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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환아, 이거 택이 좀 갖다 주고 와.”

 미란이 정환에게 까만 비닐 봉지를 건넸다. 꽤나 묵직한 느낌에 그 안을 살펴보니 큰 우유가 두 곽이나 들어 있었다. 아까 정환이 사 온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요즘 불면증 증상을 보이며 밤마다 우유를 두 잔 이상씩 마시는 형 정봉을 위해 아까 제가 사 온 것과 똑같은 우유 아닌가. 분명 집에 있던 우유가 동나서 사왔던 것이었는데, 이걸 또 택에게 갖다 주라니. 정환이 의아하다는 듯 미란을 쳐다보자 미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네 아빠가 방금 또 사오셨어. 아니, 사 온 건 좋은데 유통기한도 안 보고 사 왔더라고. 이틀밖에 안 남은 걸 어떡해. 바꾸기도 좀 그렇고. 그 중에 하나는 네가 사 온 거고, 하나는 아빠가 사 오신 거야. 유통기한 보고, 얼마 안 남은 거 먼저 먹으라고 해.”

 정환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집을 나섰다. 충분히 이유를 알겠으니 다녀오겠다는 의미였다. 왜 굳이 택에게 갖다 주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이면 골목길에 서서 우유를 입에 대고 꿀꺽꿀꺽 잘 마시는 택이니 이틀 안에 한 곽을 다 마시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끼익- 파란 대문이 열렸고, 정환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던 택이었다.

 

 “…정환아.”

 숨이 막힐 듯한 적막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환은 그 시간동안 ‘사고회로가 정지하다’라는 표현을 실감했다. 아무런 말도, 그 어떤 동작도 취하지 못하고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택을 바라보던 정환을 깨운 건 택의 목소리였다. 등 뒤에서 뿌옇게 연기가 나는 것이, 정환을 보고 급히 담배를 숨긴 듯 했다. 정신을 차린 정환이 택이 담배를 잡지 않은 손에 봉지를 쥐어주며 말했다.

 “이거 하나는 모레까지 먹어야 하는 거니까 잘 보고 먹고, 가, 간다.”

 정환은 당황한 기색을 숨길 여유도 없이 급히 등을 돌려 제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문에 등을 기대 선 정환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한 여름날 축구 경기를 뛴 것 마냥 쿵쿵대는 심장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아마 그 상태 그대로 집에 들어갔다간 미란이든, 정봉이든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게 뻔해 조금 진정하고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으니 진정된 것 같아 집에 들어가려 몸을 튼 정환의 시야에 택이 들어왔다. 여전히 담배를 뒤에 숨긴 채, 고개를 푹 숙이곤 봉지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정환이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택을 본 뒤 싱숭생숭해진 마음이 영 잡히지 않았다. 택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었던 담배가, 등 뒤에서 나던 그 뿌연 연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만 아는 건가. 나한테 처음으로 들킨 건가. 아저씨는 아시려나. 내가 담배 피는 사람 싫어하는 거 제일 잘 알 텐데. 택에게 배신감까지 느끼는 정환이었다. 정환은 제 나름대로의 해서는 안 될 일과 해도 될 일들이 명확한 편이었다. 그리고 ‘미성년자의 흡연’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일 중 하나였다. 정환에게는 골목 친구인 선우와 동룡 외에도 반에서 친한 몇 명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흡연하는 것을 본 이후 철저히 그와 멀어질 정도였다. 그런 정환을, 그렇게나 미성년자가 흡연한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정환을 택이 모를 리 없었다. 정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장 자신과 가까운 사람, 가장 자신을 잘 아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인 택이 담배를 핀다는 것은 정환에게 꽤나 큰 충격이었다.

 

 “야, 택이…, 담배 피냐?”

 택만 없는 택의 방에서, 정환이 물었다. 묻기 직전까지도 말하는 게 맞는 걸까, 나만 알고 있는 거였는데 괜히 다 알게 되는 거 아닐까 고민했지만 정환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정환의 입에서 나온 말에 허겁지겁 라면을 먹던 덕선도, 낄낄대며 만화를 보던 동룡도, 방금 막 방에 들어와 겉옷을 벗던 선우도 조용해졌다. 아, 반응을 보니 다들 알고 있었구나, 나만 몰랐던 거구나, 하고 정환이 직감한 찰나 동룡이 입을 열었다.

 “너, 알고 있었어?”

 정환이 동룡을 올곧이 바라봤다.

 “나만…, 나만 몰랐냐?”

 정환이 반문했고, 선우가 대신 대답했다.

 “걔 핀 지 좀 됐어. 너랑 사귀기 전부터. 뭐, 맨날 바둑만 두는 놈인데 속 복잡해서 피겠지. 쓸데없이 겉멋 들고 그럴 놈 아니잖아. 너한테는 절대 들키면 안 된다고 그렇게 얘기하더니, 어떻게 알았나 보네.”

 정환은 말이 없었다.

 “야, 그래도 택이가 너한테 안 들키려고 엄청 노력했어. 네가 자기 뭐, 우유 마시는 거? 보고 좋아졌다고 했다며. 내가 끼어들 거 아닌 건 아는데, 너무 뭐라 그러진 마라.”

 선우의 말이 맞았다. 정환에게 있어 그저 손이 유난히 많이 가는 놈, 쌍문동 천연기념물, 정도였던 택이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우유를 마시는 택의 모습이었다. 유난히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우유를 마시는 택을 본 날. 그 날로 정환은 택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천녀유혼의 왕조현보다도, 동룡이 반한 독서실 카디건 누나보다 택이 훨씬 더 예뻐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는데 왜 그렇게나 달라 보였는지. 아마 택에게 내리쬐던 햇살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정환은 후에 생각했다. 택이 쌍문동으로 이사 온 이후 정환의 가장 오래된 기억 또한 서툰 손길로 우유를 뜯어 마시던 모습이었다. 내가 최택이랑 우유에 엄청 집착하고 있었나, 하며 혼자 푸스스 웃기도 했던 정환이었다. 택과 사귀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쩌다 자신을 좋아하게 됐냐며 묻는 택에게 정환은 단번에 ‘우유 마시는 게 맑아 보였다-’라고 대답했다. 아마 택은 정환의 그 말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을 터였다. 상징적으로 극과 극을 달리는 우유와 담배니까. 게다가 정환은 담배 피는 사람을 질색하니까. 아마 자신보다도 더 당황했을 택을 생각하니 정환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택이 졌대. 평소보다 엄청 불안해했다는데, 잘은 몰라도 괜히 택이 건들지 말고 일찍 들어 와.’

 정환은 홀로 택의 방에 앉아 택을 기다렸다. 하는 짓이나 얼굴은 제일 어려선, 제 또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다. 택은 절대 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화가 나도, 속상해도 꾹꾹 참기만 했다. 정환은 ‘택이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좋겠다.’던 무성의 말을 기억했다. 아주 어렸을 때, 쌍문동에 가장 마지막으로 이사 왔을 때도 택은 감정 표현이 서툴렀다. 그 누구에게도 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택. 정환은 그럴수록 곪아갈 택의 속을 잘 알았다. 적어도 자신만큼은 택의 마음을 곪게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한 정환이었다. 이미 곪았더라도 내가 다시 치료해줘야지, 하며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택을 기다리던 정환이 슬슬 다리가 저려 옴을 느낄 때 즈음, 방문이 열렸다.

 “….”

 “…정환아.”

 정환은 오랜만에 보는 택의 얼굴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날, 그러니까 택이 담배 피는 모습을 정환에게 들킨 날 이후로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은 너무나도 초췌했다. 운동도 거의 하지 않고 밥도 잘 먹지 않아 평소에도 마르고 하얀 택이었는데, 이제는 하얗게 질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하얀 피부와 더 빠질 살도 없어 보일 정도로 폭 패인 볼은 택이 지난 일주일을 얼마나 힘들게 보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원래도 대국을 치르면 피곤에 절어 정환에게 쓰러지듯 기대곤 했지만, 평소보다도 심각하게 피곤해 보이는 택의 얼굴은…. 대국도 대국이지만 자신 때문에 더 힘들었을 택을 알기에 정환은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을 뿐이었다.

 “어, 야, 그…, 괜찮냐?”

 “….”

 “수고했어.”

 정환이 몸을 일으켜 택에게 다가갔다. 택은 방문을 연 자세 그대로 그저 눈만 느리게 끔뻑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입술을 잘근 씹은 정환이 택을 안았다. 순간적으로 택의 몸이 화악, 굳는 게 느껴졌다. 눈으로만 봤을 때도 일주일 동안 비쩍 마른 게 보였는데, 안으니 말랐다는 사실을 더욱 절감하는 정환이었다. 방황하던 택의 팔을 들어 제 등과 허리에 감은 정환이 말했다.

 “그렇게 오래 안 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말랐어. 응? 택아.”

 “….”

 “…택아?”

 정환이 팔을 풀고 택을 바라봤다. 택이 울고 있었다. 울고 있다기보다는 ‘눈물을 흘리다’에 더 가까웠지만, 원체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택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 자체로도 정환은 꽤나 당황했다. 대국에서 진 것 때문인가, 아니면 자신 때문인가.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나. 이유가 가늠되지 않는 택의 눈물에 정환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택을 토닥여주는 것뿐이었다.

 “왜 이렇게 울까, 우리 택이….”

 계속 서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정환이 곧 쓰러질 것만 같은 택을 부축해 방 안으로 완전히 들어와 바닥에 앉혔다. 눈물이 그쳤어도 여전히 떨고 있는 택이 진정할 때까지, 울음을 완전히 그칠 때까지 정환은 계속해서 택을 토닥였다. 잘게 떨던 어깨가 멈추고, 호흡이 진정되자 고개를 든 택이 불안한 눈으로 정환을 바라봤다. 입술만 축이는 택 대신, 정환이 먼저 말을 꺼냈다.

 “…택아.”

 “….”

 “나는, 네가…, 담배 펴도, 괜찮아.”

 “…정환아….”

 “괜히 겉멋 들어서 그러는 거 아닌 거 아니까, 우리한테 말 못하는 거 많은 거 아니까…, 괜찮아.”

 정환이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지는 택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가 이런 것 때문에 어색해지고 그럴 사이냐? 너 속으로 엄청 불안해했지? 답답하긴.”

 정환의 말에 드디어 택이 살풋 웃음 지었다. 이렇게 웃는 게 얼마만인지. 정환과 마주친 이후로 단 한 번도 제대로 웃은 적 없었던 택이었다. 그나마 짓는 웃음도 사람들에게 예의상 짓는 웃음이 다였다. 항상 우울한 얼굴로 굳어 있던 탓에 아빠 무성부터 기원 사람들까지 택에게 무슨 일 있냐며 물어볼 정도였다. 그 때마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만 젓던 택이, 비로소 진정 웃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내가 너, 얘기 듣고…, 일부러 우유 더 마시고…. 너네 학교 갈 때 맞춰서 나오고….”

 택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잠시 생각하던 정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남들보다 한 발짝, 아니 몇 발짝씩 느리고 바둑 외에는 관심도 없어 사귀는 중에도 내심 정환을 섭섭하게 만들던 택이었다. 그런데 택이 뒤에서 그런 노력 아닌 노력을 하고 있었다니. 일부러 학교 가는 시간에 맞춰 대문에 나왔을 제 연인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대신, 줄이자. 피는 건 뭐라고 안 할게. 그래도 피는 거 안 좋으니까, 줄이자. 힘든 거 있으면 나한테 더 얘기해. 그렇게, 조금씩 줄이자. 담배.”

 정환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도 일부러 더 마실 필요 없어. 내가 너 우유 하나만 보고 좋아한 줄 아냐?”

 택이 어색하게 웃었다. 정환이 그런 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냐? 네 생각. 너 생각해 정환아. 웬열 최택 이런 말도 할 줄 알아? 웬열, 나도 다 알거든? 와, 최택 대박이네! 정환과 택이 마주보며 웃었다. 우유처럼 말갛고 빛나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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