있던 정환도 코밑을 가린 옷소매 뒤로 몰래 미소 지었다.

 

 

 "고마워, 진짜. 다음에 내가 꼭 밥 살게."

 

 현관문이 닫혔다. 하루 동안 거실을 지키고 앉아 정환을 괴롭히던 털 뭉치는 집으로 돌아갔다. 푸엣취! 그러나 집안에는 아직 바둑이의 털이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멍청하게 현관문 앞에 서있던 정환이 흘러나오는 콧물에 코밑을 닦았다. 눈만 깜빡이고 서있던 정환이 몸을 돌려 창문으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문 밖을 내려다보자 택의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자꾸만 웃음이 나서 입술을 꾹 물었다. 택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 몰래 손을 들어 작게 흔들었다. 갑자기 택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정환이 수줍게 흔들던 손을 급하게 등 뒤로 숨겼다. 정환을 올려다본 택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머뭇거리던 정환이 등 뒤로 숨긴 손을 다시 꺼내 어색하게 흔들었다. 택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택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창문을 열어둔 채로 창문 옆 침대에 벌러덩 엎드렸다. 침대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옆으로 돌리자 책상에 올려둔 도넛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도넛. 최택이 준 도넛. ‘최택’이 준 도넛. '최택이 준' 도넛. 웃음이 터지려는 입술을 꾹 물곤 침대에 고개를 묻었다.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정환의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정환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참고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최택 존나 좋아.

 

 

 미안. 정환은 어색하게 웃던 택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좁은 원룸 한가운데에 바둑이가 '또' 앉아있었다. 그리고 신발장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자신. 열흘 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꿈인가. 정환은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푸엣취! 꿈이 아니다. 바둑이는 '또다시' 정환의 원룸 한가운데에 앉아있었고 자신은 '또다시' 신발장 옆에 구겨져 쪼그려 앉아 끝날 줄 모르는 재채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정환은 간지러운 코끝을 문질렀다. 늘어지게 하품하던 바둑이가 정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흥미가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바둑이를 따라 고개를 돌리던 정환의 눈이 택이 자신의 손에 들려주었던 쿠키상자에 닿았다. 택의 손과 맞닿았던 손도 한번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귀 끝에 절로 열이 몰렸다. 정환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최택이 예쁜 탓일까. 아니면 예쁜 최택에게 홀라당 빠진 자신의 탓일까.

 

 아니, 사실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택의 손과 맞닿았던 손끝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으니까!

 

 정환은 웃음이 새어 나오는 입술을 억지로 꾹 다물곤 휴지를 돌돌 말아 코에 쑤셔 넣었다. 입술을 깨물어도 터져 나오는 웃음 때문에 코에 넣었던 휴지가 거센 콧바람에 튕겨져 나와 바닥에 나뒹굴었다. 정환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바둑이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뭐? 정환이 입을 벙긋거리며 바둑이의 눈과 시선을 맞췄다. 푸엣취! 또다시 말간 콧물이 인중 위로 흘렀다. 휴지를 뜯어 콧물을 닦았다. 푸엣취! 한번 터진 재채기는 멈출 줄 몰랐다. 정환은 휴지를 말아 콧구멍에 쑤셔 넣었다. 지긋지긋한 털 알레르기. 멈출 수 없는 재채기. 지긋지긋하지만 멈출 수 없는 짝사랑. 지긋지긋한 털 알레르기와 멈출 수 없는 재채기에도 다시 집 안으로 고양이를 들인,

 

 "아, 김정환 호구다, 호구야."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짝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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