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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24년, 중전 민씨의 이종 종질 효경공 최가 택이 스물넷의 나이에 지병으로 별시에 요절하였다. 미색인데다 총명하고 품행 또한 단정하였기에 따르는 장례 행렬이 끝이 없었다 한다. 효경공이 귀히 여겼던 제중원 의생 출신 주치의 김 아무개는 이에 책임을 지고 형을 받던 중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고, 공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다리를 잃은 실의에 빠져 자결하였다 하더라. <조선야사집 1부 전설야사 中>

 

 * * *

 

 아침의 고요함은 늘 한결같으나 그 고요함이 가져오고 거둬가는 상념은 매일 달랐다. 정갈하게 정리한 침상에 정좌하고 눈을 감은 정환의 얼굴은 바깥마당의 유난한 소란과 어울리지 않게 평화로웠다. 머리와 기운을 단정히 하는 명상은 일과의 시작이었지만, 오늘은 그것을 끝맺기가 어렵게 됐다. 호들갑스런 발소리가 회랑을 가로질러 문 앞까지 다가오자 정환이 알아서 일찌감치 눈을 뜬다. 김 의생, 아직도 침상에 있나! 오늘 같은 날 홀로 유유자적인가, 어서 이리 와 보게. 오랜만에 본가에 다녀온다더니 이른 아침부터 화려한 차림으로 돌아온 동룡이 신이 나 검은빛 도포와 짙은 자줏빛 도포를 양손에 들어 보였다. 어떤가, 내 특별히 자네를 위해 준비했네. 중요한 날 아닌가. 골라보게, 청에서 온 비단일세. 정환이 앉았던 자리의 주름을 반듯하게 펴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저는 괜찮습니다, 유 형. 슬며시 웃어 보이며 책상에 개어져 있던 하얀 무명옷을 갖춰 입고 자주 삶아 색이 바랜 푸른색 의생복을 걸치자 동룡의 표정이 못마땅해진다. 오늘마저 의생복인가. 귀한 손님도 많이 올 터인데. 이게 편합니다, 저는. 옷자락을 고정하는 허리끈을 단단히 묶으며 대꾸하자 동룡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급스런 도포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에이, 멋없는 사람 같으니. 의생당에서 한 방을 쓰는 동룡은 늘 알게 모르게 정환을 챙겼다. 아무리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정환이라도 그 마음을 고마워하지 않을 리 없었다. 미소를 지은 채 묵묵히 버선을 챙겨 신고 방을 나서는데 도포를 개어 정리하던 동룡이 반가운 이름을 입에 올렸다. 청에 가셨던 효경공께서도 오신다 들었네. 예, 알고 있습니다.

 

 바깥마당은 현판식 준비로, 부엌간과 안마당은 연회 준비로 안팎이 죄다 소란스러웠다. 북적이는 모양새를 가만히 지켜보다 마당 한 구석 대추나무에 기대 놓은 비를 집어 들었다. 소매를 걷고 한참 비질을 하는데 부엌에서 채반을 받쳐 들고 나오던 홍이가 반쯤 뛰듯이 다가왔다. 아이 참, 김 의생님도. 두셔요, 제가 할게요. 옷 버리신다니까요. 비질을 멈추고 내려다보니 홍이의 차림도 평소와 달랐다. 어제부터 제 옷 중에 가장 그럴싸한 것을 빨아 풀을 먹이고 아껴뒀던 새 짚신을 꺼냈을 것이다. 기름이라도 튈까 조심을 떨다 부엌간에서 제 어미에게 혼쭐이 났을 테지. 우리 홍이, 오늘 참 곱다.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추자 생긋 웃으며 주변을 한 번 살피더니 채반의 종이를 걷고 산적 하나를 얼른 입에 넣어준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맛있네. 하고 머리를 쓰다듬는데 홍이야, 하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홍이의 얼굴이 안마당의 수국마냥 활짝 핀다. 택이 도련... 반가워하던 얼굴이 주춤한다. 홍이는 매일 보는 알렌 원장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양인들에게 낯을 가렸다. 동행하던 주사에게 함께 온 선교사들의 안내를 부탁한 후 한달음에 달려온 택에게 홍이를 내어주고 가만히 옆으로 비켜섰다. 차려입은 양장이 흙바닥에 끌리거나 말거나 보고 싶었어. 하며 한품에 홍이를 안아주는 모습에, 그걸 내려다보던 정환의 눈도 따뜻해졌다. 볼을 붉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홍이에게 눈짓을 하니 얼른 산적을 택의 입에 넣어준다. 눈을 휘어 웃는 택을 뿌듯하게 보던 홍이가 안마당에서 저를 찾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얼른 채반을 덮고 쪼르르 달려갔다. 오물오물 산적을 씹으며 일어서는 택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저보다 더 깊게 목례를 해 온다. 흙이 묻은 택의 바지자락에 신경이 쓰였지만 쉬이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청국은 아직 바람이 차다 들었습니다.”

 “네, 그래서 일정을 서둘렀어요. 현판식에 꼭 참석하고 싶기도 했고요.”

 “그럼요. 효경공께서 애써 주신 덕에 여기까지 온 것을요.”

 “......택이요.”

 “........”

 “택이요, 김 의생님.”

 

 머쓱함 탓일까, 정환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애꿎은 비만 더 세게 그러쥐었다. 예의 바른 택은 더 이상 정환을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 말간 눈으로 정환을 살펴보던 택이 낡은 빗자루에 시선을 두었다. 오늘도 직접 비질을 하셨어요? 따로 준비하실 것도 많을 텐데요, 오늘은. 그래도 지저분하면... 신경이 쓰이니까요. 정환이 나직하게 대답하는 동안 택의 시선은 먼지가 묻은 정환의 고운 손에, 정환의 시선은 흙이 붙은 택의 바지자락에 머물고 있었다.

 

 “광혜원이 제중원(濟衆院)으로 새롭게 문을 여는 오늘, 이렇게 든든한 의생들의 얼굴을 보니 과인이 기쁘기 한량없구나. 제중원은 양반이건 걸인이건 나병환자건 이 나라 백성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모두 이 점을 명심하고, 부디 이 의학당을 통해 정진하여 나라에 필요한 의사로 거듭나길 바라노라. 왕실도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열두 명의 정식 의생과 행정을 도맡는 주사 3인, 그리고 제중원의 모든 식구들이 상석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지켜보던 알렌 원장을 비롯해 지금껏 도움을 준 선교사와 양인 의사들도 기쁜 표정으로 의생들을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하지만 고종의 곁에 선 효경공의 시선만큼은 수석 의생 자격으로 맨 앞에 자리한 정환에게 고정돼 있었다. 마당에서 절을 올리다 값비싼 도포자락이 상할까 엉거주춤한 다른 의생들과 달리, 성의를 다해 고개를 조아린 정환의 단정한 어깨가 참 제 주인을 닮았다, 택은 그리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고종 22년(1855년),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초봄, 제중원의 풍경이었다.

 

 * * *

 

 서고에 의서를 반납하느라 조금 늦게 학당에 들어서는데 어쩐지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어두운 표정의 알렌과 여의사 호돈 곁에서 난감해 하던 택이 정환을 발견하고 반색을 했다. 조용히 동룡의 옆자리에 앉자 묻기도 전에 대답이 돌아온다. 알렌 원장께서 부인과를 만들겠다는군. 부인과요? 여자 환자와 임산부를 따로 진료하는 과 말일세. 아, 예. 서양에는 부인과가 따로 있다 들었습니다. 우리도 마련을 해야지요, 헌데 분위기가 왜... 저 잘나신 백씨 가문 자제 탓 아니겠는가. 유교사상으로 점철됐던 조선에 청국과 서양의 신문물이 밀려들어오고, 일본제국의 손톱이 온 나라를 할퀴어 오던 시대였다. 혼재하는 모든 것 사이에서 가치관이 부딪치는 것쯤이야 당연한 것이었지만, 적어도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생명의 가치를 우선으로 삼는 이곳 제중원에서만큼은 벌어져선 안 될 일이었다. 여러분, 여성 환자도 그저 환자일 뿐... 날 선 목소리가 택의 말을 잘랐다. 최 도령께서 참견하실 일이 아닙니다. 정환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말씀드린 저희 입장이나 통역해 주시...

 

 “효경공이십니다.”

 

 이번엔 정환의 낮은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라냈다.

 

 “자네, 지금 누구 말에 끼어드는가. 어디 근본도 모르는 가문의 서생이...”

 “백 의생님, 희파극랍저(希派克拉底 -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잊으셨습니까? 환자는 그저 환자일 뿐입니다. 신분이건 성별이건 그 어떤 걸로도 환자를 차별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내 지금까지도 많이 참았네. 온갖 시정잡배부터 남의 집 머슴 수발까지 들었어. 하다하다 이젠 계집들 수발까지 들란 말인가?”

 “수발이 아니라 치료입니다.”

 

 말투는 고요했지만 표정은 이미 서늘했다. 노려보는 눈을 피하지 않고 일어서자 정환이 그를 내려다보는 형국이 되었다.

 

 “신분의 높낮이대로 백 의생께서 수석 의생이셨으면 좋았을 테지만 제중원의 수석 의생은 접니다. 의생을 대표해 발언할 권리 역시 제게 있습니다. 전 부인과 신설에 찬성합니다. 다른 의생 분들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학당에 고요한 침묵이 흐르자 택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때 동룡이 손을 들었다. 저 역시 찬성입니다. 그 계집이 결국 우리 어미이고 처이고 딸 아니겠소. 동룡의 말에, 백 의생의 눈치를 살피던 의생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알렌과 호돈의 표정은 밝아졌지만 통역을 하던 택은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결국 택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당을 빠져나가는 의생들 틈을 비집고 정환에게 다가왔다. 가는 길에 서고에서 빌릴 책 목록을 적는 걸 기다려주던 동룡이 눈치를 살피더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김 의생님. 예. 왜 그러셨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왜 백 의생님께 그렇게까지 하셨어요, 그분 성품을 몰라 그러세요? 제 걱정, 해 주시는 겁니까? 늘 당차기만 한 택도 정환의 앞에서는 할 말을 잃을 때가 꽤나 자주 있었다.

 

 “효경공께선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네?”

 “그리 무례하게 구는데 왜 참으셨느냐는 말입니다. 조선 최고의 가문이어서요?”

 “...김 의생님.”

 “잊지 마십시오, 누가 뭐래도 조선에서 가장 존경 받는 최고의 가문은 효경공께서 속해 계신 왕실입니다.”

 “....”

 “그리고 그와 상관없이 효경공께선 지금의 제중원을 있게 한 제중원의 식구십니다.”

 

 택은 찡해지는 콧잔등을 찡그려 울컥한 마음을 내리눌렀다. 밖으로는 일본제국에, 안으로는 권세 있는 가문에 시달리며 허수아비 소리를 듣는 왕실이었다. 소란을 일으킨 백 의생의 아비 백현익 대감을 비롯해 일제의 수하가 되어 권세를 얻은 몇몇 가문은 툭하면 왕실을 압박하고 우롱하기 일쑤였다. 하물며 저는 굳이 따지자면 외척 세력인 중전의 사촌 조카에 불과했다. 택의 총명함과 바르고 따뜻한 성품, 당차고 밝은 성격은 모두 어려서 부모를 잃은 저를 거두어 친어미처럼 키워준 중전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는 치열한 노력의 결과였다. 정환은 불안한 저의 입지와 마음을 식구라는 한 마디로 아무렇지 않게 달래주었다. 왕실의 숙원사업인 제중원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것도 원래는 그저 중전과 황제를 위해서였지만, 이젠 그게 다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무심한 얼굴과 달리 매사에 진심인 정환이 눈에 밟혔었는데, 언제부턴가 마음에서도 그 이름이 덜그럭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 * *

 

 개화기라고는 하나 모든 백성이 신문물과 양인에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낯설고 새로운 것은 가끔 신기함보다 두려움을 자아낸다. 양의와 선교사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본 적도 없는 기구와 기술로 환자를 치료하는 제중원은 쉽게 표적이 되었다. 살을 쨌다가 꿰맨다더라, 사람 눈알을 박은 안경으로 입안을 들여다본다더라, 어린아이를 끓여 약을 달인다더라. 제중원을 향한 호기심만큼 해괴한 소문도 많았다. 양귀를 처단해야 한다며 마을 사람들이 몇 명씩 몰려와 알렌 원장에게 돌을 던지고 바깥마당에서 소란을 부리는 일이야 부지기수였지만, 이번엔 상황이 조금 심각했다. 누가 보낸 것인지 떼를 지어 몰려온 장정들이 안마당까지 들이닥쳐 학당이며 진료실이며 가리지 않고 난동을 부린 탓에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학당의 책상과 의자는 박살이 났고 진료실도 집기가 깨지고 널브러져 엉망진창이었다. 다행히 외출 중에 기별을 받은 알렌은 만약에 대비해 며칠간 집에서 쉬기로 했고, 의생들도 모두 본가나 한양에 있는 지인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 남은 건 제중원의 궂은일을 도맡아 해 주는 사랑채 식구들과 정환뿐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명상을 마치고, 장정들에게 떠밀려 돌부리에 주저앉았던 양산댁의 다리에 붕대를 새로 감아 준 정환이 진료실로 향했다. 이틀간 홀로 정리를 한 덕에 학당은 책걸상만 새로 들이면 될 만큼 복구가 되었지만 진료실은 손도 대지 못한 채였다. 깨진 유리 조각들부터 줍는데 문가에 빼꼼이 홍이의 머리가 보였다 사라진다. 사랑채에서부터 따라는 왔는데, 한 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곳이라 혹여 야단을 맞을까봐 숨은 게 분명했다. 홍이야, 하고 부르니 한참만에야 고개를 내민다. 괜찮아, 이리 와. 하고 손짓을 하려다 직접 문가로 다가갔다. 제 가죽신이면 모를까 홍이의 낡은 짚신으로 걷기엔 바닥이 너무 위험한 탓이었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발끝만 톡톡 차고 있는데 슬쩍 보이는 눈가가 발갛다. 어린 마음에, 늘 여장부 같던 제 어미의 아픈 꼴을 보는 것이 퍽이나 서러웠을 게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팔을 벌리니 잠시 망설이다 얼른 품에 안겨온다. 그나마 멀쩡한 진료대를 툭툭 털고 홍이를 앉히니 신기한지 연신 사방을 둘러본다. 어리긴 해도 제 어미를 닮아 바지런한 성품의 홍이였다. 저 혼자 정리를 하면 안절부절 할 게 뻔해, 바닥에 굴러다니는 약병들을 주워 홍이 앞에 늘어놓고 거즈를 쥐어주었다. 깨끗하게 닦는 거야, 할 수 있지?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이곤 꼼꼼하게도 병을 닦는 고사리 손이 예뻐 다시 한 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한다, 우리 홍이.

 

 진료실이 어느 정도 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서너 식경이 지난 후였다. 홍이는 몇 개 되지 않는 병을 진즉에 윤이 나도록 닦아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점심을 먹여야 할 것 같아 깨우려는데, 회랑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홍이가 먼저 눈을 떴다. 동룡이 돌아왔나 싶게 요란한 걸음이었건만 문으로 들어선 건 뜻밖에도 택이었다. 놀란 정환이 어쩐 일이냐고 물을 틈도 없이,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던 홍이가 택이 도련님! 하고 반가운 소릴 냈다. 울상을 짓고 진료실 안을 훑어보던 택이 홍이의 부름에 얼른 다가온다. 신발매무새가 단정치 못하다 싶더니 기어이 진료대 앞에서 휘청하는 것을 정환이 얼른 단단히 붙들었다. 깜짝 놀랐는지 홍이보다 더 동그래진 눈으로 올려다보자 정환이 팔을 놓아주며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김 의생님.”

 “그리 되었습니다. 청국에 가셨다 들었는데 어찌...”

 “아침에 도착했어요. 궁에 인사 올리러 갔다가 듣고 바로 온 거예요.”

 “여독에 곤하실 터인데 쉬시지 않고요.”

 “아니, 지금 제가 곤한 게 문제예요? 김 의생님은 정말...”

 “.....”

 “.......중전마마께서도 필요한 게 없는지 살피라고 하셨고... 헌데 다치셨어요?”

 

 엊저녁 망가진 걸상을 밖으로 옮기기 쉽게 작은 조각으로 부수다 파편에 턱을 조금 긁혔는데, 잘 보이지 않는 곳의 상처를 귀신같이도 알아챘다. 별 거 아닙니다. 다쳤다는 말에 울상이 되려는 홍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사이 이미 소독제와 연고를 찾아든 택이 눈짓을 한다. 거절해 봐야 소용없을 걸 알기에 홍이 옆에 나란히 앉아 머리를 긁적였다. 상처를 살피느라 가까이 다가온 택의 얼굴에 정환은 얼른 시선을 내렸다. 왠지 모를 긴장에 몸이 굳어진 것도 잠시, 소독제를 바르며 자신이 아픈 양 아으... 하고 앓는 소리에 웃음을 참으려 헛기침을 하자 택이 헛다리를 짚었다. 많이 따가우세요? 괜찮습니다. 제가 서툴러서... 잘 하고 계십니다. 택의 손가락이 닿는 턱뿐만 아니라 가슴 언저리께 역시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양산댁이 다친 마당에 택에게 무엇을 대접해야 하나 고민한 게 무색하게, 사랑채 식구들은 이미 궁에서 온 음식들로 잔치 아닌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식사 준비하기 어려우실 것 같아서요. 선한 미소를 지은 택이 먹다 말고 일어서 인사를 하려는 사랑채 식구들에게 손사래를 쳤다. 이러시면 제가 불편해요, 어서 드세요. 감사합니다, 효경공 나리. 저도 여기서 같이 먹어도 되죠? 아이고, 나리도 참... 곤란한 얼굴을 하던 양산댁이 이내 홍이를 시켜 작은 상을 내왔다. 홍이도 여기서 같이 먹자. 몸이 불편한 양산댁을 만류하고 직접 음식을 챙기던 정환이, 좁은 사랑채 구석에 다리도 다 펴지 못하고 앉아 홍이의 재잘거림을 정성스레 들어주는 택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작은 상에 가득 차린 음식은 하나같이 정갈하고 맛깔스러웠으나 화려한 궁중요리는 아니었다. 혹여 사랑채 식구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마음이 급한 와중에도 택이 신경을 썼을 것이다. 정말 맛나요, 택이 도련... 효경공 나리. 제 어미의 눈치를 보며 얼른 호칭을 고치는 홍이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 택이 홍이의 밥그릇에 고기를 한 점 얹어주며 물었다. 김 의생님도 입에 맞으세요? 예, 아주 맛있습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효경공.

 

 “다들 피하셨다는데, 왜 김 의생님만 남으셨어요?”

 “여기가 제 집인 것을요. 달리 갈 데도 없습니다.”

 “......그럼 정리라도 다른 의생님들 오시길 기다렸다 하시지요. 왜 혼자 힘들게...”

 “언제 아픈 사람이 찾아올지 모르잖습니까.”

 

 이번에는 택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정환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말 한 마디에 이렇게나 마음이 덜컹이는데, 정작 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고 묵묵히 수저를 놀릴 뿐이다. 먹먹한 가슴께를 한 번 쓸어내린 택이 이번엔 정환의 밥그릇 위에 전복무침을 한 점 올려놓았다. 많이 드세요. 놀란 정환이 고개를 들자 이미 택은 어설프게 잡은 홍이의 젓가락을 고쳐 쥐어주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물끄러미 밥그릇을 내려다보던 정환 역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묵묵히 다시 수저를 들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심심치 않게 같은 일이 있었지만 정환은 단 한 번도 택에게 그리 하지 않았다. 아니, 감히 그리 할 수가 없었다. 매운 것을 먹은 일도 없는데 어쩐지 속이 쓰려오는 바람에 정환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수저를 놀렸다.

 

 * * *

 

 다들 학당에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기웃대는 걸 보니 알렌 원장이 며칠 전 얘기한 의원 면허 시험 공고문이 붙은 모양이었다. 언제 앞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의생들 틈을 비집고 나온 동룡이 창백한 낯빛으로 급히 정환에게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유 형.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던 동룡이 한참 만에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해부학 시험이 있네. 그야 의생 시험 때도 치렀잖습니까. 이번엔 달라. 돼지 한 마리를 해부해 장기를 죄다 그려야 한다는군. 동룡을 토닥이던 정환의 얼굴이 일순간에 굳어졌다. 그렇지? 자네도 겁이 나지? 동룡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한 달이나 남았으니 필기시험과 영어시험은 공부를 하면 된다지만, 해부 시험은 어찌 한단 말인가. 그러게요. 정환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동룡을 토닥이며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히익, 해부 시험이요? 서고에 마주 앉아 새로 들어온 의학 서적과 원서의 목록을 만들던 중 시험 얘기를 꺼냈더니 택이 깜짝 놀라 대번에 고개를 든다. 택은 요즘 제중원 서고의 책들을 서양식 도서분류법으로 정리하고, 부족한 책을 선교사들에게 부탁하거나 청국에 다녀올 때 직접 구해 와 채우는 중이었다. 원래도 수업이나 진료가 끝나면 서고에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던 터라, 자연스럽게 택의 일을 돕게 되었다. 정환은 붓을 들어 단정한 필체로 책의 제목과 목차를 적어 내려갔다. 예, 2인 1조라고 하여 유 형과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다시 붓을 잡는 택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유 의생님, 마음도 여리신데 야단났네요. 안 그래도 벌써 잔뜩 겁을 내고 계세요. 김 의생님은 겁나지 않으세요? ...저는 영어시험이 더 걱정입니다. 이제 양인들과 일상적인 소통을 하거나 간단한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정식 양의가 되려면 서양 의학서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기에 이번 영어 시험은 수준이 높을 게 분명했다. 들었던 붓을 다시 벼루에 내려놓은 택의 눈이 반짝거렸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예?”

 “의생 시험 보실 때도 제가 도와드렸잖아요, 영어 공부.”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요. 효경공 덕분에 이제 아예 까막눈은 아니니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없어 글씨를 쓰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서운함이 가득한 낯빛이 보여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폐를 끼치기 싫어 나름 배려를 한 것인데 내치는 소리로 들은 모양이었다. 아... 효경공, 그게... 아니에요, 불편하시면 할 수 없죠. 하긴 이제 혼자서도 잘 하시니까요. 글씨를 쓰던 종이에 먹물이 번지는 것도 모르고 우물쭈물하던 정환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심통 난 아이마냥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목록만 써 내려가는 택을 물끄러미 보던 정환이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효경공. 결국 그 다음날부터 두 사람은 정환이 의학 서적에 나오는 전문적인 문장을 홀로 풀이하게 되기까지, 스무날 하고도 사흘 저녁을 서고에 불을 밝혔다. 공부만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날씨가 스산한 날엔 공부를 일찍 마치고 따뜻한 차를 나누어 마셨고, 기분 좋게 선선한 저녁엔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로 산책을 나서기도 했다. 제중원의 진료가 없는 날을 틈타 새 붓과 종이를 사러 장에 갔다가 주전부리를 물고 장 구경을 하거나, 밤이 너무 늦었다는 핑계로 택을 집까지 바래다주는 일도 있었다. 가슴이 따뜻하고 간지럽다가도 때때로 이유 없이 서늘하게 불안해지고, 마냥 즐겁다가도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정환은 매번 여기까지다, 여기가 마지막이다, 여기서 마음의 균열을 막아야 한다, 그리 되뇌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공부를 마치던 날도 그랬다.

 

 “엿새 후면 시험 시작이네요.”

 “예. 그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꼭 합격하세요. 김 의생님은... 그러셔야 해요.”

 “예. 효경공께서 도와주셨으니 그 값을 해야지요.”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멋진 의원이 되실 거예요. 처음부터 그리 생각했어요.”

 “........과찬이십니다.”

 “진심이에요.”

 

 말간 눈으로 정환을 바라보던 택이 입고 있던 양장 재킷의 안주머니를 더듬어 까만 상자를 하나 꺼냈다. 언제 드려야 할까 고민했는데... 오늘이 좋겠네요. 엉겁결에 상자를 받아든 정환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봐도 택은 그저 웃으며 눈짓을 할 뿐이었다. 열어보세요. 조심스럽게 포장을 벗기고 상자를 연 정환의 눈이 커다래졌다. 효경공, 전 아직 이런 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택이 상자에서 청진기를 꺼내 정환의 목에 둘러주었다. 잘 어울리세요. 뿌듯한 표정의 택을 가만히 마주보다 천천히 청진기를 빼내려 하자, 택이 어울리지 않게 단호한 손길로 막아서며 고개를 젓는다. 제 선물이에요. 너무 과분한 선물입니다, 효경공. 과분하지 않게 하시면 되죠. 저도 모르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는지 택이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모든 환자를 진심으로 대하는 의원님이 돼 주세요. 그 청진기에게 과분한 의원이요.”

 

 티 없이 맑은 눈에 진심이 가득해서, 이번에도 정환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름 날씨만큼이나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앞일이라더니, 그로부터 이틀 후 정환의 의원 시험에 비상이 걸렸다. 그것도 굳이 따지자면 택을 구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몇 달간 꾸준히 해 왔던 서고 정리가 막바지에 이르러 가장 손이 가지 않는 책장 꼭대기의 책들만 남았더랬다. 평소 같으면 사랑채에 부탁했을 테지만, 그날따라 사랑채 남자들이 날을 잡아 장작을 하러 간 터라, 택은 직접 책들을 꺼내려고 광에서 작은 사다리를 찾아왔다. 며칠 전 발판 하나가 금이 간 것을 덕삼이 고친다, 고친다 말만 하고 미뤄뒀음을 알 턱이 없었다. 일이 겹치려면 꼭 이런 식이다. 결국 아슬아슬하게 사다리 끝까지 오른 택이 맨 위 칸의 책들을 한아름 꺼내드는 순간 우지끈 소리와 함께 사다리 한쪽이 주저앉았다. 효경공--!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몸이 붕 뜨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크게 다치겠구나, 중전마마께서 노하셔서 제중원 출입을 금하시면 어쩌지, 사랑채 식구들이 놀라겠구나,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정환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많이 걱정하려나, 아니면 혹여 화를 내려나. 그러고 보니 화내는 모습을 본 일이 없구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떨어지는 시간이 너무 길다, 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서야 눈을 뜬 택은 자신이 정환의 품에 안겨 쓰러져 있음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일어서려는데 저보다 더 급히 몸을 일으킨 정환이 택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처음 보는 다급한 표정과 목소리에 왠지 기분이 묘해져 잠시 멍하니 마주보고 있었더니, 혹시 아픈 데가 있냐고 다그치듯 물으며 택의 몸을 살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정환은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펴보고 택의 옷을 털어준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놓아주었다. 어쩐지 간질거리는 느낌에 잡혔던 손을 꼬물거리던 것도 잠시, 얼굴을 찌푸리며 오른 팔목을 부여잡는 정환을 보고 심장이 툭,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오른손 손등 골절. 중요한 시험을 앞둔 정환에겐 분명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정환은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더 야단이었다. 석고 붕대로 손을 감싸고 길게 늘인 붕대를 어깨에 걸쳐 팔을 고정해 준 알렌은 몇 주는 이렇게 있어야 할 텐데 시험을 어쩌면 좋냐고 걱정을 했다. 양산댁은 조심성이 없다고 구박을 하면서도 사골을 고아 질리도록 정환의 밥상에 올렸고, 홍이도 틈날 때마다 정환에게 달려와 도울 게 없냐고 물었다. 한 방을 쓰는 동룡이 제일 고생이었다. 학과 수업의 필기는 물론 침상 정리부터 옷을 입고 벗는 일까지, 정환이 부탁하기도 전에 먼저 마음을 써 주었다. 손이 이렇게 된 이상 해부 시험도 동룡의 손을 빌어야 할 터였다. 감사합니다, 유 형. 어디서 말로 때우려고. 나중에 술이나 한 잔 사게. 예, 좋은 술로 사겠습니다. 그리고 택은... 언제 어디서든 마주치기만 하면 그렁그렁한 눈이 되어 미안하다고 제 탓이라고 끝도 없이 반복하는 바람에 그 앞에선 아픈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시험 결과가 안 좋으면 택이 자책을 할까봐 밤늦게까지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한 덕에 의학 이론과 영어 시험도 높은 성적으로 통과를 했다. 이제 택이 준 청진기를 목에 걸기까지 남은 건 해부 시험 하나였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잘 하실 수 있습니다. 정환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동룡의 표정은 나아질 줄을 몰랐다. 천을 걷어내고 검은 돼지의 몸이 드러나자 아예 사색이 될 지경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정환의 소맷자락을 잡은 동룡이 고개를 저었다. 못하겠네. 무리야.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유 형. 시간이 없어요. 힐끔 시계를 보다 덩달아 눈에 들어온 택의 얼굴은 동룡보다 더 울상이었다. 시험 감독관인 양의의 통역을 위해 들어왔는데, 그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내 제 탓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 말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어서요. 택의 표정에 마음이 급해진 정환이 재촉을 하자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한 동룡이 실험대 앞으로 다가가 해부용 칼을 잡았다. 여깁니다, 유 형. 칼을 찔러 넣어야 할 위치를 짚어 준 정환이 돼지의 다리를 잡고 눈짓을 하자, 동룡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칼을 가져다 댔다. 바로 밑에 내장이 있습니다. 찌르는 힘이 너무 강하면 장기까지 상할 테니 적당히 힘을 주세요. 자네 지금 그걸 조언이라고 하는 건가. 아까보다는 긴장이 풀렸는지 투정을 부리듯 불퉁하게 대꾸하는 동룡에게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느냐고 야단이다. 마침내 결심을 한 듯 동룡이 떨리는 손으로 돼지의 배에 칼을 찔러 넣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촉에 또 다시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칼을 잡은 손에 힘을 풀지는 않았다. 잘 하고 계십니다. 이제 천천히 날을 세워서 배를 가르시면 됩니다. 칼날이 적당히 깊이 박혔다 싶을 때쯤 정환이 침착한 목소리로 동룡을 안내했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제법 수월하게 뱃가죽을 가른다 싶더니 중간쯤부터 방향이 조금씩 틀어졌다. 유 형, 이쪽으로. 그리 가면 갈비뼈와 부딪칩니다. 하지만 한 번 틀어진 방향을 바로잡기란 쉽지 않았다. 동룡이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대 봐도 칼이 한쪽 갈비뼈에 가서 박혔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동룡의 표정.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택의 얼굴. 촉박한 시간. 결국 정환이 멀쩡한 손으로 칼을 잡아 뽑고 살펴보니 뼈에 박혔던 탓에 칼날이 많이 상해 있었다. 감독관에게 칼을 교체해 달라고 요청했더니 형평성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길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의원 면허가 위험해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단 택이 두고두고 자책할까봐, 그게 더 문제였다. 어깨에 걸쳐진 붕대 끈을 벗고 실험대 앞에 다가서자 동룡이 정환의 왼팔을 붙잡으며 막아섰다. 자네, 뭘 어쩌려고 그러나. 내가... 다시 해 보겠네. 이 칼날로는 무리입니다, 유 형. 차분히 대꾸하며 오른손을 꿈쩍거려 보니 통증도 통증이지만 석고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크게 숨을 한 번 내쉰 정환이 눈을 질끈 감고 오른손을 높이 치켜 올렸다. 쾅--!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뒷골이 띵하게 전해지는 통증도 정환에겐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오른손을 있는 힘껏 실험대에 내리치자 손을 감싸고 있던 석고가 조각조각 떨어져 내렸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손을 못 쓰게 될 수도 있어! 정환은 동룡의 비명 같은 외침에 그저 씨익 웃어 보였다. 오른손에 힘을 줘 보니, 통증이 심해 그렇지 그럭저럭 움직일 수는 있었다. 오른손 손바닥에 칼 손잡이를 댄 정환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그러쥐고 그 상태 그대로 붕대를 칭칭 감아 고정시켰다. 통증에 주먹이 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아... 이 독한 사람 같으니. 유 형, 어서 그림 그릴 준비를... 알겠네. 소매로 정환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준 동룡이 얼른 실험대 한쪽에 종이를 펼치고 목탄을 쥐었다. 호흡을 고르고 기세 좋게 칼을 박아 넣은 정환이 힘차게 돼지의 배를 가르고 장기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통증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손놀림만큼은 거침이 없었다. 다른 의생들도 혀를 내두르며 정환의 해부를 구경하다 시험에 집중하라는 감독관의 말에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자네, 칼을 정말 잘 쓰는군. 동룡이 진심으로 감탄을 하며 서걱서걱 목탄을 놀렸다. 뚫어지게 이쪽을 보는 택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정환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렁그렁한 택의 눈을 보면 절대 집중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다음날 학당 앞문에 시험 결과 공고문이 붙었다. 통과한 의생 명단의 맨 위에는 김 정 환 세 글자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다시 석고 붕대를 감싸주며 의원 될 사람이 손을 이리 함부로 쓰면 되겠냐고 잔소리를 늘어놓던 알렌도 수석 합격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환한 표정이었다. 영어와 의학 이론은 정환보다 성적이 높은 의생이 한두 명 있었지만 해부 시험 성적이 워낙 좋았다고 했다. 정식 수련의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나무패를 받아들고 한참을 쓸어보던 정환은 의패를 손에 꽉 쥐고 걸음을 옮겼다.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택은 정환의 예상대로 사랑채 마루에 작은 탁상을 놓고 앉아 홍이에게 글자를 알려주고 있었다. 계집이 글자는 무슨 글자냐고 손사래를 치며 말리던 양산댁도, 방긋 웃으며 홍이가 우리말뿐만 아니라 영어도 금방 배운다고, 참으로 대견하다고 말하는 택에게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천하의 양산댁도 이길 수 없는 게 바로 택의 웃음인데, 제 의패를 받아들고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는 바람에 정환은 잠시 넋을 놓고 택을 바라봤다. 정말 축하드려요, 김 의생님. 아니, 이제 김 선생님이네요! 그렇게나 기쁜지 택이 발을 동동 굴러가며 제 손을 덥석 잡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저는... 혹여 저 때문에 시험을 제대로 못 치르실까봐... 분명 환하게 웃고 있는데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가 안쓰러워서 바라보는 마음이 더 일렁였다. 아닙니다. 효경공 덕분에 합격한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참을 제 손을 붙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더니 기어이 바닥에 동그랗게 눈물 자국이 생긴다. 울 것 같은 표정이야 자주 봤지만 정말 눈물을 흘리는 택은 처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홍이에게 하듯 눈물을 닦아주려다 흠칫 놀라 얼른 손을 내렸다. 감히 누구에게. 속으로 저를 나무라며 택을 바라보다 택이 붙잡고 있는 제 손을 살살 흔들자 젖은 얼굴로 천천히 저를 올려다본다. 약속 꼭 지키겠습니다. 약속이요...? 반드시 공이 주신 선물에 부끄럽지 않은 의원이 되겠습니다. 그 말에 또 다시 눈물이 그렁한 눈을 한껏 휘어 곱게 웃어 보이는 택이었다. 자꾸만 욕심이 나는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저를 향한 마음을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택이기에 더 그랬다. 감출 줄을 모르는 맑은 사람이라 더 욕심이 났지만, 정환은 참고 견디는 것에 능했다. 그저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허나 왜 우리는 모든 것에 그토록 쉽게 익숙해지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익숙해진 것들에 대해선 그것이 당연히 계속될 거라 믿고 마는 것일까. 왜 즐거운 상상은 언젠가 현실이 될 거라 기대하면서 불길한 상상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어 버리는 것일까. 참으로 어리석지 않은가, 어차피 확률은 같은 것을. 총명하기가 이를 데 없다는 정환도 마찬가지였다. 택과 함께하는 것에 익숙해져 그것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줄만 알았다. 미련하게도 말이다.

 

 * * *

 

 수업 중인 학당에 문도 두들기지 않고 뛰어든 궁인이 효경공이 심하게 다쳤다며 알렌을 잡아끌 때부터 정환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알렌을 따라 진료실로 달려가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청국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며 혹시 필요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 택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얼마나 오래 가 있느냐고 묻자 달포는 족히 걸릴 것이라며 시무룩해 하기에 며칠 전 장에 갔다가 택이 좋아했던 게 떠올라 사두었던 화과자를 꺼내 주었더니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신기해 넋을 놓고 보았던 게 마지막이었는데. 이렇게 재회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천으로 묶어 지혈을 한 듯했지만 이미 오른쪽 옆구리를 중심으로 온 몸이 피범벅이 된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믿기지가 않았다. 환한 햇살 같기만 하던 얼굴이 캄캄한 밤을 닮아 있었다. 정환이 넋을 놓고 있자 함께 달려온 동룡이 궁인들을 붙잡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청국에서 왕실에 보낸 물건을 가지고 궁으로 향하던 중 도성 초입에서 복면을 쓴 도적떼의 습격을 받아 칼에 찔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 선생, 정신 차리고 지혈 준비해요! 일단 부상 부위를 봐야 해요! 유 선생은 혹시 모르니 수술 준비를 해 줘요! 네, 원장님. 묶어둔 천을 풀어내고 옷을 가위로 잘라내자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환은 속이 울렁이는 느낌에 마른침을 삼켰다. 알렌을 도와 큰 외과 수술도 몇 번이고 잘 해냈었건만 택의 하얀 몸이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은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상처를 살피는 알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김 선생, 안 되겠어요. 수술실로 옮기죠. 바로 옆방인 수술실로 옮기는 그 잠깐 사이에 들것이 피로 물들 정도로 출혈이 심했다. 급히 마취를 하고 수술을 하는 내내 정환은 울렁거리는 속을 꾹 참고 알렌을 보조했다. 마침내 봉합에 들어가고서야 한 발짝 옆으로 물러난 정환이 수술대 밑으로 툭 떨어져 있는 택의 손을 멍하니 보다 조심스레 잡아 수술대 위로 올려주었다. 그 차가운 감촉에 정환은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넓은 침상이 있는 회복실로 택을 옮긴 후, 때마침 도착한 파리한 안색의 중전과 고종을 맞이한 알렌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래, 효경공의 상태가 어떠한가.”

 “...다행히 장기가 크게 손상되진 않았으나 출혈이 너무 심했습니다. 많이... 위독하신 상황입니다. 소생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방법이 없겠는가.”

 

 정환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느낌에 아무도 모르게 벽을 짚고 겨우 중심을 잡았다. 휘청거리는 중전을 급히 부축한 고종이 침통한 표정으로 묻자 잠시 망설이던 알렌이 뭔가를 결심한 듯 단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전하, 수혈밖엔... 방법이 없습니다.

 

 “수혈이라니?”

 “몸에 피가 부족할 때, 다른 사람의 피를 나눠받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저희 본국에서 시행된 사례가 있다고 들었을 뿐, 저도 직접 해 본 적은 없는 시술입니다. 하지만 지금 효경공에겐... 그 방법뿐입니다.”

 “....할 수 있겠는가.”

 “............해 보겠습니다.”

 

 수혈이라니. 남에게서 피를 받는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란 것도 잠시, 정환은 한밤중처럼 어둡던 택의 얼굴을 떠올렸다. 피를 받으면... 살 수 있단 말인가. 공을 살릴 수 있단 말인가. 고종이 뭐라고 답하기도 중전이 단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해 주세요, 알렌 원장. 중전 마마. 제 피를 주겠습니다, 그러니 해 주세요. 그 말에 정환이 고개를 번쩍 들고 중전과 알렌을 번갈아보았다. 한 줄기 희망에 호흡이 가빠졌다. 하지만 알렌은 고개를 저었다.

 

 “검사를 해 봐야 합니다, 마마.”

 “검사라니, 한 핏줄인 내가 피를 주는 것에도 검사가 필요하다는 건가요?”

 “사례를 보면... 서로 잘 섞이는 피가 있고 그렇지 않은 피가 있습니다. 그건 가족 관계와는 무관했습니다, 마마. 이 방에 있는 모두가 검사를 해서 가장 잘 섞이는 피를 수혈해야 합니다.”

 “....알렌 원장. 내 자네를 믿는 것을 알고 있겠지. 자네를 믿었기에 이 제중원을 세운 것이네.”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

 “.......자네를 믿고 허락할 테니 부디... 효경공을 살려 주시게.”

 

 페트리 접시와 채혈용 바늘을 준비한 알렌이 한 명씩 손가락에서 채혈을 하기 시작했다. 옥체에 상흔을 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건 택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민 것이 무색하게 고종과 중전의 피는 택의 피와 섞이기가 무섭게 굳어졌다. 검게 굳어가는 피가 마치 택에게 내려지는 사형선고 같아서 가슴이 답답했다. 표정이 어두워진 알렌이 동룡과 제게 다가왔지만 정환은 선뜻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김 선생, 자네 왜 그러나. 먼저 채혈을 마친 동룡이 정환에게 다가와 고종과 중전의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어서 손을 드리게. 잠깐 따끔할 뿐이야. 속도 모르고 엉뚱한 걱정을 하는 동룡에게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두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마주잡은 채 버티던 정환은 결국 마지못해 알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피가... 내 피를 효경공에게... 아니, 그런 일은 없을 테지. 내 피가 효경공의 피와 맞을 일은 없을 거야. 바늘이 손가락을 찌르고 나가도 긴장감 탓인지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곧, 페트리 접시 위의 혈액 반응을 지켜보던 모두의 시선이 정환에게 향했다. 피붙이인 중전도 고귀한 국왕 전하도 내로라하는 양반가 자제인 동룡도 아닌, 오직 저의 피만 굳지 않고 택의 피와 섞여들고 있었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뻐하는데 오직 정환만 온몸이 굳어 맑게 섞인 핏방울을 바라보았다. 내 피가... 효경공의 피와... 같아...? 혼란에 빠진 정환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모두 수혈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손상 없이 피를 보관할 방법이 없기에 정환의 혈관과 택의 혈관을 직접 연결하고, 택이 누워있는 회복실 침상보다 높은 곳에 정환을 눕혀 피가 흘러들어갈 압력을 주기로 했다. 알렌과 동룡은 수술실에서 도구를 챙겨오고 사랑채 식구들은 의생당에서 이층침대를 꺼내 택이 있는 회복실로 가져왔다. 고종과 중전은 궁인들의 권유에 일단 궁으로 돌아가 소식을 기다리기로 했다.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 오직 정환만, 멍하니 페트리 접시에 하나로 섞인 핏방울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효경공도 중요하지만 김 선생의 몸도 중요해요. 어지럽거나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으면 바로 말해야 합니다. 알겠죠, 김 선생?”

 “....예.”

 “자, 그럼 팔을 주세요.”

 

 이층 침대의 위층에 누워있던 정환이 선뜻 팔을 내밀지 않자, 알렌이 다시 한 번 김 선생, 하고 정환을 불렀다. 분명 제 피와 택의 피가 무리 없이 섞여드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망설이는 정환에게, 보다 못한 동룡이 호통을 쳤다.

 

 “자네 정말 왜 이러는 건가, 아까부터! 피가 아까운 건가, 아니면 자네 몸이 상할까 걱정이 되는 건가! 대체 자네답지 않게 왜 이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효경공의 목숨이 달린 일이네! 오로지 자네 피만 효경공을 살릴 수 있다는데, 그걸 못 주겠다는 건가? 효경공을 살리고 싶지 않다는 거야?”

 

 동룡의 말에 정환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내 피로... 감히 내 피로 효경공을 살릴 수 있다니. 내 피로만 그분을 살릴 수 있다니. 눈을 질끈 감고 깊게 숨을 한 번 내쉰 정환이 천천히 팔을 내밀었다. 언제 그렇게 흔들리고 망설였냐는 듯, 평소의 침착한 눈빛으로 돌아온 정환을 보며 동룡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정환의 정맥에 고무관을 연결하고, 택의 혈관에도 고무관을 연결한 알렌이 두 관을 연결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정환에게 다짐을 받았다.

 

 “명심해요, 김 선생. 어지러우면 바로 이야기하세요.”

 “......예.”

 

 두 관이 이어지자 아주 서서히 몸에서 피가 흘러나가는 게 느껴졌다. 정환은 피가 더 잘 흘러나갈 수 있도록 고무관을 연결한 팔을 주물렀다. 부디, 이것으로 당신을 살릴 수 있다면. 모로 누운 정환은 수혈이 진행되는 내내 한 번도 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감히 내 천한 피로 당신을 살릴 수만 있다면... 한참 후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고, 더 한참이 지나 온 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 때까지 정환은 계속 팔을 주물러댔다. 김 선생! 김 선생, 정신 차리게! 아이고, 이 미련한 사람아! 동룡의 외침이 아득하게 들릴 때쯤, 결국 정환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너 또 김 선비님을 귀찮게 하고 있었구나! 김 선비가 짚는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던 어린 소년이 후다닥 김 선비의 뒤로 숨었다. 창백한 안색의 김 선비가 웃으며 성을 내는 아이를 다독였다. 괜찮다, 환이가 얼마나 영민한지 가르치는 내가 다 즐겁구나. 환이라니요, 선비님? ...작년에 세상을 뜬 내 아들 녀석의 이름이란다. 너는 정이, 네 동생은 환이, 한 글자씩 나누면 내 너희를 부를 때도 좋지 않겠니. 더 야단을 치려던 조금 덜 어린 소년도 제게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 신기했는지 입술을 우물거렸다. 김 선비 뒤에서 빼꼼이 고개를 내민 동생에게 그래도 백정이 글을 배워 무에 써. 선비님 그만 괴롭혀, 너. 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아까처럼 날이 서 있지만은 않아 김 선비는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 쉬쉬했지만 백정 마을에 병이 든 양반들이 가끔 기거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천한 백정들의 수발을 받으며 좋은 고기를 먹고 암암리에 생간이나 염통 등의 내장으로 기를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악덕하게 구는 양반이 대부분이었으나 가끔, 아주 가끔은 이렇게 김 선비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세 번째 이곳에 온 김 선비는 이번이 마지막임을 직감이라도 한 듯 초연한 모습이었다.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다른 양반들과 달랐다. 앞집 아주머니가 끓여온 고깃국을 올린 상을 고사리 손으로 들고 들어온 어린 환이 선비님, 잘 드시고 어서 나으셔야지요. 해도 아들을 앞세운 아비가 무슨 낯으로 살려 하겠느냐. 하며 힘없이 웃을 뿐이었다. 아직 어려 도축장에 나가지 않는 환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정이 받아온 소가죽에 야무지게 바느질을 해 가죽신을 짓는 환이를 구경하는 것이 김 선비의 일과였다. 손재주가 정말 좋구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쑥스러워하며 몸을 배배 꼬아댔지만, 실제로 환이 지은 가죽신은 장에서도 꽤나 비싼 값에 팔리곤 했다. 김 선비가 환의 집에 온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 즈음에 갑자기 몸져누운 형을 대신해 도축장에 나가기 시작했을 때에도 환은 그 고단한 삶이 당연하다는 듯 적응해 나갔다. 금세 일어나겠거니 했던 정은 몇 해가 지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환은 듬직하고 훤칠한 소년으로 자라났으나 늘 방에 누워있던 정은 점점 더 수척해졌다. 미안하다, 환아. 나 때문에 힘들지. 내가 얼른 떠나야... 정이 그런 소릴 해도 환은 성을 내거나 울지 않았다. 그저 하던 일을 멈추고 털썩 제 형의 옆에 누워 눈을 마주하며 혀엉, 나 졸리다. 하고 애교를 떨 뿐이었다. 정이 처음으로 각혈을 했던 때, 환은 백정을 받아 줄 의원이 어디 있느냐고 만류하는 마을 어른들을 뿌리치고 정을 업고 달렸다. 가죽신을 팔아 모은 돈을 모두 움켜쥐고 달려갔지만 의원 댁 마당에 형과 함께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기침을 하는 형을 얼른 일으켜 안으며 처음으로 제가 백정이라는 게 한스러웠다. 그리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게 아닌데, 아픈 형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제 신세가 한스러워 형을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서럽게 울었더랬다. 이틀 후, 정은 세상을 떠났다. 눈을 감기 전 정이 마지막으로 환의 손에 쥐어 준 것은 김정환 세 글자가 적힌 호패였다. 김 선비가 남기고 간 것이라 했다. 환아, 이걸 가지고... 사람답게 살아라... 정이 숨을 거두고 일주일 후 환은 옷가지 몇 벌과 정이 쥐어준 호패만 챙겨 미련 없이 마을을 떠났다. 발붙일 곳 없이 떠도는 동안 환에게 남은 건 세상을 향한 원망뿐이었다. 온 세상이 아무런 빛을 띠지 않은 무채색으로만 보였다.

 

 그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엽전 중 하나를 꺼내 주고 탁주 한 사발을 들이키고는 터덜터덜 길을 걷던 중이었다. 길가에 쓰러져 각혈을 하는 한 남자를 발견한 정환이 깜짝 놀라 달려갔다. 행색이 초라한 것이 보나마나 귀한 신분이 아니었다. 제 형의 얼굴이 겹쳐 보여 정환은 남자를 끌어안고 큰 목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이보시오! 사람이 죽어가오! 누가 좀 도와주시오! 남자를 끌어안은 정환의 손이 덜덜 떨릴 즘 누군가 정환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슨... 일입니까. 어딘가 어색한 말투에 얼른 돌아보니 안경을 쓴 양인이 서 있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의사... 의원입니다. 환자를 보여... 주세요? Mr. Choi, please help me. He seems to be shocked too much because of me. 양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하자 뒤에서 딱 보기에도 값비싼 도포를 차려 입은 소년 하나가 나타났다. 윤이 나는 비싼 갓을 쓴 얼굴이 하도 곱고 앳되어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정환은 끌어안고 있던 남자도 잊고 멍하니 그 고운 소년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오랜만에 정환의 세상이 빛깔을 띠기 시작했다.

 

 * * *

 

 고열에 시달리며 하루를 꼬박 앓아누웠던 정환이 눈을 번쩍 뜨며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었지만 방금 전까지 보았던 택의 어렸을 적 모습이 눈에 선해 땀을 닦을 생각도 못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다 옆을 보니 저를 간호하다 잠든 것인지 침상 옆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든 동룡이 보였다. 가만히 동룡을 보던 정환이 덮고 있던 담요를 조심스럽게 동룡에게 덮어주고 방을 나섰다. 걸음을 재촉하고 싶었지만 누워있었던 탓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겨우겨우 회복실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서자 택의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궁인 하나가 화들짝 놀라 인사를 했다.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가서 눈 좀 붙이라고 사랑채로 보내자, 저와 택 둘만 남은 회복실엔 적막이 흘렀다. 천천히 다가가 누워있는 택을 내려다보니 어제 보았던 얼굴보다 훨씬 혈색이 좋았다. 저 귀한 몸 안에서 제 피가 돌고 있다니. 제 피로 혈색을 되찾은 택이라니. 울컥한 마음을 주먹을 꽉 쥐어 억누르며 좀 더 가까이 다가간 정환이 의자를 끌어올 생각도 못하고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얼굴빛이 이렇게 좋은데.... 왜 눈을 뜨지 않는 겁니까, 효경공.”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고열에 신음하며 하루를 꼬박 앓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던 정환이 가만히 택의 손을 끌어다 쥐었다. 그제 수술실에서 잡았던 때와 달리 너무나 따뜻한 손에 가슴 깊은 데서 울컥하고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버티고 또 버티던 정환이 기어이 무너져 내렸다. 형을 업고 섧게 울던 그 어린 날 이후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혹시... 제 피 때문입니까...? 제 천한 피가... 공의 몸을 힘들게 하는 겁니까... 제발... 제발 눈을 뜨십시오, 효경공. 제가 못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거 알고 계십니까? 천한 백정으로 태어난 제가 이렇게 의원이 된 건 모두 효경공의 덕입니다. 그날... 길에서 처음 알렌 원장님과 공을 만났을 때 말입니다. 무언가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공을 보고 처음 했습니다. 무례하지만 그랬습니다. 그 환자를 업고 원장님 댁으로 뛰어갈 때도, 며칠 그 댁에 머물며 치료하는 걸 도울 때도, 자꾸 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알렌 원장님 댁에 신세를 지게 된 후 어깨 너머로 배운 의술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늘 감탄하고 칭찬해 주시는 공의 웃음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양반이건 천민이건 누구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세운다는 공의 말에 처음으로 의원이란 꿈을 품었습니다. 천한 백정이었던 제가 꿈이란 걸 품었습니다, 공 덕분에. 신분과 상관없이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의 의원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 형처럼 신분 탓에 허망하게 죽어나가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고, 늘 응원해주시는 공께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의원이 되었는데... 막상 공을 지키지 못하는 제 심정을 아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하셨지요. 사랑채 식구들이나 의생들이나 효경공이나... 모두 똑 같은 사람이라 하셨지요. 그 말이 거짓이셨습니까. 그래서 제 피 때문에... 일어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제발 눈을 뜨세요, 효경공. 너무 두렵습니다.

 

 “..........................!!.....”

 

 두 손으로 택의 손을 붙잡고 그 위에 이마를 댄 채 눈물을 흘리던 정환이 갑작스레 어깨에 와 닿는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보다 더 젖어있는 택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정환은 정말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들킬 줄은 몰랐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너무 놀란 몸은 뜻대로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택의 손을 놓으려던 손이 오히려 택에게 더 단단히 붙들렸다. 제 손... 따뜻하죠? 정환의 손을 붙잡은 택의 손은 덜덜 떨렸지만 분명 따스하게 온기가 돌고 있었다. 김 선생님 피 덕분이에요. 미약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눈물이 가득하지만 또렷한 눈빛으로, 택은 그렇게 정환을 붙잡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마주보고 있던 정환은 택의 손을 떼어내고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다. 원장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정환이 뿌리친 손이 힘없이 침상에 떨어졌지만 택도 다시 정환을 잡지는 않았다.

 

 그 길로 알렌에게 달려가 택이 깨어났음을 알린 정환은 다시 회복실로 택을 보러 가지 않았다. 알렌이 택의 치료로 바쁜 동안 그 빈자리를 메꾼다는 핑계로 학당에서 의생들의 수업을 보충하거나 진료실에서 환자들을 맞이하거나 하며 며칠을 보냈다. 동룡은 효경공이 죽을 고비를 넘긴 일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정환에게 왜 그러는 건지 이유를 물었지만 정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효경공이 자네를 기다리는 눈치시던데. 한 번 얼굴이라도 비춰 드리게. 그 말에도 아무 반응 없이 서책만 정리하는 정환이었다. 며칠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정환의 모습에 동룡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 그리고 일주일 후, 마침내 이제 효경공이 안전하다고,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정환은 생뚱맞게 알렌에게 휴가를 요청했다. 양산댁과 홍이마저 택에게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정환을 나무랐지만 정환은 다음날 새벽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때에 짐을 꾸려 기어이 제중원 문을 나섰다. 조금씩 제 마음에서 고개를 드는 생각에 확신을 가지려면,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늘 침상에서 하던 아침 명상을 고요한 호수 앞 바위에 앉아 하려니 조금 낯설긴 해도 한결 더 마음이 맑아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렇게 제중원을 나서, 이 호수에서 멀지 않은 암자를 찾아온 게 벌써 달포 전 일이었다. 형의 시신을 거둘 때 도와주셨던 스님이 살던 암자였다. 유교의 그늘에서 불교가 탄압을 받는 시대라 제대로 된 산사 하나 꾸리지 못하고 암자에 기거하셨지만, 어린 환이 보기엔 저와 형을 개돼지 취급하는 유교를 배운 양반들보다 세상을 떠돌다 지쳐 찾아오면 따뜻한 밥 한 상을 차려주는 스님이 훨씬 훌륭한 사람이었다. 스님이 돌아가신 후 불상을 거두어 평범한 암자가 된 이곳은 정환에게 집과 같은 곳이었다.

 

 어린 넋은 넓은 세상을 구경하게 보내줘야 한단다. 마을 어른들이 그리 말하며 제 형의 뼛가루를 강에 뿌리던 때, 어린 정환은 발버둥을 쳐 저를 잡은 손을 벗어나서는 뼛가루 한 줌을 훔쳐 제 주머니에 넣고 달아났었다. 하나뿐인 피붙이와 그리 헤어질 자신이 없어서. 구석에 숨어 엉엉 울던 정환이 움켜쥔 뼛가루를 본 스님은 이곳으로 정환을 데려와 암자 근처 소나무에 그걸 뿌리게 했다. 그래, 세상천지에 발붙일 곳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면서. 명상을 마치고 호수에서 암자로 걸어 내려오는 길에 소나무에 들른 정환이 새벽에 수통에 떠 온 약수를 소나무에 반절 뿌려주고 반절은 제가 마셔 비운 후 그 옆에 팔베개를 하고 벌렁 드러누웠다. 형, 참 신기하지. 내 피로 사람을 살렸다? 그것도 효경공을 말이야. 그분 몸에 내 피가 돌고 있다니, 정말 신기하지? 이제 다음 주엔 다시 돌아가려 해. 신도 거의 다 지었거든. 한동안 안 해 봤는데 아직 녹슬지 않았더라. 정환은 어렸을 적 아픈 제 형 옆에 누웠던 그때처럼 소나무를 바라보며 모로 누워 싱긋 웃었다. 형, 보고 싶다.

 

 누워 있다 깜빡 잠이 들었었는지, 정환이 다시 눈을 떴을 땐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얼굴에 떨어진 빗줄기 탓에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빨리 가라 이거지, 지금? 젖은 얼굴을 닦으며 장난스럽게 소나무 쪽을 흘겨보는 정환의 얼굴에 어릴 적 제 형과 뛰어놀던 환의 표정이 비쳤다. 암자까지 내려오는 잠깐 사이에 빗줄기는 거센 소나기로 변해 있었다. 머리와 어깨가 얼얼할 정도의 세찬 비였다. 걸음을 서둘러 뛰듯이 암자 입구로 들어서던 정환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들어가 비를 피할 생각도 못하고 작은 마루 앞에 쪼그리고 앉아 들이치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덜덜 떨고 있는 얇은 양장 차림의 남자.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있지만, 달포 만에 보는 모습이지만,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너무 오랜만에 불러보려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효경공.”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택이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빗물 탓에 제대로 눈을 뜨기가 어려운지 연신 눈을 비비며 정환을 올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무 말 없이 그런 택을 바라보던 정환이 그새 마당에 생긴 물웅덩이를 그대로 밟으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다가가는 걸음만큼이나 택의 손목을 잡아채 일으키는 행동에도, 제 힘에 딸려 올라온 택을 품에 당겨 안는 행동에도 거침이 없었다. 택의 얼굴이 달아오른 탓인지, 택이 흘리는 눈물 탓인지 정환의 가슴께가 뜨뜻하게 젖어들었다.

 

 온몸으로 비를 맞은 택은 결국 심한 고뿔에 걸려 암자에 앓아눕고 말았다. 정환은 내내 뜬눈으로 택의 곁을 지켰다. 열 때문에 이마에 얹은 수건이 뜨끈해지면 다시 빨아다 얹어주고, 젖은 수건으로 손과 발을 닦아주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도 수시로 정리해주며 지극정성으로 택을 돌봤다. 하지만 사흘을 정신을 놓고 앓아누웠던 택이 힘겹게 눈을 떴을 때 정환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제중원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그날처럼 또 다시 제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방문을 열었는데 슬슬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마당에도 정환이 보이지 않았다. 몸을 끌다시피 마루로 나와 보니 마루 아래에 정환의 신발이 없었다. 제 신발 한 짝만 애처롭게 남아있는 바닥을 보며 조금씩 얼굴을 일그러트리던 택이 결국 마루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또 사라진 걸까. 이번엔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걸까. 이곳도 동룡을 사흘밤낮을 졸라 겨우 알아낸 것인데. 동룡도 정환이 하도 제 얘기를 해주지 않는 게 답답해 어느 날 몰래 뒤를 밟아 겨우 알아낸 곳이라 했는데. 여기서조차 숨어 버리면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그렇게 무너지는 마음 탓에 택의 울음이 커져갈 즘이었다.

 

 “왜 울고 계십니까.”

 “.....!...”

 “잠시 약재를 사러 장에 다녀왔는데 그새를 못 참고 울고 계셨습니까.”

 

 암자 입구로 들어선 정환이 마치 방금까지 말을 섞었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을 붙이며 다가왔다. 택이 쪼그려 앉은 마루에 툭 걸터앉은 정환이 피곤하다는 듯 다리를 두들기다 가만히 손을 올려 택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다 내렸네요. 다행입니다.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눈물만 뚝뚝 흘리는 택을 가만히 보다 안소매를 끌어내어 택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찌 감히 택의 얼굴에 손을 대려 하냐고 스스로를 나무랐던 과거와는 달랐다. 눈물을 닦아준다는 핑계로 잠시 택의 얼굴을 어루만져 보던 정환이 어깨의 봇짐을 내려놓고 방에 들어가더니 새 것으로 보이는 가죽신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마루 밑 흙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택을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손을 내밀자 또 다시 울 듯한 얼굴로 입술을 꼭 깨물며 발을 내주는 택이었다. 정환은 그 발에 제가 며칠 밤을 새 공들여 지은 가죽신을 신겨 주었다.

 

 “잘 맞으십니까?”

 “........네.”

 “효경공께서 좋은 길만 걸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서 지은 신입니다.”

 “..............”

 

 글썽거리는 눈으로 내려다보는 택과 가만히 눈을 마주치다 이번엔 반대쪽 발을 잡고 천천히 신을 신겼다.

 

 “이 신을 짓는 동안 전 백정 환이었습니다.”

 “........김 선생님.”

 “그리고 앓아누운 효경공을 돌보는 동안 전 의원 김정환이었습니다.”

 “............”

 “그 둘 모두가 공을 마음에 품었었습니다, 감히.”

 

 양쪽 발에 신을 신겨주고 매무새를 정리해 준 정환이 천천히 택의 두 손을 제 손으로 감쌌다. 마주잡은 손 위로 택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만 우십시오. 그러다 탈진하십니다. 정환이 택의 손을 더 꼭 잡으며 달랬다. 몸이 조금 가벼워지셨으면 요 앞에 산책이라도 다녀올까요? 얼른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택을 천천히 부축해 마루에서 내려오게 한 정환이 제 도포를 벗어 택의 어깨에 두르고 앞섶을 여며주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이렇게 갈까요? 등을 내보이며 앉은 정환을 바라보던 택이 거절하지 않고 살며시 너른 등에 업혔다. 등에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정환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제 피를 주어서 살려냈다. 지금도 제 피가 돌고 있는 심장이 택을 이렇게 따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정환은 제 피와 택의 몸에 흐르는 피가 똑같다는 사실이 그리 벅찰 수가 없었다.

 

 택을 업은 채 암자를 나선 정환이 평소 즐겨 걷던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있는 들과 아침마다 정환이 명상을 하는 호수를 보여줄 땐 등 뒤에서 와아- 하고 작게 탄성이 들려와 정환도 흐뭇하게 웃었다. 여유로운 산책을 마치고 암자로 내려오는 길에 소나무에 들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산길을 걸으며 정환이 나직하게 택을 불렀다. 효경공. 제 옷 호주머니를 뒤져 보십시오. 호주머니요? 예. 가만히 제 등에 고개를 기대고 있던 택이 부스럭거리며 주머니를 뒤지더니 작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팔을 뻗어 주머니를 정환의 앞에 보여주자 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 보십시오. 공께 드리는 것입니다. 잠시 후 짤랑, 하는 소리와 함께 가락지 한 쌍이 택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신을 선물하면 멀리 도망을 가 버린다고 하더군요.”

 “................”

 “그러지 마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김 선생님....”

 “이제 산에서 내려가면 이렇게 공의 곁에 있을 수는 없겠지요. 허나... 공의 뒤에는 항상 제가 있을 것입니다.”

 

 택이 가락지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정환의 목을 조금 더 꼭 끌어안으며 고개를 기댔다. 등이 뜨끈해지는 느낌에 정환은 아이를 달래듯 몸의 중심을 좌우로 옮기며 천천히 길을 걸었다.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에 별이 오르기 시작할 때까지 정환은 택을 업은 채로 한참을 서성였다. 결국 한 번 물길이 난 마음은 걷잡을 수 없었다. 그 동안, 그 긴 시간 동안 아등바등 쌓아올린 둑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는데도 정환은 허망하기는커녕 속이 다 시원했다. 쏟아질 듯한 하늘의 별,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목을 끌어안은 보드라운 팔, 조근조근 귓가에 대고 깊은 속 얘기를 속삭여 주는 예쁜 사람. 모든 게 너무나 행복해서, 그 행복에 금세 익숙해져 버려서, 정환은 그것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거라 믿고 말았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 * *

 

 꿈결에 그대가 울고 있었다

 너무나 서러운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 있는데

 나는 손 한 번 뻗어보지 못했다

 

 인간의 운명이란 본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시작부터가 그러하다. 태어날 것을 예측하고 준비된 채로 세상에 나오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 예측불가의 법칙은 때로 인간을 가장 큰 환희로 몰아넣기도 하고, 그 환희의 정점에 오른 순간 잔인하게 인간을 몰아치기도 한다. 환자를 보던 진료실 밖이 불안하게 시끌시끌할 때부터 어쩌면 제게 그 운명이 찾아왔음을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책상에 벗어두었던 청진기를 얼른 집어 손에 꼭 쥔 것을 보면. 환자나 마을 사람의 행패라기엔 예사롭지 않은 소란이었다. 쾅--! 몽둥이를 든 채 문을 박차고 들이닥친 장정들이 양팔을 단단히 붙잡았지만 정환은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않았다. 장정들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그들을 막아서다 내동댕이쳐지는 알렌 원장과 동룡과 사랑채 식구들을 보면서도, 모든 게 비현실적일 만큼 자연스러웠다. 끌려 나간 바깥마당엔 예상대로 저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백 의생과 그 아비인 백현익 대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멍석과 몽둥이를 든 장정도 서넛이 더 보이는 걸로 보아 모든 걸 알고 작심을 하고 온 게 분명했다. 어떻게 알아챘을까, 효경공의 시중을 들던 궁인 중 하나가 알아챈 걸까. 하긴 이제 와서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왕실보다 더 큰 권세로 조선팔도를 호령한다는 백현익 대감이 작심을 했다면 이미 끝난 얘기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알렌의 항의도 동룡과 다른 의생들과 사랑채 식구들의 멈추라는 만류도 다 소용없을 게 분명했다. 멍석이 깔리고 무릎이 꿇려지고 마지막을 직감한 사랑채 식구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데도 지나치게 평온한 제자신이 스스로도 이상했다. 신분을 속인 이후 수백 번 수천 번 머릿속에 그려본 상황이어서인지 모든 게 무서울 만큼 익숙했다. 다만 한 가지, 그 고운 얼굴을 한 번 더 보지 못하고, 잘 있으라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하고 이리 허망하게 헤어짐이 한스러울 뿐. 그래서 간밤의 꿈에 나타나 그리 섧게 운 것입니까, 효경공. 아니, 택이 도련님. 아니... 택아. 딱 한 번만 불러봤더라면 좋았을 걸. 이제야 겨우 손을 잡을 수 있게 됐는데.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고 이렇게 가면 참 마음 아파할 사람인데. 착한 성정에 원망도 못하고 그저 울기만 할 사람인데. 눈물 한 번 닦아주지 못하고 가니 어쩌면 좋지.

 

 개돼지만도 못한 백정 새끼가 감히 천륜을 저버리고 양반을 기만하고 왕족을 현혹하여...로 시작하는 뻔한 폭언이 이어지고 마침내 정환의 몸이 멍석 위로 팽개쳐졌다. 아무 저항이 없던 정환이 그 순간 갑자기 발버둥을 친 건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발치에 떨어진 청진기를 다시 제 손에 쥐기 위해서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청진기를 끌어오려고 기를 쓰고 발을 뻗어대는 것을 도망치려는 발버둥으로 오해했는지 온몸에 매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지만 정환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았다. 이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이들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다. 안간힘을 쓰며 발을 뻗은 덕에 마침내 발끝에 청진기 줄이 걸리는 게 느껴져 얼른 발을 당기는데 그 다리에 몽둥이가 떨어졌다. 그대로 뼈가 부서진 건지 눈앞이 캄캄해지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정환은 필사적으로 발에 걸린 청진기를 잡아챘다. 마침내 다시 제 손에 들어온 청진기를 품에 넣은 정환이 온몸에 힘을 뺐다. 이걸로 됐다고, 그리 생각하면서.

 

 정신을 놓았다 잡았다 하는 사이 멍석이 다 헤질 만큼 무자비한 몽둥이질이 이어졌다. 그 헤진 틈으로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보였다. 하늘이 너무 파래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파란 하늘에 걸친 구름 사이로 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어미 아비 얼굴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제가 핏덩이 때 이미 세상을 뜬 이들이었다. 고사리 손으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바지런히 일을 해 저를 거둬 먹이는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늘 둥글둥글 웃는 얼굴이었던 우리 형. 홀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형을 기다리다 백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동네 아이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노라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아이들을 쫓아내고 저를 구해주던 형. 그래도 절대로 백정의 업을 거슬러서는 안 돼, 환아. 형이 늘 그렇게 말했었는데, 내가 그 업을 거슬러 이런 벌을 받는 모양이야. 꾸어서는 안 될 꿈을 꾸고, 욕심내선 안 될 사람을 욕심내어 이렇게 큰 벌을 받는 건가 봐. 쿨럭, 하고 피가 토해져 나왔다. 나도 이제 좀 고단한데, 형. 이렇게 눈을 감으면 이제 형을 만날 수 있으려나. 형은 아이 때 모습 그대로겠지. 내가 너무 커 버려서, 나 혼자 좋은 시절 누리며 이렇게 커 버려서 형이 날 못 알아보면 어쩌지. 형이... 날 미워하면 어쩌지. 파란 하늘이 자꾸만 젖어들었다. 젖은 눈꺼풀이 무거워 천천히 눈을 감는데 양산댁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홍아--!!! 안 돼!!! 분명 온 몸에 감각이 없었는데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홍이야!! 그만두시오! 어린 아이잖소!!!! 양산댁, 정신 차리게!! 무자비하게 몽둥이를 내리치던 장정들도 갑자기 달려 나와 정환의 몸을 덮고 엎드린 꼬마에 주춤한 기색이었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홍이를 떼어내려는데 고 조그만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악착같이 저를 끌어안고 버틴다. 홍아... 안 돼. 타이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서로 눈치만 보는 장정들 뒤에서 백 대감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서 밤이라도 샐 작정들인가! 그 말에 피에 젖은 정환의 입가에 헛웃음이 걸렸다. 그래, 당신이 보기엔 이 꽃 같은 아이마저 벌레보다 못한 천한 존재인 게지. 당신도 참 불쌍한 인생이군. 고개를 돌리고 입에 고인 비릿한 핏덩이를 뱉어낸 정환이 헤어진 멍석 틈 사이로 팔을 내밀어 제게서 떨어지지 않는 홍이를 품으로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모아서, 부러지고 부서져 말을 듣지 않는 몸을 필사적으로 굴렸다. 홍이가 아무리 악을 쓰고 울며 발버둥을 쳐도 사력을 다해 저를 끌어안고 엎드린 정환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쿨럭, 정환이 다시 한 번 피를 토했다. 끝까지 뒤에 있겠다고 약조했는데 그 약조를 저버리고 가는구나. 그래도 홍이야, 내 너 하나는 품어 지킬 수 있으니 그런대로 괜찮은 마지막 아니겠니. 희미한 미소를 지은 정환의 눈앞이 서서히 흐려졌다.

 

 * * *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눈을 뜨는 게 몇 번째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 멍석말이를 당했다 들었다. 그래서 어찌됐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려주는 이가 없어 몇 번이나 주사 바늘을 빼고 방에서 나가려 한 탓에 기어이 사지가 침상에 묶이고야 말았다. 그 이후 택이 하는 일이라곤 머리맡에 놓인 가죽신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 정신을 놓는 것뿐이었다. 중전마마께서 드십니다. 수발을 들던 궁인 둘이 얼른 일어서 예를 갖췄다. 컴컴한 방에 사지가 묶인 채 시체처럼 누워있는 택을 본 중전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다들 물러나 있게. 한참을 가만히 택을 바라보던 중전이 침상 옆의 의자에 앉아도, 택은 잔뜩 부은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볼 뿐이었다.

 

 “효경공.”

 “........”

 “김 선생은 멀리 떠났다.”

 “.........!!...”

 

 여전히 시선은 천장에 둔 채였지만 떨리는 눈동자까지 숨길 순 없었다. 손이 묶여 있어 미처 닦지 못했을 눈물을 천천히 닦아주는데 오히려 눈가가 점점 더 젖어왔다. 그래도 민씨는 멈추지 않고 부드럽게 택의 눈물을 닦아주고 젖은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받아보지 못했을 어미의 손길을 대신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만히 택의 얼굴을 어루만져주던 민씨가 천천히 택의 손과 발을 묶은 끈을 하나씩 풀었다.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니 절대로 끈을 풀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어의가 몇 번이나 당부를 했었지만 민씨는 개의치 않았다. 묶인 자국대로 멍이 든 것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쓸어주다 효경공, 하고 부르자 택의 눈이 서서히 저를 향했다. 반짝거리던 총기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검게 죽어있는 눈동자를 마주보던 민씨가 택의 어깨를 받치고 일으켜 앉혔다. 마른 몸이 아무 저항도 없이 딸려오는 게 안쓰러웠다.

 

 “.....따라 가거라.”

 “..........!...”

 “.....김 선생을 따라 가야 네가 마음 편히 웃지 않겠느냐. 그러니... 그리 하거라.”

 “....................마마....”

 

 이 미련하도록 착한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비록 평범한 사람들처럼 품어 안고 키우진 못했지만 스무 해 가까이 제 자식으로 여기고 돌봐 온 민씨가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제가 무책임하게 떠나 버리면 왕실이 타격을 입을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울컥한 민씨가 택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택의 귓가에 속삭였다. 택아. 처음으로 불리는 제 이름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어미와 아비를 잃은 후론 아무도 그렇게 불러주는 이가 없었기에 너무나 생소했지만, 동시에 너무나 따뜻한 느낌이었다.

 

 “......택아.”

 “.......흐흡......”

 “....네가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나타났던 날을 기억하니?”

 “...........그럼요.”

 “넌 선교사들이 멋져 보여서 따라 잘랐다고 했지만, 단발령 압박에서 왕실을 자유롭게 해 주려고 나선 것이란 걸 전하도 나도 알고 있단다.”

 “...............마마....”

 “.....할 만큼 하였다, 택아. 일생을 왕실에 보탬이 되려고 애써 왔잖니.”

 “.......”

 “이제... 그만 고단해도 된다, 택아. 할 만큼 했어.”

 “.....흡,......흐윽.... 마마......”

 “왕실 기록은... 내 알아서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병으로 떠난 것으로 하면 된다. 왕실에 누가 될까 그런 걱정은 그만하고, 미련 없이 떠나거라.”

 

 오열을 터뜨리는 택을 더 깊이 끌어안으며 민씨가 허망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호를 잘못 지었구나. 효경이라니. 새벽빛이라 이름을 붙여 내 너를 이리 짧게 보는 모양이다, 택아. 민씨는 택의 오열이 잦아들 때까지 묵묵히 등을 쓸어주었다. 가여운 것, 가여운 녀석. 속으로만 수백 번 수천 번 되뇔 뿐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가거라, 택아. 너의 결심이 무뎌지고 나의 결심이 무뎌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게 겨우 이것뿐이라 미안하구나. 부디 잘 가거라, 택아. 그곳에선 꼭 행복하려무나.

 

 * * *

 

 봄이 왔다고는 해도 새벽의 강바람은 아직도 코가 시릴 정도였다. 이른 새벽인데도 청국에서 배가 들어오는 날이어서인지 나루터에는 이미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 배를 타고 청국으로 가려는 사람,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등 저마다 사연도 다양했다. 그 중 멋들어지게 양장을 차려 입은 앳된 여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제는 양장을 차려입은 조선인을 보는 게 꽤나 흔한 일이었지만, 여자치고 훤칠한 키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눈이 가는 여자였다. 꽃 장식이 달린 모자를 고쳐 쓰고 추운지 연신 손을 비비며 입김을 불어넣는 여자를 알아보는 사람도 몇몇 있는 눈치였다. 일보에 나왔던 여류 작가 최홍연 아니야?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와도 여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강 저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여자가 마침내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뱃머리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루에 배가 닿자 더욱 몰려드는 인파를 거침없이 헤치고 들어간 여자가 한참을 두리번거리더니 누군가를 발견하곤 생글생글 웃으며 한달음에 달려갔다. 유 역관님! 커다란 짐을 등에 맨 장정들을 거느리고 천천히 배에서 내리던 중년의 남자가 여자를 발견하곤 씨익 미소를 지었다. 동그란 안경 탓인지 어딘가 장난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화려한 도포 자락이 물에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내려온 유 역관이라는 자가 제게 달려와 폴짝 안기는 여자의 등을 토닥이며 능글거렸다. 아니, 임자도 있는 다 큰 처녀가 이래도 되는 건가? 반가워서 그러지요, 반가워서. 역관님도 참. 이야, 그나저나 최 작가님 미모가 점점 물이 오르십니다. 유 역관님도 여전히 멋쟁이시네요, 의생 시절에도 그러셨지만.

 

 짐을 든 장정들을 먼저 보내고 여자와 함께 근처 찻집에 자리를 잡은 남자가 제 가방을 열자 여자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그게 귀여워 피식 웃은 남자가 묵직한 책 세 권을 꺼냈다. 여자가 부탁한 청국의 책들이었다. 딱딱한 표지의 책들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살펴보는 여자는 한껏 들뜬 얼굴이었다. 남자는 탁상 위를 톡톡 두들겨 온 신경을 책에 쏟고 있는 여자의 주의를 끌었다. 한 권 더 있는데. 의아한 얼굴로 책을 받아든 여자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치 커졌다.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1st Edition> 세상에! 초... 초판이에요, 역관님! 이 귀한 걸 어떻게! 입을 다물지 못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책장을 넘기며 연신 감탄을 하는 모습에 차를 한 모금 넘기던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좋으냐?”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역관님? 헌데 이걸 왜 제게...”

 “혼인 선물이다. 다음 달이지?”

 “.......유 역관님.”

 “선물이... 하나 더 있단다.”

 

 남자가 품에서 꺼내 내민 것은 하얀 봉투에 담긴 서찰이었다. 봉투를 받아드는 여자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가 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찻잔을 마저 비운 남자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서찰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를 불렀다. 최 작가, 책도 읽어야 하고 서찰도 읽어야 하고 바쁠 테니 오늘은 이만 일어설까. 달포 후에 다시 청국에 갈 계획이니 그 즈음에 다시 만나자꾸나. 예, 유 역관님.

 

 장터 어귀의 국밥집은 점심 때가 조금 지난 시간임에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책을 품에 안은 여자가 뛰어 들어오자 국밥을 말던 어미의 표정이 호랑이처럼 변했다. 홍연이 너, 한창 바쁜 때에 또! 알았어요, 알았어. 금방 내려올게요. 밖에서야 제법 이름이 알려진 손꼽히는 여류 작가지만 장터 국밥집에선 그저 부지런하고 손이 야무진 딸내미에 불과했다. 또 책을 들여다본다고 꾸물거리기만 해! 아이, 참. 알았다니까요, 어머니. 한달음에 집으로 이어지는 쪽문을 열고 들어간 여자가 아끼던 구두도 대충 팽개쳐 벗어두곤 얼른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고 있던 책을 던지듯 탁상 위에 내려놓고 숨을 고른 여자가 품에서 가만히 서찰을 꺼내 들고 그 앞에 앉았다. 찻집에서 손을 떨며 넘겨보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초판도 찬밥신세였다. 탁상 앞에 앉아 조심조심 봉투를 열고 서찰을 꺼내는데 웬 가락지 한 쌍이 탁상에 떨어져 구른다. 희귀한 보석 반지도 아니고, 별다른 장식도 없는 밋밋한 가락지일 뿐인데 그걸 주워드는 여자의 손이 떨렸다. 익숙한 가락지 두 개를 한 손에 소중하게 그러쥔 여자가 천천히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 길지 않은 서찰이었지만 숨소리마저 죽이고 한 글자 한 글자 아껴 읽는 여자였다. 눈물을 떨구다가 또 환히 웃음을 짓다가... 마침내 마지막 줄까지 읽고 났을 때는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었지만 표정만은 환했다. 씩씩하게 눈물을 닦은 여자가 침상 밑을 더듬어 붉은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색이 바랜 서찰 꾸러미가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다. 꾸러미 맨 위에 방금 읽은 서찰을 소중히 갈무리해 넣은 여자가 봉투 겉면에 적혀 있는 최 홍연 작가님께, 라는 익숙하고 단정한 필체를 몇 번이고 쓸어보았다. 얘, 홍연아! 너 정말! 너 또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지! 아니에요, 지금 가요, 어머니. 밖에서 들려오는 제 어미의 호령에 다시 한 번 눈물 자국을 손으로 쓸어낸 여자가 상자를 다시 침상 밑으로 밀어 넣고 씩씩하게 달려 나갔다. 다음번엔 꼭 하얀 수국 사진을 보내드려야겠다, 생각하면서.

 

 

 

 

 

 

 

홍이야, 그간 잘 지냈니. 아니지, 최홍연 작가님, 잘 지내셨는지요.

이렇게 부르면 또 어릴 때처럼 팔짝팔짝 뛰며 성을 내겠지. 참 귀여웠는데, 우리 홍이.

지난번에 보내 준 사진 잘 받았어.

우리 홍이가 벌써 시집을 간다니 어찌나 가슴이 벅차던지.

신랑 될 분이 웃는 것도 선하고 인상도 좋던데 김 선생님은 연신 트집을 잡으셨단다.

어렸을 때 자기와 혼례를 올리겠다고 그리 고집을 피우더니 그새 마음이 변했냐면서.

그런 농을 다 치고, 김 선생님도 정말 많이 변하셨지?

너를 참 많이 보고 싶어 하셔. 나도 마찬가지고.

홍이 네 혼인 선물인데 더 좋은 것을 사서 보내자고 하시는 걸 내가 고집을 피웠어.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김 선생님과 내가 처음 나눠 끼었던 가락지란다.

홍이라면 이걸 더 소중히 여길 것 같아서. 내 생각이 맞지?

좋은 날 함께하면 더 좋았으련만, 이곳에서나마 온 마음으로 함께할게.

 

조선에는 이제 봄이 완연하겠구나. 제중원 안마당에 피던 하얀 수국이 참 그립다, 홍아.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올까.

청국은 여전히 겨울처럼 매서운 바람이 불지만, 그 바람이 늘 머리를 맑게 해 준단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을 하며 살고 있다. 너도 그렇길 바라.

또 소식 전해주렴. 참으로 보고 싶다, 홍이야.

 

 

추신

기쁜 소식이 있는데 깜빡할 뻔 했구나.

김 선생님이 드디어 지난달에 영국에서 수술을 받고 오셨단다.

경과가 좋아서 꾸준히 재활 치료를 하면 예전처럼 걸을 수 있을 거래. 정말 잘됐지?

몸이 불편하다고 어찌나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리시는지,

홍이 네가 이걸 못 보는 게 아쉽다.

그래도 이제 제 다리 하나 못 고치며 의원을 한다는 놀림은 덜 받겠지.

환자가 더 늘면 김 선생님이 더 고단해지실 텐데, 벌써 걱정이다.

아이 참, 선생님이 찾으셔서 이만 줄여야겠다.

수국만큼 네가 그립다, 홍아. 건강하렴.

 

 

 

 

 

 

 

 

*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이었던 제중원, 그리고 백정 출신으로 제중원을 통해 양의사가 된 실존 인물 ‘박서양’이 모티프이며, 대부분 기록을 참조한 허구이나 수혈 장면, 해부학 시험 장면 등은 같은 제목의 드라마 <제중원>을 참고했습니다.

*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중원 1차 년도 보고서 영문판, TV 다큐 <제중원 X-파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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