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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듬한 구조의 체육관을 가로질러 탈의실로 향했다. 정환은 어깨에 메고 있던 스포츠 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회색 후드티를 벗었다. 꺼내든 도복과 늘 입어왔었던 유도복은 느낌이 달랐다. 마르고 뻣뻣해서 긁히는 느낌이 드는 유도복과는 다르게 주짓수* 도복은 부드럽게 몸에 감겼다. 화려한 기술만큼 요란한 패치가 대표적인 옷이지만 전향한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정환에게는 아직 서너 개의 패치가 전부였다.

(*관절꺾기나 조르기 등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제압하는 브라질 유술)

"일찍 왔네."

"어."

 짧게 대답하고 파란 도복을 걸친 단단한 몸을 움직였다. 도복 바지의 헐렁한 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서늘했다. 체육관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넓은 품 탓에 펄럭이는 바짓단이 무릎에 휘감겼다. 펼쳐져 있던 윗옷을 단정하게 여미고 다부진 팔을 뻗어 벨트를 반으로 나눴다. 접은 부분을 허리 중간에 대고 두 번 둘러 묶고 나면 양쪽의 길이가 같은지 마주 대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 내 동생 오거든."

"너 동생 있었냐?"

 최관장과는 대학 동기였다. 정환은 어릴 적부터 해왔던 유도를 계속했었고 영도는 일찍이 주짓수로 전향했다. 메치고 던지는 정환과 달리 굳히는 것이 특기여서 그런지 잡아당기는 싸움인 주짓수에 예전부터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꽤 잘 안다 생각했는데 두 살 어린 동생 있다는 건 몰랐네. 머쓱한 기분에 이마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나한테 관심 좀 가져라. 새끼야. "

"남자한테 무슨."

"그런 관심 말고. 하여튼 꽤 하거든. 스파링 한번 해."

 넌지시 말하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차분히 몸을 풀었다. 관절을 돌리다 보니 꽤 한다는 건 뭘 얼마나 한다는 건지 궁금증이 일었다. 매트에 누워 왼쪽 무릎을 잡고 몸 쪽으로 힘껏 당기자 근육이 확 늘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상대의 얼굴을 보면 알겠지. 정환은 바짝 붙였던 팔을 풀고 무릎을 놓았다.

 

 주짓수의 룰은 상대보다 유리한 포지션을 점하는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다. 정환은 그 시작이 되는 기싸움에선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타고난 눈매부터가 그랬고 유도로 다져놓은 귀 모양마저 그랬다. 하지만 상대의 표정은 곱상한 얼굴만큼이나 평온했다.

"안녕하세요. 최택입니다."

"김정환이다."

 정환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마주 내밀어 오는 택의 손은 얼굴과 다르게 굵은 손가락 곳곳에 하얀 밴드로 테이핑이 되어있었다. 본건 좀 있나 보네. 정환에게 가만히 마주쳐 오는 눈이 고요했다. 그래 봤자 이 얼굴로 무슨 기술을 쓰겠냐. 대충 암바 잡으려 손 허우적대다가 탭이나 치겠지. 정환은 가벼운 마음으로 비스듬하게 고개를 꺾었다.

 마주 보고 허리 숙여 인사를 한 뒤 한쪽 손바닥을 치고 주먹을 맞댔다. 악수를 먼저 청했던 것은 일종의 예고였다. 망설임 없이 덤벼들었다. 낮은 자세로 빠르게 들이닥치는 정환의 손에 택의 발목이 휘어잡혔다. 하얀 도복 바지 끝단 아래로 힐끗대던 하얀 발목이 자신의 손에 쉽게 잡힌 것이 만족스러웠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누르고 손아귀를 당기는 동시에 체중을 실어 택을 밀어뜨렸다. 정환의 힘에 부딪힌 택이 매트에 등을 맞대자 접힌 그 다리 사이를 벌려 순식간에 허리춤을 구겨 넣었다.

"빠르네요."

 유리한 포지션이다. 하지만 정환이 쉽게 만들어낸 구도에 당황한 기색 없이 올려다보는 그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택의 까만 눈동자에 정환의 모습이 비쳤다. 울컥 올라오는 떨림이 당황스러워 잠시 숨을 멈췄다. 그 숨을 대신 내뱉은 택은 눈앞에 떠있는 옷깃을 당겨 쥐고 정환의 허리에 긴 다리를 감았다. 정환의 옆구리에 와 닿는 체온이 묘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 자신을 막히게 하는 것이 택의 곧은 종아리인지 동그랗게 벌린 입술인지 알 수 없었다. 신경을 빼앗던 입술 틈 사이로 보이는 속살이 아찔했다. 맞닿은 도복 자락이 비벼졌다. 아래에서 저릿하게 올라오는 감각에 미간을 찡그린 정환은 다시 한번 무릎을 집어넣었다. 자신의 옷을 쥔 손을 겹쳐 잡고 어깨를 밀었다. 벌려진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짓누르는 동시에 택의 발가락이 구부러졌다. 비틀린 몸 위로 하체를 더 들어 올리고 택의 팔을 한쪽으로 넘겼다.

"근데 왜 이렇게 둔해요."

"뭐?"

 귓가에 속삭여지는 말에 멈칫하는 순간 택의 날선 손이 정환의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유연하고 재빠른 탓에 떨쳐 낼 틈이 없었다. 하얀 테이프를 곳곳에 감아놓은 손이 정환의 팔뚝을 붙잡았다. 스치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택은 무릎을 세우고 정환의 머리를 밀어 함께 돌지 못하게 자세를 잡았다. 정환의 허벅지에 택의 발뒤꿈치가 닿았다.

"나이스 스윕*."

(*가드 상황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각종 주짓수 기술을 이용해 뒤집는 과정)

 택은 정환의 몸을 가뿐히 타고 넘어 몸을 돌린 채 주도권을 쥐었다. 가슴팍 위에 유려하게 올라탔다. 정환은 가드패스*을 시도해 볼 틈도 없이 완벽하게 마운팅 당했다. 택의 오른손끝이 정환의 목뒤를 파고들어 자신의 하얀 도복 소매 끝을 꼭 쥐었다. 단단하게 잡은 채로 주먹 쥔 왼손을 안으로 감아 넣어 바짝 당겼다.

(*상대의 방어를 뚫고 지금 위치해 있는 포지션보다 유리한 포지션으로 넘어가는 과정)

"잠깐만."

 탭. 정환이 바닥을 쳤다. 목젖이 눌린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바닥을 치는 소리에도 택의 자세는 달라지지 않았다. 바닥을 두어 번 더 치자 택의 뺨이 정환의 뺨에 붙었다. 상체가 맞닿고 정환의 머리통이 택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손바닥이 매트를 치는 소리가 급박해졌다. 바짝 들어 올린 목덜미에 핏대가 올라 컥컥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택은 팔을 풀고 일어섰다.

"탭 쳤잖아!"

"못 들었어요."

"못 듣긴 뭘 못 들어? 이거 웃기는 새끼네."

 벌게진 목을 부여잡고 화내는 정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내 동생 보통 아니지 않냐? 눈치 없이 다가온 최관장이 나동그라진 정환의 옆에 와 말을 걸었다. 저쪽 벽에 트로피 다 택이가 가져온 거다. 그 말에 체육관 한구석을 쳐다보니 정갈하게 각인되어 있는 최택의 이름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대회라는 대회는 다 쓸고 온 듯 가득한 트로피들이 정환을 휘황찬란하게 비웃는 것 같았다. 사무실 유리창 너머로 물을 마시는 택이 보였다. 돌려 딴 생수병에 입 한번 떼지 않고 한 통을 다 비워내더니 살짝 웃으며 빈 통을 흔들었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질끈 물은 잇새로 허탈함이 새어 나왔다.

 

 벽에 걸어놓은 도복을 걷어 스포츠 백에 개어 넣고 며칠 만에 다시 체육관에 나왔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정환을 맞이하는 건 택이었다. 호리한 몸이 다른 사람의 위에 올라앉아있었다. 벌어진 하얀 도복 틈으로 보이는 뽀얀 살결에 시선을 빼앗길 뻔했다. 정환은 택을 일부러 그냥 지나쳤다. 악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소리는 분명 택과 스파링하던 상대의 비명일 것이다.

"나 이기러 왔어요?"

"어. 며칠만 있어봐."

"네."

 상대를 제쳐놓자마자 정환을 따라와 말을 걸고 그때처럼 웃는다. 멍해지는 정신을 깨우고 탈의실을 문을 닫았다. 도복으로 갈아입으며 방금 택이 상대의 몸 위에 앉아있던 방향을 떠올렸다. 허연 가슴팍과 굴곡진 허리선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최대한 머릿속을 굴려 오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기억해야 한다. 도복을 고쳐 입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택은 정환의 파란 도복이 보이기 전까지 탈의실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다부진 허리에 느슨한 도복을 걸치고 나온 정환은 온통 남자들뿐인 이곳에서도 확연하게 남자다웠다. 큰 발과 커다란 손이 특히 그랬다. 몸을 푸는 정환이 발목을 돌리면서 왼쪽으로 고개를 꺾자 택도 같이 고개를 기울였다.

 

 주짓떼로*는 워낙 많고 선수들은 계속해서 경험을 쌓는다. 유도계에서 유명했던 정환을 반기는 연습 상대는 많았다. 매일 하나둘씩 꺾어가며 혼자 이 시간까지 남았다. 일부러 택이 없는 시간에 택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 누워서 올려다 본 천장에는 어느새 택의 얼굴이 선명했다. 저쪽 벽에 가득한 게 최택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이제 시간만 나면 그 말간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브라질 유술 주짓수를 하는 남자)

"뭐 해요?"

 감았던 눈을 뜨니 택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아 깜짝이야. 기척이라도 내던가 하지. 놀란 표정의 정환을 내려보며 배시시 웃는 택은 체육관에서 늘 보던 하얀 도복이 아니라 폭덮인 코트 차림에 단정한 목도리를 매고 있었다. 목도리 위로 빼꼼히 솟은 얼굴은 여전히 예뻤다.

"이 시간에 왜 왔어."

"지나가다가 불 켜져 있길래요."

 집에 가는 길에 체육관에 잠시 들린 모양이었다. 목도리를 풀어내고 정환의 옆에 자리 잡고 눕는 택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방금 배시시 웃던 그 미소가 아득히 스며들고 그날 정환을 올려다보던 고요한 눈빛이 아른거렸다.

"정환이 형."

"어."

"형은 주짓수 왜 해요?"

"기대되니까."

 늦게 시작한 주짓수는 하루하루 새로웠다. 다양한 방법으로 대비책을 찾았고 달라진 방향에 따라 다른 위력을 가할 수 있었다. 가드패스를 시도하다 스윕을 당하더라도 그 시도 자체가 매번 새로워서 스스로에게 다시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너는 왜 하는데?"

"좋아서요."

 나긋하게 마주쳐 오는 목소리가 고백 같았다. 좋아요. 정말 좋아요. 느릿하게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하는 택의 이야기에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약간 설레기도 했다.

"근데 형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닌가."

"너 이겨 먹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

"그래도 어려울 텐데."

 뭘로 이길건데요? 똑바로 누워있던 몸을 정환의 쪽으로 돌려 눈을 반짝였다. 주짓수의 기술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도복 잡는 법, 고개 드는 법, 상대를 보는 법 하나하나가 기술이고 노림수이다. 그걸 잘 알면서 묻는 말이었다.

"너 이렇게 뻗대다 지면 어떡할래?"

"안 져요."

"내기할래?"

"좋아요."

 나도 좋다. 정환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뒤엉켜있는 남자들 사이로 정환과 택은 마주 섰다. 곧 정리된 매트 위에는 둘만 남았다. 손바닥을 마주치고 주먹을 부딪혔다. 허공에 오고 가는 몇 번의 헛손질 끝에 택이 먼저 정환의 파란 도복 앞깃을 그러쥐었다. 오른발을 비스듬히 들여놓고 허리를 꺾어 정환을 밀어 뜨렸다. 이번 테이크다운*은 택의 몫이었다.

(*상대에게 기술을 걸어 넘어뜨리는 과정)

 정환은 자신의 위에 올라탄 채 옷깃을 잡으려 뻗는 손을 비틀어 눌렸다. 서로의 팔을 번갈아 밀어내고 당긴다. 치열한 싸움이 오고 가는 틈에 택의 긴 다리를 돌려 감고 발목을 꼬아당겼다. 정환의 종아리에는 피트 테이프가 밴딩 되어있었다. 독한 연습의 흔적에 맞닿은 택의 맨발바닥이 움츠러들었다.

"동선 파악했네요."

"어. 안 막을 거야."

 들어오기 전에 비틀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계속해서 덤벼드는 정환의 손길을 막아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택의 허리가 접혔다. 관절이 꺾여 근육과 뼈에 고통이 오는 것이 느껴졌다. 기술이 완전히 들어오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아픔을 느끼는 순간부터 이스케이프*는 가능하지 않았다.

(*상대가 서브미션 등을 걸어왔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며 빠져나오는 과정)

 택의 입술이 짓이겨지고 자세가 바뀌었다. 정환의 딥하프가드*는 특이했다. 다리를 감싸지 않고 그 허벅지를 그냥 당겨버렸다. 힘으로 포지션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양손을 모두 써서 컨트롤해야 하지만 정환에게는 한 손으로 충분했다. 당황한 택은 정환의 머리를 밀어냈다. 상체를 세워 뿌리치려는 택을 받아내는 정환은 유연했다. 하지만 택의 몸이 완전히 내려가지 않아 제대로 기술을 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주짓수 기술의 한 종류)

 택의 허벅지를 벌리고 눌렀다. 택은 탭을 치는 대신 정환의 벨트를 잡아당겼다. 그 틈에 정환은 완벽하게 숨지 못한 팔을 잡아당겼다. 각도를 유지한 채로 힘껏 굴렀다. 풀려버린 정환의 벨트가 바닥에 떨어졌다. 결국 택이 정환의 어깨를 다급하게 두드렸다.

"내가 이겼네."

 정환이 상체를 숙이자 숨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이 맞붙었다. 거세게 뛰는 심장소리가 엇박자로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택은 마지막으로 그래플링*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실수였지만 자책은 하지 않았다. 택의 귓가에 정환의 뺨이 닿았다.

(*양 선수가 서로 매트 위에서 단단히 붙잡은 형태)

"약속 지켜."

 택의 뺨에 정환의 입술이 진하게 붙었다. 완벽한 서브미션*이었다.

(*포지션에 의한 점수에 상관없이 경기를 마무리할 수 있는 기술로 상대의 관절을 꺾거나 동맥을 압박해 기절 또는 항복을 받아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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