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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시대의 흐름은 경성을 향했다.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덩굴처럼 얽힌 경성에는 모던보이와 모던 걸들이 넘쳐 났다. 일본인들이 근대 문물에 무지한 한국인들에게 근대 문물을 전파했으며, 얼마가지 않아 경성의 한복판에는 미츠코시 백화점이 자리했다. 밤이 되면 중절모를 쓴 사내들이 거리에 즐비했고 카페 안에는 흘러나오는 재즈 선율에 맞춰 춤을 추는 남녀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숨을 죽인 채 시대의 변화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은 모두 경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본 총독부 사령관 사카구치가 경성에 장시간 머무른다는 정보가 흘러 들어가자 그들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빠르게 경성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개중에는 김정환도 있었다. 김원봉에게서 사카구치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은 정환은 그의 동료 동룡과 경성으로 떠났다. 나라가 힘을 잃어가고 일본의 지배가 극심해졌다. 일본 간부들이 빠르게 유입 되는 경성에서 그들의 암살 작전이 누군가에게 흘러 들어가기 전에, 그들은 사카구치를 죽여야만 했다. 실패했을 때의 대안을 세울 시간 따위 없었다. 시간의 첨예함이 그들의 폐부를 찔렀다.

 기차가 경성 역에서 정거하고 정환과 동룡은 기차에서 내렸다. 손에 든 가방 고리를 단단히 고쳐 잡았다. 정환은 경성에 오기 전 들렀던 고향집에서 곧 돌아오겠다는 약속이 허울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미리 감지하고 있었다. 아마 돌아간다 하더라도, 눈 한 쪽을 잃거나 불구가 되어 돌아가겠지. 정환이 헛헛한 웃음을 터뜨렸다.

 정환과 동룡은 곧장 미츠코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미리 도착해 있던 또 다른 일행과 접선하기 위함이었다. 백화점 옆 좁은 골목에 들어서자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가 보였다. 정환은 그 사내에게 다가섰다. 사내는 정환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삼일 후 저녁 아홉시. 사카구치가 기방 밀회에서 머무른다. 밀회에 도착하면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건 밀회에 도착하면 알게 될 거다. 정환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옆에서 함께 말을 전해 듣던 동룡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사내와의 접선을 끝마치고 그 기방으로 향하던 길에 동룡이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사카구치가 남색을 밝힌다는 소문이 맞나보더이다. 동룡이 중절모를 고쳐 썼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정환의 미간이 구겨졌다.

 “자네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나?”

 “뭘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밀회에 유명한 기생이 하나 있네. 그리고 그 기생은 사내이고.”

 “사내 기생?”

 “밀회에 다녀온 사람들 사이에 자주 회자되는 인물이야. 꽤나 유명하더군. 남녀 가릴 것 없이 그 기생을 찾는다고들 해. 머리도 영특 하고, 문학에도 소질이 있는 것이. 황진이가 사내로 환생한 것이라고 말하네. 그리고 그 기생을 일컫는 단어가 하나 있다고 하는데.”

 정환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 떠졌다. 동룡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게 분명했다. 정환의 마음에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해어화.”

 순간 그의 등줄기에 낯선 쾌감이 스쳤다.

 

 

 

 

 

 

 

 

 기방 안에 재즈 선율이 울려 퍼졌다. 화려한 한복을 차려 입은 기생들과는 이질적인 음악이었다. 여기저기서 기생들과 사내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들렸다. 기생의 치마 밑에 들어가 괴상한 소리를 내는 사내는 물론이요, 술을 따르는 기생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기생의 목덜미에 서슴없이 고개를 파묻는 사내도 있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꽤나 음란한 풍경에 정환은 고개를 도리질 쳤다. 정환과 동룡이 방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을 때,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이곳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혹시 김원봉 선생님께서 보내신 분 들 이십니까.”

 여인이 말을 하며 한 떨기 수국 같이 웃었다. 손등을 반쯤 덮은 소맷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흰 손끝이 고왔다. 정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여인이 어찌하여 자신들을 알고 있을까 하는 당혹감에서 오는 표정이었다.

 “그렇습니다만.”

 당황한 표정을 한 정환 대신 동룡이 대답을 이었다. 동룡이 정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얽혔다.

 “그렇다면 이쪽으로 오시지요.”

 자신을 따라오라며 손짓하는 여인이 영 못 미더웠지만 정환과 동룡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그 여인의 뒤를 쫓았다. 세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기방의 소란함과 세 사람 사이의 고요함의 간극이 쪼개졌다.

 여인이 어느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따라오던 정환과 동룡도 걸음을 멈췄다. 여인이 뒤를 돌아 그들을 바라봤다. 붉게 물든 입술이 열렸다. 이곳입니다. 여인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정환과 동룡은 방 안으로 자리했다. 뒤이어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동룡이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 장식장 위에 얹었다. 곧 있으면 도착할거야. 그동안 편히 앉아 있지 그래. 바닥에 주저앉은 동룡이 제 옆자리를 두어번 두드렸다.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건지,”

 정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닫혔던 방문이 열렸다. 그의 고개가 문을 향해 돌아갔다. 문이 열린 곳엔 옷을 단정하게 차려 입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 한 명이 서있었다. 분명 몸은 성인이었지만 그의 말간 얼굴 어디에서도 성인의 향기를 맡을 수 없었다. 미동(美童)이구나. 정환이 낮게 읊조렸다. 은연중이었지만, 정환은 단번에 그 사내가 동룡이 말했던 ‘해어화’임을 알아챘다.

 “인사드립니다. 최택이라고 하지요.”

 듣기 좋은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환은 괜스레 제 손에 땀이 배는 듯 해 바지춤에 손을 문댔다.

 “이곳에서는 해어화라고들 부르덥니다.”

 택의 두 눈이 곱게 접히며 홀리듯 미소 지었다.

 

 택은 밀회에서 꽤나 유명한 남자 기생이었다. 흔한 말로들 미동(美童)이라고 불렀다. 어여쁜 사내아이의 얼굴을 하고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택과 잠자리를 갖기 위해 밀회를 찾는 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택은 쉽게 다리를 벌리지 않았다. 그저 입가에는 얇은 미소를 띄운 채 펜을 잡고 시를 써내려 갈 뿐이었다. 택은 자신을 찾아온 남자들에게 술을 따르며 시 한 편을 써주고는 그들을 전부 돌려보냈다. 택의 시를 받고 만족하여 잠자리를 갖지 않고 돌아가는 자들이 있는 한 편, 술에 잔뜩 취해서는 제 화에 못 이겨 택의 뺨을 때려 올리고서야 씩씩대며 돌아가는 자들도 많았다. 고작해야 남색 주제에, 값 비싸게도 구는구나. 기방의 주인은 그런 택을 보며 혀를 찼다.

 택이 그리 값 비싸게 굴음에도 불구하고 사내들은 다시 택을 찾았다. 순리였다. 택을 다시 찾는 자들은 대부분 꽤나 배웠다 하는 남자들이 많았다. 하룻밤 짧은 인연으로 스쳐 보내기에는 택의 글 솜씨가 뛰어난 탓이었다. 택의 시를 보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탄성 섞인 짧은 숨을 토해내기 바빴다. 해어화가 따로 없다. 이런 소질을 지니고서는 기방에 박혀 있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언젠가는 택을 찾아왔던 문인이 했던 말이었다. 이후로 경성 일대에서 택은 해어화로 불리며 이름을 떨쳤다.

 

 정환은 자신의 앞에서 웃고 있는 택을 말없이 바라만 봤다. 꼭 무언가에 홀리는 기분이었다. 계집도 아닌 것이, 꼭 계집을 보고 있는 기분에 들게 했다. 묘한 감정의 점철이 정환의 틈을 파고들어 균열을 일으켰다. 최택, 최택. 간결한 두 글자가 정환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정환을 바라보던 동룡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서있는 두 사람의 팔을 끌어 당겨 바닥에 앉혔다. 그리 서있지 말고 앉아서 얘기 하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정환이 택에게 다시 시선을 두었다.

 “혹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자네였던가.”

 “그렇습니다. 김원봉 선생님께서 제게 직접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두 분을 도와 달라고요.”

 “선생님이?”

 “선생님과 저는 일전에 알던 사이였습니다. 저희 아버지와 절친한 벗이셨고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저도 제가 이 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택의 말을 듣는 정환의 표정이 아리송했다. 뭉텅뭉텅 잘려 말하는 택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정환을 눈치 챈 것인지 택이 뒤이어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오래전 사카구치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택은 자신의 바짓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정환은 택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옴을 느꼈다. 제 아버지와 김원봉 선생님을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고 내려온 암살자라고 했습니다. 택이 말을 이어 갈수록 호흡의 시간이 짧아졌다. 바짓자락을 움켜쥔 택의 손에 핏기가 없었다.

 “제가 기생 일을 시작한건 사카구치가 남색을 밝힌다는 소문이 돌 때부터였습니다. 몇 년을 기다렸습니다. 제 이름이 사카구치 귀에 들어가길 기다렸죠.”

 택은 제 입술을 짓이겼다.

 “이제서야 시간이 도래한 것일 뿐입니다.”

 택이 숨을 크게 한 번 들이 삼켰다.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실패는 없을 것입니다.”

 정환과 택의 시선이 거칠게 얽혀 들었다.

 

 기한이 박도했다. 삼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암살 계획을 세우는 그들의 시간은 치열했으며 길었다. 택은 잠자리에 들기 전 호롱불을 켜두고 시를 써내려갔다. 얼굴과는 달리 투박한 택의 손을 보면 그간 택의 시간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택의 펜촉이 바쁘게 종이를 자극했다. 그 모습이 흡사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같이 수려했다.

 거사를 앞두고 잠이 오지 않아 잠시 밤공기를 쐬러 나온 정환은 택의 방에서 작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조심스레 다가가 문고리를 두들겼다. 택아, 자니. 밤이 되어 다 잠겨버린 정환의 목소리가 택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아직 입니다.

 “김형은 잠에 들지 않으시렵니까.”

 어느새 택은 정환을 김형으로, 정환은 택의 이름을 부를 만큼 서로가 편해진 둘이었다. 들려오는 택의 목소리에 정환이 아주 작게 미소 지었다. 잠이 오지 않아 그런다. 내 잠시 들어가도 되겠어? 정환이 택의 방문을 살짝 열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 정환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 택이 그에게 손짓했다. 밤공기가 찹니다. 택이 정환의 손을 붙들었다.

 “아직도 잠에 들지 않고 시를 쓰고 있었던 거야?”

 “어쩌면 제가 쓸 수 있는 마지막 시일지도 모르니까요.”

 하고 제 눈을 바라보는 택의 시선에 정환이 잘게 기침을 뱉었다. 택이 손에 쥔 펜을 고쳐 잡았다. 종이를 바쁘게 자극하던 펜촉은 어느새 멎었다. 정환은 택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떤 희망에 찬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온전히 서로를 바라보는 이 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자 정환은 목울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 약속 하나 하는 걸로 하자.”

 “무슨 약속 말입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살아서 다시 만나자는 말이다. 정환의 뒷말이 흐려졌다. 택의 눈가가 발개졌다. 붙잡은 손이 뜨거웠다.

 “있죠.”

 “…….”

 “김형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정환의 마음에 찬 바람이 일었다. 어쩌면 다시는 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속이 끓는 듯 했다.

 “택아.”

 “지킬 수 없는 약속이란 거 알지만 그래도 손가락은 걸어 보렵니다.”

 택이 정환의 새끼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은애한다. 목 끝까지 걸려 나온 정환의 진심이 차마 밖으로 뱉어지지 못하고 삼켜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김형 참 따뜻한 사람이라고 매 순간 마다 살갗으로 느꼈어요.”

 나 역시도 그렇다. 닿지 못하는 말이 계속해서 정환의 목울대에 걸렸다.

 

 날이 밝았다. 이제는 밤이 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정환과 동룡은 오차가 생기지 않게 계속해서 총을 손질했고 택은 사카구치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간 단정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화려하게 차려 입으니 어느 계집 못지 않게 어여뻤다. 그래, 어여뻤다. 예쁘다, 라는 단어만이 정환의 머릿속을 수놓았다.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있는 택에게 정환이 다가섰다. 택이 고개를 들어 정환을 바라봤다. 분칠을 했는지 분 냄새가 정환의 코로 흘러 들어왔다. 택의 체향과 섞여 미묘한 향을 만들어 냈다. 정환이 택과 시선을 맞추며 택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정환을 보는 택의 눈망울에 물이 고였다. 채 감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이 둘에게 들이 닥쳤다.

 “택아.”

 “…….”

 “정말…마지막이다.”

 호흡의 배열이 불규칙해졌다. 뜨거워진 숨을 토해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누구든 약해진다. 택이 정환을 말없이 바라보다 결국은 울음을 터뜨렸다. 정환의 말 한마디가 택의 마음에 사무치게 꽂혔다. 울지마라, 네가 울면 내가 이리도 약해지지 않느냐. 정환의 커다란 손이 택의 머리 위로 얹어졌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

 “한 번만, 안아보자.”

 택이 기어코는 소리를 내며 오열했다. 애써 곱게 단장한 것이 다 무용지물이 되었다. 제 머리 위로 얹어진 정환의 손을 맞잡으며 택이 정환을 제 품에 안았다. 어째서, 김형은 이리도 담담하십니까. 저는 이렇게나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은데. 울음 섞인 목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정환이 손을 내어 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약속하지 않았니, 살아서 만나자고.”

 “껍데기뿐이라는 것 잘 알지 않습니까.”

 “넌 꼭 살 수 있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단단한 정환의 음성에 택은 붙잡은 정환의 어깨를 더욱 세게 붙들었다.

 

 소란하던 기방 위로 고요함이 얹어졌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사카구치가 곧 도착할 터였다. 기방은 사카구치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모두 끝냈다. 정환과 동룡은 택의 방 병풍 뒤에 숨어들었다. 그 어떤 소리도 내서는 안되었다. 준비한 일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정환은 몇 시간 전 동룡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한 시간 안에 모든 일을 마쳐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 돌아 갈 수 있어.’

 한 시간. 한 시간 안에 제 목숨과 동룡의 목숨, 택의 목숨이 결정 된다. 중압감이 정환의 어깨 위를 짓눌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 시간이야. 생각을 곱씹었다.

 택은 사카구치를 맞이하기 위해 기방 문 앞에 서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사카구치의 도착을 알리는 기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택이 눈을 질끈 감았다. 긴장감에 입술이 잘게 떨렸다. 기방의 문이 열리고, 서양식 프록코트를 입은 사카구치가 들어왔다. 택이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사카구치를 향해 웃음을 흘렸다. 택을 보는 사카구치의 표정에 만족감이 서렸다.

 “네가 그 해어화냐.”

 “그렇습니다.”

 “듣던대로 미동이구나.”

 사카구치의 비열한 목소리에 택이 몸을 떨었다. 사카구치는 택의 목덜미를 느릿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네 시가 그렇게 뛰어나다고 들었다. 어디 한 번 읊어 보겠느냐? 목덜미를 만지작 대던 사카구치의 손이 택의 등허리를 타고 내려왔다. 병풍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정환은 그 광경을 차마 보지 못할 것 같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춘풍이 분다. 춘풍 따라 내 청춘도 흘러간다.”

 무얼 바라 나는 내 청춘을 춘풍에 맡겨 내는가. 택이 시를 읊었다. 사카구치가 빈 잔을 택에게 내밀었다. 택이 술병을 기울여 사카구치의 잔에 술을 담아냈다. 순간, 택이 들고 있던 술병이 날아가며 장식장에 부딪혀 깨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사카구치가 술병을 내던진것이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택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정환과 동룡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비췄다.

 “낯선이의 그림자가 가득하구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카구치가 택의 손을 거칠게 휘어잡았다. 모른다라. 사카구치가 택을 밀어 넘어트렸다. 빠른 시간에 상황 파악을 한 택은 넘어지는 순간에 제 소매춤에 감춰뒀던 소총을 꺼내들어 사카구치에게 겨눴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사카구치는 빨랐다. 총알은 사카구치의 뺨을 스치기만 했다. 총성이 방안에 울렸다. 정환은 무언가 잘못 되어감을 느꼈다. 정환과 동룡이 병풍 뒤에서 나옴과 동시에, 택의 방문이 열리고 총을 든 일본 군사들이 들이 닥쳤다. 지체하다간 다 개죽음이야. 동룡이 정환에게 말했다. 정환과 동룡의 총구가 사카구치를 겨눴다.

 “미개한 조선인들. 감히 날 암살하려 하다니!”

 사카구치가 소리쳤다. 택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병의 파편에 쓸린 팔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택의 총구는 사카구치가 아닌 일본 군사들을 향했다. 대치전이 이어졌다. 사카구치가 손을 들어 손짓했다. 정환은 방아쇠 위에 놓인 손가락에 힘을 줬다. 택이 소리쳤다. 김형, 지금입니다! 택의 목소리가 들리고 정환은 방아쇠를 당겼다. 단말마의 총성이 터졌다.

 일본군의 총알이 택의 심장을 관통했다. 빠르게 날아 들어오는 총알은 셋의 몸에 박혀들어갔다. 혈흔이 여기저기에 튀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모두가 예상했던 비극이었다. 정환과 택이 했던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 채 총성과 함께 허공에서 흩어졌다.

 정환이 바닥에 쓰러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제 옆에는 이미 숨이 멎은 택과 동룡이 있었다. 정환이 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둘의 손이 겨우 맞닿았다. 정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김형, 만약 우리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어떡하죠.’

 ‘그때는 바람이 되면 된다.’

 ‘바람이요?’

 ‘아무도 못 잡는 바람이 되어, 훨훨 날아가면 되는 것을.’

 꽃잎이 수북하게 쌓여 주저앉아 버린 그들의 청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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