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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바다를 건너는 항해에 비유하는 이들이 있다. 인간은 태어나 누구나 배 한 척과 노를 갖게 되고 그것들에 몸뚱이 하나를 내맡긴 채 삶이라는 바다 위를 유영한다고도 한다. 물론 모두가 다 제 손으로 노를 저어서 나아가지는 않는다. 모터를 달고 있어 조종을 필요로 하는 배를 가진 자는 바다를 헤쳐 나가는 일이 좀 더 수월하다. 대부분은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 보통의 부모님과 대외적으로 봤을 때는 문제없는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쪽 편에 비유할 수 있겠다. 크기도 클뿐만 아니라 조종을 하는 사람까지 따로 부리는 자의 배도 존재했다. 언제든지 예측과 상관없이 불시에 인생 위를 시커멓게 뒤덮는 나쁜 기후도, 그 기후가 밧줄처럼 옭아매어 잡아당기고 일으켜 놓은 높은 파도가 두렵지 않은 사람들. 아예 그런 게 존재하는지조차도 모르는 이들. 배를 움직이게 하는 출처에는 하등 관심 없는 자들. 팔이 빠져라 작은 배에 몸을 의지해 노를 저어가고 있었는데 당신의 큰 배가 일으킨 물보라가 내 배 옆을 지나갔다고. 그렇게 해서 나를 침몰 시켰다고. 정환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택은 비웃었다. 어차피 그 낡은 배로 멀리 가지도 못 했을 것이라고. 차별과 우열이 존재하는 시대에 태어난 건 네 팔자라고. 그렇게 첫째 날은 깐죽대다가 뺨을 얻어맞는 거로 끝났다. 아주 칠흑 같은 밤이었다. 걷힌 구름이 마치 지우개라도 된 양 하늘에 있어야 별까지도 모두 지워낸 밤. 눈을 떠도 감아도 똑같이 새카맣기가 이를 데 없는 그런 밤.

 

 

 

 

 

 

 

 

 

 

 

上.

 

 

 

 선고공판이 있기 바로 며칠 전에 정환은 아버지를 면회하러 갔었다. 나오는 길에 우연히 만난 변호사에게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 전날까지 아무렇지 않게 잠자리에 들었고 다음 날이 되어서도 막힘없이 밥이 술술 잘 넘어갔다. 법정에 선 아버지가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기 전까지 심지어 정환은 안색마저 좋았다. 공판이 끝난 후 나라에서 정해준 기간까지만 목숨을 연명하게 된 아버지의 말로에 관한 이야기가 곧 여기저기로 퍼져 나갈 것이다. 기자들에게는 아마도 여고생을 강간 후 살해한 1급 살인범, 이미 세상은 그를 버러지만도 못한 새끼라고 불렀다. 카메라 플래시가 세간의 눈총처럼 법정을 나서는 아버지에게로 쏟아진다.

 

 언젠가는 자식을 낳고 길러 낸 한 아이의 아버지가 법의 심판에 귀속되어 자유를 완전하게 나라에 빼앗기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그런 아버지를 끝까지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제 뿌리와도 같았던 아비가 저리 무력한데 기둥이라는 아들이 성할 수 있을까. 법정이 텅 빌 때까지 앉아있던 정환은 나가자마자 즉시 화장실로 뛰어가 그날 아침에 먹은 것들을 죄다 게워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위장은 경련을 일으켰고 쓴 물이 나올 무렵부터 정환은 울고 있었다. 선고를 듣자마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것들이 지난날의 속앓이를 떠올리게 했고 배를 욱신거리게 하고 있었다. 시간이 꽤 오래 지난 지금까지 잘도 참았다. 응어리진 감정이 가진 특유의 냄새 같은 게 있다. 누구나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고 그 냄새는 자기 자신만이 맡을 수 있다.

 

 정환에게도 내재되어 있다가 오늘 그것이 냄새를 풍겨가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악취를 참지 못하고 결국 그는 모조리 다 쏟아냈다. 아비가 지은 죄에 대해 사람들이 입에 올리며 힐난하는 걸 들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면회 갈 때마다 줄곧 아버지는 무죄를 주장해왔고 정환도 아버지가 결백하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지금 토해낸 건 믿었던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 가져온 감정의 잔여물일까. 아니면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딱지를 달고 살아야 할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가져온 메스꺼움 때문일까. 무엇보다 살인자의 아들에게 미래란 게 있을까. 살아온 해가 고작 열아홉이다. 태연한 척하기에는 어린 나이다. 어른이 되다 만 아이, 정환의 속은 이미 검게 그을었다.

 

 항소를 할 생각은 없었다. 최종 판결을 받기 전부터 이미 결정된 사항이었다. 항소심을 위해서는 변호사에게 돈을 더 지불해야 했지만 그럴 사정이 되지 못 했다. 국선 변호사들도 그들의 사연을 들어주는 듯했지만 항소를 해도 이기기 어렵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정환아, 그 돈으로 차라리 대학을 가거라. 최종 선고를 받은 후에 처음 면회를 갔을 때 아버지가 정환에게 한 말이었다.

 

 “그 돈 다 해도 대학에 못 가요, 아버지.”

 

 “넌 머리가 좋으니까 장학금이라도 타면….”

 

 “살인자 아들한테 어느 대학이 장학금을 줘요? 그것보다 입학은 시켜줄까요? 그것도 알 수가 없는데요.”

 

 들릴 듯 말 듯, 미안한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고개 숙여 이야기하는 아버지를 향해 정환도 어느덧 그들처럼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힐난하는 사람들과 같은 말투로. 원망이 만들어 낸 커다란 얼룩이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아버지, 죽이지 않았다면서요. 그날의 일을 되짚어 보고 정말 죽이지 않았느냐 되묻는 부질없는 대화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다른 일을 해야 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작고 초라한 배를 소유했고 그 배마저 아비가 감옥에 갔다는 이유로 부서졌다. 살인자의 아들은 인생이라는 항해 길에 있어서 거의 반파되다시피 한 배를 끌고 가야 한다.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두 배 이상은 더 열심히 노를 저어야 했다.

 

 “아버지, 죽이지 않았어. 정말이야.”

 

 “그래요. 죽이지 않았겠죠.”

 

 자리에서 일어난 정환이 죄 없는 입술을 깨물었다. 선고 공판 때는 말 한마디 없었던 사람이 철창 안에서 이렇게 얼굴을 마주할 때면 죄가 없다고 입이 마르도록 이야기하곤 했다. 그 말을 판사 앞에서 했었어야 해요. 이 말을 그는 겨우 목구멍으로 넘겼다. 여기를 나가면 아마 그날처럼 구토를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이제 면회 그만 올게요.”

 

 “…….”

 

 “전화도, 하지 마세요.”

 

 “정환아.”

 

 “안 들을 거예요. 안 볼 거예요.”

 

 이 두꺼운 창살 바깥에서 아버지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갇힌 사람이 알 리가 없었다. 그에 반해 정환은 앞으로 아버지가 살인자라는 아주 큰 족쇄를 차고서 살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 도태되지 않으려면 자기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는 아무것도 한 적 없으나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집에 와서 예상한 대로 토하고야 말았다. 아버지를 향한 미움이 인처럼 박힌 말들을 토해냈다. 어미 고양이는 새끼가 세상 속에 섞일 수 있도록 다 자라기도 전에 품에서 내보낸다고 한다. 돌봐줄 어미가 없어서 길을 잃고 헤매다 벼랑 끝까지 온 새끼 고양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벼랑 아래로 뛰어내리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죽어버리면 되는 것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알 수 없는 곳에서 애타게 어미를 찾는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정환은 언제 죽으면 좋을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

 

 

 

 차도에서 다가오는 차를 보면 피했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고 오는 길에 했던 다짐들은 깡그리 잊었다. 생존에 대한 욕구는 상당히 본능적이고 동물적이었다. 정환은 평소보다 전투적으로 밥을 먹었고 맹렬하게 위험 요소를 피해 다녔다. 언제 죽으면 좋을지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를 매일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은 채로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형편, 별 볼 일 없는 집안. 거기다가 아버지가 범죄자가 되고 감옥에 들어간 후부터는 앞으로의 인생이 더 바닥을 치리라는 걸 정환은 알고 있었다. 그저 가난한 것에 불과했던 지난날과는 달랐다. 실제로 대낮에 세상 밖으로 나가 땅에 두 발을 딛고 서면 체감할 수 있었다. 대학을 갈 수 없게 돼서 구하게 된 일자리에서는 며칠 지나 퇴짜를 맞곤 했다.

 

 어디서 소문이 나돈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대부분 그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금세 눈치챘다. 대놓고 범죄자의 아들을 채용할 수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훑어보는 눈초리에서 전해져 오는 말들이 정환에게는 환청처럼 들렸다. 명백했다. 그는 하지도 않는 일로 비난받고 있었다. 시선이 칼같이 들이밀고 들어와 난도질하면 나자빠진 정환은 일어설 수 없었다. 피를 흘리고 누워있었지만 그 누구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기신기신 지친 몸을 끌고 들어와 집에 눕힌 채 아버지가 사다 놓은 소주를 축냈다. 빈속에 소주를 한 병 정도 들이붓고 나자 술에 취하기는커녕 정신이 번뜩 들어 변기를 붙잡고 울었다. 수압 좋은 수도를 틀어 놓은 양 콸콸 토해서 속을 비우고 나서 깨달았다. 바닥보다 더 아래로 고꾸라졌음을. 평범한 모습의 세속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어도 실은 이 몸뚱이가 있는 곳이 나락임을.

 

 누워서만 시간을 보낸지 이틀째가 되었다. 돈이 없어 보일러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아 전기장판으로 겨우 냉기를 면하던 집구석에 드디어 전력마저 끊긴 모양이다. 온기를 찾으려고 몸을 꿈틀거리는 이 순간조차도 순전히 살아야겠다는 의지 때문인 것을 알아 그는 울고 싶어졌다. 그의 몸을 받친 채 우그러진 전기장판이 바스락거리며 정환을 대신해 칭얼거렸다. 동이 터오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 뻔했지만, 반지하 골방의 네모진 창에 향한 무의미한 기대감이 있어 그날은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흔드는 바람에 눈이 떠졌다.

 

 온 방 안이 새카맸다. 정환을 깨운 누군가는 눈 주위에 둥그렇게 윤이 났다. 동룡이었다. 아빠 다리를 하고 앉은 그는 정환의 머리꼭지에 대고 쉴 새 없이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전기가 끊길 정도가 됐는데 왜 말을 안 해, 병신아. 그가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켜자 그 조막만 한 불에 눈이 부셨다. 오랜만에 보는 인조 광에 나방처럼 달려들었다. 캄캄함을 닮은 일생을 가진 자라 빛에 목이 말랐다. 추위에 몸이 얼어 부질없이 살고자 하는 욕망이 더운 기를 찾아서 먹이를 앞에 둔 굶은 개처럼 침을 흘린다. 일어나 앉는 그에게 동룡은 우유 한 팩과 종잇장을 하나 내밀었다. 우유만 받아들여 다급하게 허기를 달래는 정환의 앞에 동룡은 종잇장을 더 적극적으로 들이밀었다.

 

 “이게 뭔데. 안 보여, 씨발.”

 

 정환은 그가 가져온 종이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우유 팩을 탈탈 털어가며 한 방울이라도 더 쥐어짜 내려고 애를 쓸 뿐이었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조악한 조명에 의지해가며 동룡은 종이에 적혀진 것들을 읽어 내려갔다.

 

 “이름 최 택, 나이는 스물넷. 직업은 학생. 군 제대하고 지금 복학해서 공부에 매진하고 계시고.”

 

 “무슨 얘기하는 거야?”

 

 “현재 법학과에 재학 중. 가족 관계 무남독녀. 최무성 판사의 고명 아들.”

 

 “…….”

 

 “되갚아줘, 정환아.”

 

 “뭐를 어떻게.”

 

 “괴로움이 뭔지. 힘든 게 뭔지 되갚아주고 돌려주라고. 걔는 그런 거 평생 뭔지 모르고 살았을 텐데. 니가 지금 느끼는 것들 다 그 판사 하고 판사 아들한테 돌려주란 말이야, 등신 새끼야.”

 

 입 밖으로 꺼내 본적도, 누구에게도 드러내 본 적 없이 숨기면서 살아온 삶을 한꺼번에 동룡이 끄집어냈다. 타인이 나열하는 어느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그를 앞에 둔 채 뭐 하는 놈인지 참 불쌍하게 산다 싶어 안쓰럽게 여겼는데 보아하니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더라는 이야기.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도 잠자리에 들 아이에게는 차마 들려줄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런 슬픈 이야기였다. 정환이 그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듯해서 동룡은 그를 조금 돕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자신은 전기세를 낼 수 있는 정도의 신세는 되었다. 최소 제 아비는 살인자로 옥살이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친분만큼 구질구질한 것들도 함께이고 가야 한다는 게 친구에 대한 류동룡만의 해석이다.

 

 저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정환이 그 깊은 뜻을 알 리 만무하다. 명치에서부터 미어져 올라오는 흰 우유의 비린 잔여물이 역류하기에 삼킬 뿐이다. 지금 느끼는 이 역함만큼을 그들에게 되갚아 주려면 자신은 비린내 나는 이것들을 얼마만큼이나 삼켜야 할까. 일단 정환은 동룡이 사는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1인 이상 거주할 수 없다는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동룡은 정환에게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지내면 문제 될 게 없다고 했다. 외부에 딸려 있는 욕실로 샤워하러 갈 때, 부엌에서 라면을 끓이려고 물을 올릴 때 고시원을 관리한다는 총무라는 사람과 마주치긴 했지만 별말이 없었다.

 

 함구된 존재, 그래도 그는 편하게 위아래 치아를 맞부딪쳐가며 라면 줄기를 씹지 못 했다. 언 바닥과 불이 들어오지 않는 방보다야 눈칫밥을 먹어도 살기가 훨씬 나았다. 낮에는 공사판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몸을 쓰고 고시원으로 돌아와 꺼진 매트리스 옆에 난 작은 자리에 웅크린 채 까부라지듯 잠을 잔다. 돈을 버느라 움직이고, 밥을 먹고, 숨을 쉬고.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것들을 하고 나니 나뭇가지 같은 몸에 금세 살이 붙었다. 동룡이 말하기를 택은 키가 크고 그렇게 작은 덩치는 아니라고 했다. 붙들어두려면 기력을 올려야 할 것이라고. 팔자가 꼬여서 지금 현실이 너무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한 순간부터는 도마뱀 꼬리 같았던 삶에 대한 의지가 조금 소강했다.

 

 어느덧 자연스럽게 변해 있었다. 그냥 죽어버리면 편할 텐데 죽으면 안 되느냐고. 먼지가 쌓인 것처럼 뿌연 눈동자를 들어 바라보며 묻자 동룡이 멱살을 잡았다. 아저씨, 사람 죽이지 않았어. 죽은 놈이 높으신 분 자식새끼라 그냥 화풀이 그릇이 된 거다. 그저 그 근처를 지나갈 뿐이었던 아버지는 돈 많고 지위 높으신 양반들이 고급스럽게 토악질하는 분노를 받아내는 함지박일 뿐이었다고. 다 내뱉어서 꽉 채워졌기에 그 함지박을 이제는 깨뜨리려 할 뿐이라고. 잘 꼬아진 동아줄에 덜렁 목이 매달리는 팔자가 된 것은 순전히 만만해서, 우스워서. 혹은 털어봐야 티끌도 하나 나오지 않을 만큼 가진 게 없는 거지새끼에 불과해서.

 

 

 “왜 가진 게 없어. 내가 있는데.”

 

 “그냥 제물이야, 느그 아버지. 판사가 돈 받아 처먹은 다음에 돈 많은 놈들한테 갖다 바친 거야.”

 

 “교수대에…. 제물을 올렸어?”

 

 “……. 이런 말해봐야 무슨 소용 있냐. 너 그냥 가만히 있는 꼬락서니도 못 봐주겠기에 내가 이러는 거니까.”

 

 “…….”

 

 “나 니네 아버지한테 신세 많이 졌다?”

 

 집에서 나온 후로 육체는 좋아질지언정 정신은 형극의 길 위를 나뒹군다. 정환은 밥풀이 엉겨 붙은 해장국 그릇을 숟가락으로 긁어댄다. 박박, 덜그럭. 세상의 크고 작은 소리 중 일부,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고 애꿎은 그릇과 숟가락이 서로 비벼지며 나는 소리로 동룡의 귀를 막았다. 너무 격렬하게 박동하는 심장이 가슴뼈를 얼마나 두드리는 건지 욱신거림을 참을 수 없어 정환은 마른 입술을 말아 물었다.

 

 산 자들의 위안하기 위해 끌려 나간 제물에게도 여지를 줘야 했다. 왜 아무도 아버지의 억울한 속내를 들여다보지 않았나. 심지어 아들인 저 조차도. 가지 않겠다고, 전화도 않겠다고 했던 날을 떠올리며 정환은 피우던 담배 필터를 질겅질겅 씹었다. 사실 그날 보다야 더 생각이 많이 나는 건 아버지의 얼굴이긴 했다. 자고 일어나서 곧장 떠오르면 찬물로 세수를 해 그것을 떨쳐냈다. 오늘도 그랬다. 잇자국이 남은 담배꽁초를 바닥에 뱉어내고 주머니에 손을 넣자 절그럭거리며 유리병이 울어댄다. 나 여기 있소. 나를 써주오. 어디서 구해왔는지 동룡이 전해주며 말한 것들을 되짚는다. 손수건에 묻혀서 쓰면 돼. 금방 증발하니까 그 새끼 보이는 즉시 해야 돼. 실수로 떨어뜨려서 깨 먹고 하지 마라.

 

 “이렇게 하면 너도 공범이야. 알아?”

 

 “우리 아버지, 아니 아비. 사기 쳐서 도박으로 빚내고 나 아무것도 모르는데 빚쟁이들한테 머리채 잡히고 할 때 나 몇 살이었게? 어차피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사고나 치면서 컸을걸.”

 

 그때 동룡은 겨우 일곱 살이었다. 빚도 빚이지만 동룡의 아버지와 정환의 어머니가 살을 섞고 눈이 맞아 도망갔다는 건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다. 하나같이 붙어 다니는 둘을 볼 때마다 수군거렸으니 모르기가 더 어려웠다. 비위도 좋지, 어떻게 둘이 저러고 다녀. 불가피하게 맺어진 형제들끼리 머리를 맞댔다. 마음이 약한 아버지가 배가 등딱지에 붙을 만큼 쫄딱 굶어서 죽어가던 어린 동룡을 거둔 선함이 낳은 증거들이 이렇게 불거져 나온다. 세상의 도마 위에 오른 아버지는 살인자, 하지만 둘에게는 세상에 다시없을 좋은 사람. 추워서 손이 곱아들 지경에 이르렀을 무렵에 정환은 보았다.

 

 노란 가로등 조명이 만든 그을음과도 같은 그림자 뒤에 숨어 있는 제 옆을 스치는 그를 만난다. 동룡에게 받았던 사진 속의 사람과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그의 뒤로 따라붙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밥을 굶어 본 적이 있느냐고, 동파가 풀렸지만 마실 수조차 없을 정도로 차가운 물에 몸을 씻어 본 적이 있느냐고. 아니면 살인자의 아들로 사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아느냐고 물어야 할까. 택의 입가에 동룡이 준 마취제를 묻힌 손수건을 들이대고 팔로 사슴처럼 곧게 뻗은 목을 감아서 조였다.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게 맞는 건지 뒤에서 받치고 있는 그의 몸이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아무리 내뱉어도 입김과 함께 찬 공기가 삼켜버려 전하지 못한 말들을 이제는 물어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나는 당신을 만나서 무엇을 물어보려고 했었던가.

 

 

 

-

 

 

 

 동룡과 거처하던 고시원에는 작은 TV가 하나 있었다. 날이 궂어서 비가 오거나 눈이라도 오면 공사판은 일감이 떨어졌고 그런 날이면 하루 일당을 공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날이었고 그 후로도 정환은 줄곧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싫어하게 됐다. 그날도 비가 와서 하루 일당을 날린 그런 날, 갈 곳도 마땅치 않아 고시원 방에 혼자 있으면서 정환은 일을 하러 간 동룡을 기다렸다. 아버지가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 일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건 그가 흥신소에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요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유세를 떨길래 술을 먹여 만취하게 해놓고 물어봤더니 순순히 동룡은 흥신소에서 일을 한 지 제법 됐노라고 털어놓았다.

 

 그간 심심찮게 그는 정환에게 택의 행적에 대해서 알려주었고 그 이야기의 말미에는 꼭 사진이 따라붙었다. 보지도 않을 거면서 틀어 놓은 TV는 연신 쉬지 않고 나불거렸고 정환은 그 소리를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무심결에 서랍에서 꺼내어 본 택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훑어보던 와중에 정환의 시선이 TV 화면에 머무른다. 시시껄렁한 옛날 영화를 방영해주던 방송국에서 납치해서 감금한 자를 고문하는 장면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인화된 사진 한 장에서 웃고 있는 택과 그 장면을 번갈아 보던 정환은 그를 만나면 해야 될 질문들에 대해서 그때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다. 질문에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저렇게 당신을 괴롭혀야 할까. 그랬었다. 하고자 하는 질문은.

 

 “당신을 어떻게 망가뜨려야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까.”

 

 동룡의 말대로 공사판에 나가 몸을 써서 체력을 만들어 둔 게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정환도 몰랐다. 산 중턱까지 마취약을 들이 마셔 기절해 있는 택을 들쳐 업고 기어오르는데 희한하게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공기를 등에 업어도 이것보다 가볍지 않으리라. 이상하게 들떠서 쉬지 않고 단번에 그곳까지 올랐다. 이곳의 위치를 알아 두느라 여러 차례 산을 올라서인지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지경이 돼서야 여기에 택을 데리고 오게 됐다. 조력자가 알아봐 준 적절한 장소, 해가 잘 들지 않아 눈이 와서 쌓여도 좀처럼 녹지 않을 산 중턱에 허물어져 가는 낡은 집. 그전에도 생각했지만 불행의 온점을 찍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때마침 그 전날 눈까지 와주었다. 오르내리기가 더욱더 험해졌다. 묶어둔 그가 눈을 뜨자 정환은 흰 얼굴 앞에 그가 처한 지금의 위기와 질문을 들이밀었다. 택에게는 난데없었지만 정환에게는 꽤나 지금까지 생존해 오고자 했던 본능을 일으킨 것에 대한 근본을 찾는 질문이었다.

 

 “당신, 뭐야.”

 

 “뭐긴 뭐야. 사람이지. 지금 처한 본인의 처지를 생각해서 질문을 바꿔 봐. 내가 기회를 줄게.”

 

 지금 본인의 처지라 하면 두 손과 두 발이 의자에 묶여 있다는 것과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뺨과 코 끝이 붉어질 정도로 춥다는 것쯤. 낯선 사람인 척하는 정환이 실은 낯익은 얼굴이라는 것도.

 

 “나, 당신 본 적 있어….”

 

 “응. 그렇겠지.”

 

 “집 앞에 편의점.”

 

 “그거 되게 오래 전이야. 근데 법대 다닌다며? 명문대라더니 진짜 머리가 좋긴 한가보네.”

 

 “나 여기 왜 데려 왔어.”

 

 “반말 하지 마. 내가 너보다 나이 많아.”

 

 “지금 납치되어 와서 이렇게 두 손, 두 발이 꽁꽁 묶여 있는 사람한테 좋은 대우를 바라?”

 

 “와, 똑똑한 데다가 입도 살았어. 그리고 자기가 납치됐다는 걸 이렇게 빨리 알게 될 줄은….”

 

 솔직한 심정으로 정환은 감탄했다. 본인의 처지를 이렇게 빨리 깨달을 거라고 생각 못 했다. 아주 등신이 아니고서야 대충 둘러보기만 해도 감금과 납치같이 영화에 나올 법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누구라도 알 수 있겠지만. 날씨가 춥고 바람이 차서 얼굴이 희고 붉을 뿐이지 지금 이런 꼴로 붙들려 있는 일, 솔직히 택은 별로 괘념치 않는다.

 

 “나 이런 적 또 있었어. 어렸을 때.”

 

 “뭐 때문에 그랬는지도 알아?”

 

 “아버지.”

 

 “그래, 당신 아버지 진짜 인생 좆같이 살았나 봐. 이게 다 그 증거야. 최 택이 지금 납치되어서 산간 어딘가에 낡은 오두막에 붙잡혀 있고 납치범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게!”

 

 가끔 이렇게 감정을 제어하기 힘들 때가 있다. 살인자의 아들이니 죽어서 너는 그냥 지옥에 가라고 해도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힘들 때. 잔뜩 억울한 얼굴로 저를 보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주로 그랬다. 정환은 묶어 놓은 택의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꺾으며 그동안 입 밖으로 내지 못 해서 가슴 한편에 응어리가 된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 답답할 때는 벽을 보고하는 것에 불과해서 늘 명치끝을 짓누르고 있던 그 무거운 말들을 한다. 너희가 우리를 침몰 시켰다는 말에 택이 이죽거리며 비웃길래 손이 저절로 올라갔다. 그의 표정은 약간 날이 서있었고 그걸 보고 있자니 고개가 갸웃거리게 될 정도로 묘한 기분이 들어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쳤더니 거스러미가 일어난 택의 메마른 입술이 갈라지며 피가 솟았다. 입술을 말아 물고 난 그가 피가 섞인 침을 정환의 얼굴에 탁 하고 뱉는다. 순간 눈을 질끈 감았는데 갑자기 날아든 침이 광대뼈에 맞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들이 며칠 집에 들어오지 않는데 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고 택이 말했다. 그게 정환이 바라는 바였다. 네 아비가 나타나면 그 눈앞에서 네가 죽던지 내가 죽던지 둘 중에 하나는 죽겠지. 정환이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어느 무리들은 몹시 그 순간이 몹시 간절할 것이다.

 

 

 

 

 

 

 

 

 

 

 

 

下.

 

 

 추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낡은 오두막에서 낯섦을 이부자리 삼아 잠을 청할 시간이었다. 정환은 가져온 모포를 택에게 덮어주었다. 그동안 고시원 온돌 바닥 위에서 잠을 자며 사치스럽게 수면을 취한 날은 고작 며칠이었다. 그는 냉골에서 자는 게 익숙하다. 그 사이 택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고개를 이리저리 저어가며 연신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다 겨우 입술이 정환의 살갗을 스치면 때를 놓치지 않고 물어뜯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물려주었다. 고작 잇자국을 내는 것으로 막을 내린 택의 궐기에 또 한 번 손찌검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뺨이다. 주먹보다는 손바닥. 동룡이 찍어온 사진에서 보았던 택은 세상천지를 들판처럼 뛰어다니며 배가 고파오면 언제든지 풀을 뜯고 마른 목을 축일 곳이 어디라도 있어 목마름을 모르는 사슴 같았다면 지금은. 분노는 감정 중에서도 이염이 가장 빠르다. 덫에 네 발이 다 묶여서 헝클어지고 몸부림치는 꼴이란. 얼어 죽고 싶으면 계속 그 지랄해.

 

 사냥감을 목전에 둔 포식자는 절대 눈에 띄게 화를 표출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고 나자 지쳤는지 택은 조용해졌고 정환은 맨바닥에 누웠다. 불어오는 바람에 계절이 이파리를 태운 나뭇가지가 휘어지며 몸을 떨었고 불안에 떨고 있는 택은 그 나뭇가지보다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간간이 덜그럭댔다. 산속의 고요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미성숙한 소음들을 밤새 자장가처럼 들으며 정환은 선잠에 몸을 묻는다. 반지하 방보다 산속이 아침을 맞이하는 게 빠르다고 느끼는 건 남다른 일조량 때문이었다. 오두막은 간밤의 추위에 진저리 치며 구갈이 난 사람처럼 햇볕을 들이마셨다. 정환은 눈을 감고 있어도 어둡지 않아서 좋았다. 얼어붙은 듯 굳은 관절을 움직여 그가 몸을 일으키는 동안에도 택은 눈을 뜨지 않았다. 닫힌 눈꺼풀 주위가 약간 푸르뎅뎅하기에 불안해져서 그의 코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지만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무릎까지 흘러내린 모포를 보며 다시 끌어올려 덮어준 정환은 장소를 옮기기로 한다. 이대로 있다가는 얼어 죽기 딱 좋았다. 만약 죽을 수밖에 없다면 동사만큼은 아니었으면 했다.

 

 잠에서 깬 택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연고도 모르는 곳에서 얼어 죽거나 정환의 손에 험한 꼴을 당한다든지 하는 결말이 아니라 온전하게 살아서 따뜻한 집 안으로 돌아가는 결말이었으면 한다. 남들은 다 나쁜 놈이라고 말하는 그 사람이 그저 가족들에게는 한 가정의 가장이고 한 사람의 아버지에 불과함을 알아줬으면 한다. 가방을 뒤지며 뭔가를 찾고 있는 정환을 택은 가장 기초적이며 생물학적인 동정심에 호소했다. 물고기가 살 수 있고 돌아갈 곳은 물뿐이다. 뭍에 올려진 채 아가미를 애처롭게 헐떡이는 심정으로 노심초사하며 택은 그렇게 정환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일어서 돌아보았고 손에 들려있던 목줄은 곧 택의 목에 채워졌다.

 

 “개새끼야, 풀어.”

 

 “개줄 달고 개새끼라고 하는 게 볼만 하네.”

 

 “내가 왜 이걸 묶고 있어야 되는데.”

 

 “그럼 여기서 우리 같이 얼어 죽을까?”

 

 정환이 되묻자 택은 함구했다. 의자에 끈으로 동여매서 고정해 놓은 발목을 풀자마자 그가 걷어차려고 하기에 정환은 코웃음을 치며 잡아채고 동룡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손에 휴대폰을 들었지만 한 팔, 다른 손 하나만으로 너끈하게 아무 문제없이 택의 두 발목을 다 붙들었다. 족쇄처럼 저를 매달고 발광하는 동안 옆구리를 몇 대 얻어맞긴 했지만 돌덩이처럼 언 몸은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 했다. 여기가 너무 추워서 오래 버틸 수 없다며 다른 장소를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하고 통화를 마치자마자 정환은 택을 겁박해서 판사의 전화번호를 따냈다. 동룡이 메시지로 보낸 곳의 위치를 확인하러 그를 혼자 두고 산속을 돌아다니는 동안 정환은 그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납치범이며 당신의 아들을 잡아두고 있고 요구 사항을 정해서 다시 전화할 테니 경찰에 신고하면 당신의 아들을 살아서 만날 수 없을 겁니다.

 

 자기소개를 하는 것만 같았다.

 

 우리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이이긴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 인척은 할 수 없어 그저 이렇게만 전할 뿐입니다. 나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가면 너머의 나를 당장 내보일 수 없음에 탄식합니다.

 

 사실 정환은 택을 별로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른 머물 장소를 핸드폰으로 전해 받으며 동룡이 인질을 혼자 두는 건 너무 나태한 게 아니냐는 잔소리를 했지만 한 귀로 흘렸다. 어차피 택은 도망갈 수 없다. 계획을 바꿔 외려 정환은 그를 풀어줄 수도 있었다. 정말로 죽일 생각이라면 말이다. 어디인지 알 수조차도 없는 산속, 쌓여서 단단히 뭉쳐져 있는 눈더미, 날이 밝아도 해를 충분히 머금을 수 없도록 저마다 먼저 나서서 손을 뻗어 산을 에워싸고 있는 흉물스러운 나뭇가지들. 계절이 이파리를 모두 태워버린 후였다. 산을 오르기 전 초입에서 출입 금지를 표시하느라 둘러 놓은 테이프를 뜯어가며 들어온 지금 산중은 한 겨울에 시달리며 지독한 감기를 앓고 있다.

 

 재채기를 하며 차갑고 거친 숨을 내쉬고 한밤중이 되면 오한으로 온몸을 떨며 마른 나무뿌리를 꼬집는다. 고통에 차 나무가 헐떡이며 소름 끼치게 우는소리를 들으며 정환은 여기까지 뺨 두 어대에 공포를 느끼는 게 눈에 보였다. 삶에 미련이 많은 사람처럼 보였던 그는 아무런 대책 없이 오두막을 벗어날 사람이 아니었다. 다시 돌아와보니 예상대로 택은 여전히 사지가 잘 결박되어 있었다. 그래도 정환의 얼굴을 보자 택은 도주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비췄다. 묶인 손발을 이리저리 흔들며 시끄럽게 덜컹대기에 그는 목줄을 손에 감아쥔 채 풀어주고는 일으켰다. 달아날 기세로 택이 뛰려고 들자 정환은 얼른 쥐고 있던 목줄을 당겼다. 콜록거리며 돌아보는 붉어진 얼굴에 원망이 뚝뚝 떨어진다.

 

 “내가 호구 새끼로 보여?”

 

 “하아, 후…. 너 금방 잡힐 거야.”

 

 “잡히면 좋겠어?”

 

 “그래야 내가 살지!”

 

 “내가 잡혀도, 안 잡혀도 너는 살아.”

 

 “뭐?”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회지도층의 자녀로 태어나 남들보다 쉽고 별 굴곡 없이 편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택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될지 미리 알아서는 안 된다. 신이 그렇게 정했다. 빈부 여부와 본인이 위치한 사회계층의 여부 같은 세속적인 것들과는 관계없이. 정환이 아버지가 살인자로 몰려 죽을 처지가 되고 어미도 없이 천애 고아가 될 줄은 몰랐던 것과 같이. 그로 인해 불현 듯 택이 납치를 당해 이런 고초를 겪게 될 걸 몰랐던 것처럼. 이렇게 살라며 팔자를 점지해 준 신이 아니라면 앞날을 알아서는 안 된다. 정환은 택의 이 이후에 겪을 일들에 대한 계획을 미리 귀띔해줄 이유가 없다. 그를 가엽게 여긴 신이 그리해보라며 준 기회였다. 신이 유일하게 허락한 공평함을 충분히 누리고 싶었다. 나는 알지만 너는 모르는 이 시간 이후의 너의 날들, 지금만큼은 정환이 택의 현신이어야 한다.

 

 

 

-

 

 

 

 일러준 대로 거처를 옮긴 그날 밤부터는 조금 아늑해진 장소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바람이 덜 새어 들어왔고 한기에 놀라서 눈을 퍼뜩 뜨는 일도 없어졌다.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면 택은 여전히 정환의 손에 자유를 속박당한 채였고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자신을 찾기 위한 경찰의 움직임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정도. 수색의 기미 하나 없이 함께 지낸지 나흘째가 되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며 정환이 먹을 걸 구하러 다니는 사이 택은 소리도 질러보고 팔다리를 묶고 있는 끈을 풀어 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어찌나 단단하게 묶은 건지 팔뚝에 동여맨 끈은 몸부림치는 택을 비웃듯이 점점 더 살갗에 파고들 뿐이었고 인적은커녕 산짐승도 돌아다니지 않는 겨울의 산자락은 그의 비명을 배불리 먹으며 엄동설한을 나는 듯했다. 이틀째 되던 날, 음식을 먹이려 드는 정환의 손가락을 물었는데 아랑곳 않고 그는 제 입에 뭔가를 쑤셔 넣었다. 처음 맛보는 타인의 체액이란 농도가 짙었지만 비리지 않았고 산뜻하다고 느낄 지경이었다. 그래도 적의 체액이다. 입에 물려준 음식과 함께 보란 듯이 뱉어냈더니 여지없이 뺨 세례가 날아들었다. 피가 섞여 떨어진 빵 조각을 보며 정환이 택의 두 볼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는 으르렁거렸다.

 

 “한 번만 더 이딴 짓 하면 떨어진 거 쳐먹일 거니까 판단 잘 해.”

 

 날 것이라곤 하나도 돌아다니지 않는 줄 알았더니 짐승이 이렇게 눈앞에 있을 줄이야. 음식을 뱉어냈다는 이유로 정환은 그날 하루는 택을 굶겼다. 다음 날부터는 타협을 거부하는 정신과는 상관없이 빈 뱃속이 소리를 내며 날뛰길래 택은 얌전히 그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목줄을 감기는 순간 느꼈던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자존감이 두 동강이 나 갈라지며 왔던 심중의 고통도 이제는 좀 덜 해졌다. 사흘 째 되는 날, 정환은 택의 목줄과 팔다리를 묶고 있는 결박을 풀어주었다.

 

 손목과 발목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중력을 받는 순간이 어색하긴 했지만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택은 이대로 도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정환에게 붙들렸다. 그것도 머리채를. 씻긴 씻어야 할 거 아니냐며 그의 감시 하에 씻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디선가 장작들을 구해다가 익숙하게 방에 불을 땠고 대야에 한가득 퍼다 나른 물을 데웠다. 타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몸에 물을 끼얹고 닦아내는 건 감정을 미묘하게 일렁이도록 만들었다. 씻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느슨해진다. 더운 김으로 뿌옇게 찬 오래된 아궁이가 있는 비현대적인 낡은 부엌, 정환은 줄곧 문가를 지키며 언제 뛰쳐나갈지 모를 택을 지켜본다.

 

 “그만 좀 쳐다봐.”

 

 “내가 쳐다보고 싶어서 쳐다보는 줄 알아?”

 

 “나 아무것도 안 입었어. 이 꼴로 어딜 도망 가.”

 

 “경칩 지나서….”

 

 “어?”

 

 “날씨 많이 풀렸어. 춥긴 하지만 그래도 좀 덜 해. 자꾸 툴툴거리면 전에 거기로 다시 옮길 거니까 군말 말고 씻기나 해.”

 

 “오늘 며칠이야?”

 

 “3월 8일.”

 

 정환의 말에 택의 시선이 자연스레 부엌간에 난 작은 창문을 향한다. 전에 살던 사람이 아마 환기를 위해 뚫어 놓은 작은 구멍에 불과하지만 지금은 그게 택에게는 세상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손바닥 두 개 합쳐 놓은 정도의 조그마한 크기가 지금 택이 볼 수 있는 세속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해가 넘어가고 난 후 새카맣게 밤이 덧칠해진 광경만이 볼 수 있는 전부다. 덧칠한 밤이라는 까만 종이 위에 구멍을 송송 뚫어 놓은 자리가 반짝이는 별이 된, 네모진 세상의 그림을 보며 택은 거품이 묻은 등에 물을 끼얹었다. 고작 며칠 차이인데 손바닥 뒤집듯이 달라진 사철의 변화가 놀라울 따름이다. 겨울이 이파리를 태워 만든 그을음의 냄새가 사라진 게 불과 오늘의 일이 아님을 정환은 택에게 알려준다.

 

 “오다가 뉴스 좀 봤어. 뭐…. 꽃이 언제 피니 이런 얘기도 다 나오고.”

 

 “내 얘기는?”

 

 “니 얘기?”

 

 판사의 아들이 납치되었고 납치범에게 연락까지 받았는데 어찌하여 항간은 이토록 조용할까. 멀찌감치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도 하나 없으니 택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 생각했다. 아무도 사라진 자신의 종적을 되짚어가며 찾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 새삼 슬퍼진다. 얼굴이 물기에 젖어 있어서 비통에 잠긴 꼴로 얼마든지 울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 닦고 옷을 갈아 입자마자 택은 자연스럽게 두 팔을 교차해 정환의 앞에 내밀었다. 고작 나흘뿐인데도 팔목이 제법 말라 있었다. 마른 장작개비 같은 택의 팔목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정환은 다시 끈을 감아 묶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살갗이 산을 오를 때 손바닥으로 짚어냈던 나무둥치의 껍질처럼 건조하다. 어쩐지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어 정환은 줄이 매인 자리를 괜스레 쓰다듬었지만 결코 택이 편해질 만큼은 풀어주지는 않았다. 묶어나가는 그의 느린 손짓이 촘촘하게 꼬아진 끈의 명주실을 헤일 듯하다. 정환은 더디게 움직였지만 여느 때보다 세게 택을 묶었다. 목줄조차 오늘따라 유난히 목을 조여온다.

 

 고개를 든 정환과 마주하는 시선까지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조금만 힘을 줘서 잡아당기면 끊어질 듯이 팽팽하다. 정환은 손이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택의 가슴께까지 올라갔던 손은 허공에서 잠시 휘청이다 그의 뺨을 쥐어낸다. 손찌검이 뭔지 알고 있는 몸이 움찔하고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정환에게는 이런 행위가 절실하다. 택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아주 명백한 거부의사 표시, 금세 목욕을 한 후라 그런지 더운 기가 남아있는 말랑한 살덩이가 손을 떠나자 그는 어쩐지 울컥하는 마음이 든다. 납치당한 주제에, 손발이 묶여 아무것도 못하고 목줄을 매어도 아무런 거부도 할 수 없는 입장이면서 분수도 모르고. 택의 몸 아래로 길게 늘어진 손잡이 줄을 정환은 감아쥐고서 제 쪽으로 힘껏 당겼다.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비틀거리며 바짝 붙은 몸뚱이에서 나는 비누냄새가 기분을 나른하게 만들어 그는 살짝 고개를 털었다. 그러는 사이 택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뭐가 날아들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준비. 이렇게 코 끝이 스칠 정도로 가깝게 붙어 서서 길들여짐으로 나약해진 택은 솔직히 뭐든 간에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만 봐.”

 

 “내 마음이야.”

 

 “떨어져.”

 

 “싫어. 그것도 내 마음이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뭐야?”

 

 “없어. 아무것도.”

 

 정환이 썼던 이 납치극의 시나리오 중에는 이런 상황은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하게 짜놓았던 계획대로만 움직였고 그렇게 나흘을 보냈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겨우 나흘, 그들에게는 하루가 십 년과도 같은 나흘. 머리와 손으로 기록해 낸 이야기들로 조작된 나흘이었다. 미리 생각해 둔 상황 외에 여태껏 벌어진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 수많은 계획 중에 택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항목도 역시 없었다. 다만 정환이 그를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내용만 명시되어 있다. 그가 그렇게 머릿속으로 정한 일이다.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택이 입고 있는 옷자락을 쥐고 있다가 놓은 정환이 내쉬는 한숨에 인고가 맺혀 있어서 그런지 무겁다. 참아야 할 것이라도 있다니 택은 정환이 부러웠다.

 

 잡아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지만 곧 함락될 것 같은 스스로를 받치고 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저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서로의 얼굴을 본다. 어제가 그제와 사뭇 다르고 오늘은 어제보다 더욱 다르다. 보는 눈길이 다르고 닿을 적마다 정환의 손끝에서 전해져 오는 느낌마저도 매일 달라서 혹여라도 그가 지금 느끼는 기분들이 묻을까 봐 택은 겁이 났다. 묻히는 순간 온통 그것들이 제 속에 가득 들어찰 것만 같아서. 묶여 있는 손으로 택은 줄을 쥐고 있는 정환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래. 나….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해줘.”

 

 목소리가 떨리는 건 벽에 난 네모난 구멍에서 흘러 들어오는 찬 기운 때문에 몸이 떨려서일까. 택은 입 밖으로 나오는 음성은 부엌을 정처 없이 떠돈다. 택의 손아귀에 손목을 내준 채 그때까지 말없이 서있던 정환은 다시 방에 들어갈 때까지 그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의 귀에 들어가긴 한 건지, 그저 걸리는 것에 그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마 부탁을 들어줄 모양이다. 목줄을 처음 차던 날의 심정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손잡이 줄을 잡아당기는 정환의 손 움직임이 거칠다. 목이 메어 기침을 하다 그대로 넘어져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찾지 않는 아비에 대한 원망으로 가족에 대한 신뢰를 잃었으며 뺨을 얻어 맞고 목욕하는 광경을 감시하는 타인의 눈초리 앞에서 아궁이에 지핀 불로 데운 물 한 바가지가 몸에 부어지는 순간 자존심이 씻겨 내려갔다.

 

 그동안 아무런 고민이나 걱정 없이 행복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가진 게 많아서 그랬을 뿐이다. 손안에 든 게 모래와도 같아서 언제라도 공중으로 날아가 버릴 것임을 알려준 이는 왜 아무도 없었는가. 빈 깡통 같은 허무함이 가슴을 두드려서 택은 지금 이렇게나 아프다. 택은 그날 잠 못 이루고 열이 끓어오르는 몸뚱이를 밤새 뒤척이며 잠을 설쳤다.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택을 보며 정환도 역시 쉽사리 눈을 감지 못 했다. 신열로 들뜬 육신을 감당하지 못해 앓는 소리를 내는 그가 버둥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걸 지켜보던 정환은 결국 택을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찰나의 몇 시간을 아주 오랜 세월인 양 느끼며 둘은 방 안에서 뜨겁게 밤 위를 걸었다. 자정을 한참을 넘겼을 걸로 가늠되는 시각, 문 위에 발라져 있는 창호지 위에 새파랗게 새벽이 번져가는 걸 깨달았을 때 이미 정환은 늦었다고 생각했다. 달아오른 그의 이마에 입술을 비비며 속삭였다. 날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지금 작게 건넨 이 속삭임을 해치길 바라며. 아직, 죽지 말라고.

 

 

 

 

-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개 목걸이의 손잡이 줄, 두서없이 엉켜있는 몸, 거뭇거뭇 해진 그의 눈 밑, 피곤함이 엉겨 붙어 있는 속눈썹 같은 것들과 함께 택은 엉켜 있었다. 잠에서 깨어났어도 눈을 깜빡일 뿐, 잘게 쪼개어 내뱉는 호흡이 조심스럽다. 들이치는 햇빛이 만든 기다란 기둥을 피해 택은 정환에게 몸을 바짝 붙인다. 옭아매어져 자유롭지 못한 손을 겨우 들어 면도를 하지 못 해 까슬까슬해진 턱을 살짝 더듬었다. 갓난 아이를 다루는 모습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네들의 손길보다 부드럽게, 그렇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이 위험하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 심연에 내재된 경계심을 끌어올려 가능한 한 살그머니. 그는 택을 납치했다. 그들은 서로 적이다. 지쳐서 쓰러진 채 깊숙하게 잠에 몸을 묻고 있는 적의 얼굴은 어떠한가. 그의 팔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고 그의 마음은 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택은 침을 삼켜서 그런 건지 가벼이 울리는 정환의 목 울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웃을 수 있었다. 진심이 만들어낸 미소임을 인정하고 나자 적에 대한 적개심이 단숨에 사그라든다. 경계심마저도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떨군다. 묶여있는 팔이, 목에 매어진 개 목걸이가, 발을 붙들고 있는 줄로 그에게 귀속되기를 희망한다. 병으로 신음하던 몸에 찬 수건을 올리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오장 육부에 다 가뭄을 들게 할 것처럼 열이 오른 몸을 껴안아 비이상적이었던 간밤의 체온을 나눠가진 이. 택의 삶과 죽음을 관장했으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날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환은 그의 신이자 종교였다. 온몸에 감긴 그가 깨어나려는 건지 움찔거리는 게 느껴지자 택은 얼른 눈을 감았다. 가느다랗게 뜬 실눈만으로도 그의 뺨이 상기된 걸 정환은 알아볼 수 있었다. 모른 척하지 않기로 하고 한 손으로 쉽사리 잡히는 조막만 한 택의 뺨을 쥔다.

 

 “왜 자는 척 해.”

 

 “으음…. 일어났어?”

 

 부러 더 눈꺼풀이 무거운 듯 어색하게 연기를 하는 걸 보며 정환이 웃는다. 부자유스러운 손목을 들어 팔 안에 택은 그를 품었다. 어떻게 애를 써봐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얽혀 있는 손목이 이제 그는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동터오기 몇 시간 전, 가장 어두울 적에 맞붙어 있는 그들의 몸뚱이 사이로도 또 다른 신의 뜻이 스쳐 지나갔다. 가까이 있는 서로가 이렇게 부딪침을 고민하거나 망설이지 않게 된 오늘은 정환이 택을 납치한지 닷새째 되는 날이다. 애초에 정했던 계획들이 휴지조각이 되다 못해 티끌이 되어 정환의 정수리 위를 맴돌고 있다. 이렇게 바짝 붙고 안은 채로 있어도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고 느낀 순간 이미 정립되어 있던 것들은 파괴되어 그의 뇌 내에서 소멸했다. 파도처럼 택은 하얗게 밀려왔고 일순간 정환의 계획들을 덮쳤다. 어제가 전환점이었다. 어제 택이 몹시 아팠던 일, 어제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해달라는 말을 했던 일. 동룡이 당부했던 말 중에 그런 말도 있었던 듯하다. 아무 말도 듣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게 하라고. 재갈이라도 물렸어야 하나.

 

 야윈 얼굴을 보니 퍽도 어울릴 법하다는 생각이 든 정환이 소리 없이 웃는다. 의미 모를 웃음에 택도 따라 웃는다. 거울처럼 마주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닮아지고 싶어진다.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햇볕을 택의 등이 양껏 마시게 한 후에 정환은 일어섰다. 한 장소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오늘은 여기에서 벗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짐을 챙기는 중에도 볕 위로 몸을 뒹구는 택에게서 정환의 눈길이 떠나질 않는다. 그를 계속 따라갔다. 지금 우리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야 할 것 같아 골몰하고 있자면 양손과 발이 묶여 모로 누운 택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런 것들은 모두 잊는다. 먼지가 머금은 볕을 뒤집어쓴 그가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다가 들고 있던 물건을 가방의 엉뚱한 곳에 넣기도 했다. 짐을 싸는데 꽤 오랜 시간을 허비했고 해가 진 후에야 둘은 다른 거처로 떠났다. 정환은 택의 묶여있던 손과 발을 모두 풀어주었다. 목을 조이고 있던 개줄도 풀어서 모아둔 것들 위에 던져 버리고 쌓여있는 더미들 위로 석유를 뿌려 불을 붙인다. 머무른 장소를 떠날 때에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했던 동룡의 말만큼은 잊지 않고 있었다.

 

 이거라도 계획대로 하지 않으면 정말 엉망일 것 같아서 그것들이 타서 재가 되어 날리는 걸 끝까지 모두 지켜보고 난 후에 둘은 자리를 떠났다. 정환은 먹을거리를 구하러 다니는 동안 있을만한 장소를 봐둔 터였다. 오늘은 거기로 가자. 오랜만에 편히 움직일 수 있는 두 손과 두 발이 어색한지 종종 걷다가도 택은 비틀거리기도 했다. 고작 며칠일 뿐이었지만 여린 살갗에 들러붙어 있었던 탓인지 목에도 개줄 자국이 선명하다. 둘은 좀 더 높은 고도를 향해 올라가는 중이었다.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지면 위로 달은 더욱더 제 면적을 넓혀가고 있었다. 희고 검은 것들이 뒤섞이다 토해낸 길의 자욱들을 따라 둘은 한참을 걸었다. 점점 올라갈수록 산세는 험해졌고 정환의 손에 붙들려 뒤로 쳐져서 걷던 택의 폐부가 기어이 쌕쌕하고 쇳소리를 내며 커져가는 부피를 주체하지 못해 헐떡인다.

 

 “정환아, 하…. 잠깐만. 좀만 천천히.”

 

 “천천히 가고 싶은데, 나도….”

 

 이틀 전, 먹을 걸 구하러 민가에 내려갔다가 듣게 되었다. 전국구에 최 무성 판사의 아들을 찾는 벽보가 나붙었고 경찰이 총력을 다 해 그를 찾기 위한 수색을 하고 있다고. 민가 인근의 작은 구멍가게에서 본 보도 내용이었다. 마을 몇몇 사람들이 조그마한 21인치 브라운관 TV 불에 나방처럼 달라붙어서 그 뉴스를 듣고 있었다. 정신없이 대충 아무거나 사들고 올라오며 정환은 생각했다. 말하지 말자, 너를 찾고 있다고 전해주지 말자. 불필요한 동요를 일으켜서 일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산을 기어오르고 있는 지금, 이미 어그러질 대로 일은 어그러졌다. 달조차 어그러졌다. 오늘은 보름달보다 조금 기운 달이 뜬 밤이다. 둘을 둘러싸고 있어 줄만한 풀숲 하나 없는 길을 헤치며 걷는 걸음걸이마다 마른 땅 냄새가 솟아올라 그들을 추격한다. 밭은 숨이 고르게 변할 기미가 없는 택은 헉헉거리며 말을 채 잇지 못하는 정환의 손을 잡고 따라갈 뿐이다. 왜 이렇게 급하게 가. 뭍을 밟게 된 그의 우리 안에서 살던 어린 짐승이 묻는다. 그가 주는 밥과 손길에 단 며칠 만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진 어린 짐승이 터져 오를 것 같은 가슴 한편을 움켜쥐며 물어온다.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우리 안에 것들을 모두 확실하게 태우고 돌아왔는지, 그때 피어오른 연기를 누군가 보지는 않았을지, 그네들의 모습이 발각되어 세상에 드러났을 때 미리 준비한 모든 처신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생각할 뿐이다. 자신을 잊고 있는 그를 향해 참다못한 택이 숨겨놨던 이를 드러낸다. 팔을 잡아당겼더니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꼭 뭐에 혼이 나간 사람처럼 돌아본 정환의 얼굴근육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새카만 눈동자 위에 박힌 달 모양을 한 점은 어지러이 파동을 일으킨다. 택은 정환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 차려, 김정환. 참으로 오랜만에 맞는 찬 바람에 지금 택의 의식 상태는 무척이나 또렷하다.

 

 “택아….”

 

 “알고 끌려가야 할 거 아니야. 어디 가는 거야. 어?”

 

 “넌 안 들려?”

 

 “뭐가.”

 

 “며칠 전부터 개 짖는 소리가 굉장히 크게 들렸어. 이 주위에서. 너…. 택아, 널 찾는 소리야.”

 

 “아무것도…. 못 들었다면서.”

 

 “민가 쪽으로 가보면 전신주마다 하나씩 네 벽보가 붙어 있어. 현상금도 걸려 있어.”

 

 “김정환, 나한테 거짓말 했어?”

 

 “그래서, 우리 도망가야 해. 택아.”

 

 “정환아, 내가 묻고 있잖아. 내 말에 대답해. 나 찾는다는 그런 거, 없었다며.”

 

 “빨리 가야 돼. 개 짖는 소리, 씨발…. 니 아비가 개랑 경찰들을 풀어서 너하고 나를 찾고 있다고.”

 

 “김정환.”

 

 “그러니까 내 말 대로 해. 다시 목에 줄 매고, 손발 다 묶여서 개 신세 되기 싫으면, 씨발!”

 

 택은 한 번 더 정환의 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아까보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더 날카로웠지만 이번만큼은 정환도 그의 손찌검을 피했다. 전신의 기력을 다 해서 자신을 뿌리치려 드는 택을 정환이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머리채를 잡는다. 면전에 당긴 택의 얼굴 위로 달과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딪쳐 뱉어낸 그림자가 얼룩덜룩하다. 그래도 온전히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고 지금 어떤 기분일지를 읽어 내려가는 것만큼은 짐승의 눈을 닮아 아주 또렷하게 잘 보였다. 정환은 며칠 이 산을 누비며 정말로 짐승이 되어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택아, 내가…. 미워? 아버지가 너 찾으러 오면…. 따라갈 거야?”

 

 “나한테 거짓말했어. 난 니 말만 믿었어. 아버지가 나를 찾지 않는다고 해서, 아버지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따라갈 거냐고. 열이 펄펄 끓는 너를 돌봐주고 밤새 살펴주고 안아줬는데….”

 

 “……. 그게 다 진심이었어?”

 

 택의 큰 눈동자가 울렁이고 있었다. 정환만큼이나 검었고 옅게나마 달까지도 떠있다. 울겠구나. 곧 이 눈에서 별을 쏟겠구나. 어젯밤, 감기 기운에 내내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하고 아이처럼 보채던 택을 안고서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정환은 생각했었다. 서로의 살결이 어디든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 채로 눈을 떠 오늘의 아침을 맞이했을 때 그는 이 납치극의 전말이 모두 뭉그러졌음을 인정했다. 택이 그토록 버티고 서서 붕괴시키지 않으려 했던 감정을 정환이 먼저 망가뜨렸다. 붙잡고 있는 사람은 정환이지만 매달리는 심정으로 그는 두 손으로 택의 양 볼을 움켜쥐었다. 함께 눈을 뜰 때보다 더욱더 가깝게 그를 두었다. 추운 날씨 탓에 정환은 날숨 때마다 하얀 입김을 뿜었고 그걸 들이마실 수 있을 만큼 바투 있으려니 바람을 머금어 차가운 택의 눈물이 그의 뺨에 묻는다.

 

 “다 진심, 진심이야. 전부, 다. 내가 한 행동들, 내 마음. 미워서 너를 때리고 좋아서 너를 안아주고.”

 

 “…….”

 

 “그러니까 도망쳐서 조금만, 조금만 더 숨어있자. 네 아버지가 너를 찾아도, 그래도 있잖아. 네 아버지한테 가지 마…. 너 원래 있던 자리로, 제발 가지 마….”

 

 곧 있으면 봄이었다. 한 밤에 산속의 갖가지 꽃나무들이 봄바람에 몸을 떨다가 견디지 못하고 떨구는 꽃잎들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그것들이 무덤을 이룬 자리를 밟을 때마다 나는 꽃 냄새가 얼마나 향기로울지. 전에 있던 그곳의 부엌에 나있던 창문으로 보이던 별들은 가까운 듯 보여도 손으로 만질 수는 없었지만 별을 흉내 낸 이 꽃잎들이 하늘 위에서 흩날리는 광경을 정환은 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도 언젠가 TV에서 본 기억이 있을 뿐이다. 동룡의 고시원에 틀어박혀서 비가 와 공사판 일을 허탕친 어느 날, 정환은 그의 침대에 누워서 자장가 같은 TV소리를 들으며 까무룩 잠이 들 뻔한 때에 반쯤 감긴 눈으로 어렴풋하게 본 듯도 하다. 이렇게 한없이 도망치고 도망치다 혹여라도 세상의 끝으로 가게 되어 아무도 찾을 수 없게 되면, 그때가 마침 봄이라면 정환은 지금 손안의 그와 함께 보고 싶었다. 계획 따위 개나 주라지. 말하기 싫어도, 듣기 싫어도 단둘뿐이라 하늘의 별 보다 더 많은 개수의 이야기를 나눴다.

 

 닷새의 도망, 어느 곳도 편히 못 다니는 그들은 허수아비였지만 심장이 달린 허수아비였다. 납치 전, 동룡에게 공수 받은 사진을 보며 정환이 제일 걱정한 게 있었다. 사내 놈은 사내 놈인데, 예쁜 사내 놈은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지. 그 사내를 손에 쥔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른 의미이긴 했지만. 택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혹시 잡히기라도 하면 이 손을 놔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둘은 다시 산행에 올랐다. 그런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민가에 간 것이지만 정환은 그날 일을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가지 말걸. 네가 배를 곯거든 내 살 이라도 뜯어서 먹일걸. 깊이 패도록 입술을 깨물자 피가 혀를 타고 입안으로 넘어온다. 불안함에 한 행동, 여지없는 뻔한 결과. 왜 내 앞날 같지? 분노에 의해 한 납치, 생각지도 못한 뻔하지 않은 결과. 이 흐름에 따른 미래에 대해서 정환은 가늠하고 싶지 않다. 꽤 멀찌감치에서 들려온다 싶었던 개의 울음소리가 이제는 택의 귀에도 들릴 정도가 되었다. 정환아. 택은 이름을 부르려 했는데 주책없이 울음이 쏟아져 나와 손바닥으로 입을 막는다. 그림자로만 뒤따르던 추적이 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택의 울먹이는 소리와 더불어 함께 정환의 귓전을 긁어내린다.

 

 심적 고통이 쥐어짜는 눈물샘을 찬 바람에 얼게 하고 정말로 짐승이 되어 날뛰기를 선택한 그는 걷기를 그만둠과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법의 심판대에 오르는 일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어 겁에 질렸기에 아무리 뛰어도 심장박동이 정환을 따라가지 못 한다. 온몸의 피가 제대로 돌지 않을 정도다. 마음만큼 두 발이 따르지 못하는 택을 아예 중도부터는 등에 업었다. 위로 오를수록 발 밑의 땅은 굴곡이 더욱 심해져서 넘어지기를 몇 번, 어느 순간부터는 다리를 삔 듯도 듯도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일어났다.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길이어서 그런지 뛰는 내내 어딘가에 찔리고 옷자락이 걸려 뜯겨 나갔다. 상관없어, 씨발. 짐승은 그렇게 제 피를 내주고 살을 발라 먹여 키워 낸 어린 짐승과 함께 밤을 헤치고 달아난다.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자신을 업고 뛰는 정환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훔쳐주고 택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속삭인다. 도망가, 더 멀리. 여기보다 더 먼 곳으로.

 

 자신들의 뒤를 밟는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당장 나가떨어지고 싶을 정도의 육신의 고됨이 정환의 어깨를 짓누른다. 목표점을 코앞에 두고 힘이 빠진 정환은 앞으로 고꾸라진다. 그에게는 지금 아버지의 무죄를 증명할 길도 그럴 권력이나 돈도 없다. 이러다가 택도 잃을 수 있다. 남들처럼 똑같이 태어날 때 빈손으로 태어났지만 물욕 따위 가져본 적 없으니 이 사람 하나라도 가지면 안 될까. 실로 택은 무척 오랜만에 인기척이라는 걸 들었다. 함께 있는 모든 곳을 점유하려 드는 타인들이 택은 영 반갑지가 않았다. 어쩐 일인지 낙엽 더미들 위에 아무렇게나 엎드린 채로 정환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답답해진 택은 그의 몸을 흔들었다.

 

 “일어나, 정환아.”

 

 김정환, 개새끼야. 여기까지 끌고 와놓고, 나를 네 앞으로 이만큼이나 당겨놓고 이제는 그만두려고? 이제는 택이 엎드려 있는 정환의 머리채를 쥐어뜯고 등짝을 긁어가며 애원한다. 제발 나를 그만두지 말라고. 그러는 사이 어두컴컴했던 산기슭 사방에서 드문드문 희고 노란 불빛들이 번쩍이며 둘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이 든 그 인공의 불들은 정환이 한밤중 가끔 잠을 이루지 못하다 머물던 곳 주위를 돌아다닐 때면 종종 볼 수 있었던 날짐승들의 눈과 엇비슷했다. 그들도 저 치들에게 곧 갈기갈기 뜯길 것이다. 수색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이들이 감추어져 있던 둘의 행방이 드러남에 흥분하여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리며 혀를 내보이려 한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좀 더 가까이에서 들리기 시작할 때쯤에야 정환은 몸을 돌려 누웠다. 여기서 너무 멀어 아무리 겉을 태워도 빛이 흐린 별들이 하나, 둘, 셋. 그들보다 조금 가까우며 아름다운 별이 택의 눈에서는 수만 개가 쏟아진다. 네 잘못이 아닌데. 그의 말대로 택의 아버지는 검사가 내미는 증거들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했을 수도 있다. 경찰 중 누군가 둘을 발견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소리를 듣자 정환이 몸을 일으킨다. 그때까지도 앉아서 울고 있던 택은 그에게로부터 눈을 떼지 못 한다. 그가 손을 잡아주니 택이 따라 겨우 따라 일어섰다.

 

 정환은 120시간 동안 납치범과 인질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영원히 아무도 몰랐으면 한다. 언제부터 그 의미가 퇴색됐고 왜 계획이 틀어졌는지 역시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원인이 불확실하면 결과 역시 불확실해야 앞뒤가 맞는다. 언제나 인과는 동등하다. 점차 거리를 좁혀 와 둘을 완전히 둘러싼 경찰들을 둘러보며 정환이 차고 있던 칼을 꺼냈다.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택의 목덜미 어디쯤에 개줄 자국이 남아 있는지는 알고 있다. 그를 납치해서 죽이는 게 정환의 계획 중에 있었던가. 아니, 전혀. 정환은 처음부터 택을 죽일 생각 같은 건 하지도, 해 본적도 없었다. 처음에도 그랬지만 돌려주고 싶은 게 있을 뿐이었다. 택을 앞세운 채 목에 칼을 들이대자 몰려온 자들의 소란이 일제히 잦아들었다. 정환은 말라비틀어진 겨울 산자락 위에 발자취를 남기며 민폐를 끼치는 그들을 정신없이 둘러보다 택에게 둘만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귓속말을 한다. 어쩔 수 없었다고. 방법이 없었다고 해.

 

 정환이 택의 몸을 돌려세웠다. 칼을 쥐고 있던 손은 떨궈져 있고 택은 그의 팔이 힘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본다. 바람이 불어서인가. 아니면 당신의 속내에서 뭔가가 당신을 흔들어 놓는가. 칼끝을 제 쪽으로 돌린 정환은 조금 웃는다. 다른 이에게는 정당방위, 택에게는 살인. 분노로 둔탁해진 감정에 날을 세워서 계획한 납치극의 말로는 이러했다. 그 긴 이야기 사이에 책갈피로 성애를 끼우는 예상 밖의 행위는 신이 한 짓인가. 택을 얼마만큼 망가뜨려야 행복할지 고민했던 지난날을 생각하고 있노라니 정환은 곧 배 언저리가 뜨끈해져 왔다. 그를 막상 이렇게 망가뜨리고 나자 불행의 낭떠러지에 선 기분이다. 이제 굴러 떨어지기만 하면 되겠네. 까치발을 들었고 몸을 기울였다. 그래도 칼을 쥔 손을 보며 그는 조금 더 웃었다. 정환은 그 손을 조금이라도 더 어루만지려고 버텼다. 몸 안의 피가 다 쏟아질 때까지 버티다가 차가워진 손끝이라도 괜찮다면, 택아, 나를 조금만 더 만져줘. 그날은 바람이 유난히 많이 불어 얼마 남지도 않은 낙엽이 휘적이며 함께 보고 싶어 하던 꽃비처럼 참으로 많이 쏟아졌다.

 

-

 

 정환아, 우리 안 돼? 택아, 우리 안 돼. 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늦봄까지는커녕 이만큼이라도 우리는 많이 왔어. 우리는 겨울까지만이야. 이 계절에 타서 재가 되겠지.

 

 우리는 안될 수밖에. 잊는 일은 더 안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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