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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하던 기자회견장 내부가 돌연 시끄러워진다. 소란스러운 기자회견장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와 단상 앞에 서니 카메라의 플래시들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뒤에 위치한 모니터에 꽃가지의 모습을 한 낡은 머리장신구 사진이 띄워지고 그 아래 화국의 유물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자리를 잡는다. 남자가 손으로 모니터를 가리키며 화국과 장신구의 주인으로 알려진 후궁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는 점점 더 상기되어간다. 이야기를 끝마친 후 한참을 기자들의 질문세례를 받던 남자는 질문의 답도 다 마치지 못한 채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자회견장을 나서고 곧이어 기자들도 자신들의 짐을 챙겨 모두 자리를 떠난다. 모두가 떠난 불 꺼진 회견장에는 장신구 사진을 띄운 모니터만이 빛을 발하고 어느새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향그러운 꽃향기들이 아름아름 들어와 모니터의 주위를 감싸며 어두운 회견장 안을 가득 채워 나간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창을 활짝 열고는 창 앞에 자리한 사내의 옆선이 퍽 아름답다. 눈을 감은 채 햇살을 느끼고,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로 실내와 폐 속을 가득 채우려는 듯 보이는 것이 어쩐지 서글퍼 보이지만 또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워 아무도 그런 사내의 행동을 말리지 못한다. 그렇게 모두 숨을 죽인 채 사내를 바라본지 얼마나 되었을까? 문밖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가 돌연 내부를 울렸다.

 "화비마마 황제폐하께오서 드십니다!!"

 목소리의 울림이 멎기도 전에 큰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황금색의 용포를 입은 사내가 순식간에 안으로 들어온다. 사내는 곧장 창가로 향하여 꽃향기를 들여오던 창을 굳게 닫아 버렸고 방에 있던 모두가 그 소리에 몸을 떨며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숨을 죽였다. 그러나 창 앞에 앉아있던 사내는 그 큰소리에도 놀라지 않고 느릿하게 감고 있던 눈을 떠 용포를 입은 사내를 가만히 응시한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용하게 말했다.

 "황상폐하 오셨나이까."

 소름끼치도록 청명한 목소리였다.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악기소리로 착각할 정도의 소리였다. 왜인지 청명함속에 눈물을 숨기고 있는 듯 들렸으나 아무도 그 눈물을 눈치 채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목소리였다. 그처럼 맑은 목소리와 다소곳한 인사에도 용포를 입은 사내는 한참동안 입을 닫고 창 앞의 사내를 내려다보기만 할뿐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황제라 불린 그 사내는 창가에 있던 화비라는 사내의 옆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창은 어이하여 열고 있었던 것이냐. 또다시 고뿔에 걸려 나를 신경 쓰이게 할참이었느냐?"

 "그저 꽃향기가 좋아서 그랬나이다."

 차갑고 딱딱한 말투였으나 말에는 걱정이 서려있었다. 그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비는 태연하고 담담하게 대꾸를 할 뿐이었다. 그러한 태도에 황제는 인상을 찌푸렸고 따지듯 쏘아 붙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아랫것들을 시켜서 꽃을 꺾어 방으로 대령하라 명하면 되는 것 아니냐? 그런데도 어찌 창문을 열고 있어 과인에게 심려를 끼치려는 것이냐!"

 처음에는 인상만 찌푸렸지만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황제의 모습에도 화비는 눈 한번 꿈쩍하지 않고 쓸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꽃을 꺾어 화병에 꽂아둔다면 쉽게 시들지 않습니까. 소첩의 욕심 탓에 화병에서 시들어 가는 꽃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 소첩의 행동이 심려를 끼쳐드렸다니 그저 송구스럽나이다."

 분명 사죄를 하고자 한 말이나 그 말속의 가시가 황제의 심장을 매섭게 파고들었다. 심장을 후벼 파는 그 가시가 참고 있던 황제를 폭발하게 만드는 불꽃이 되었다. 황제의 눈빛은 화비를 죽여 버릴 듯 노려보았으나 화비는 황제의 얼굴조차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런 화비를 노려보던 황제는 거칠게 손을 뻗어 화비의 머리채를 잡아 그를 일으켰고 힘없이 딸려온 화비의 얼굴을 돌려 자신과 강제로 눈을 맞추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분노로 인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맹수처럼 사납게 말했다.

 "꽃이 욕심 탓에 시들어 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좋은 말이군, 헌데 과인은 화비처럼 심성이 곱지 못하다. 해서 과인이라면 화병의 그 꽃이, 시들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야. 박제를 하던, 약들을 들이붓던! 절대로 나의 눈앞에서 시들지 못하게! 그리 만들어 항상 곁에 둘 것이란 말이다."

 "..."

 황제는 폭풍과 같이 말은 쏟아낸 후 텅 빈 화비의 눈동자를 마주했고 곧 손에 쥐고 있던 그의 흑단 같은 머리칼을 바닥을 향하여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오늘부로 화비최씨를 별궁에 유폐한다! 짐의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누구도 이 전각 밖으로 나가지도, 전각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폐하!”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이도 없이 성큼성큼 문을 나섰다. 황제의 일행이 문밖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벽에 붙어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상궁과 궁녀들이 뛰어와 조심스럽게 화비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침상으로 부축해 그 위에 앉힌 후 주인의 몸에 생체기가 나지는 않았는지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모두 자신의 몸을 살피기 바빴으나 정작 본인은 황제가 나간 문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고 한동안 상궁들의 질문에도 입을 닫은 채 문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였다.

 같은 시각 화비의 전각인 별궁을 나온 황제는 후원의 호수 쪽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 호수에 도착하자 황제는 뒤따르던 내관과 궁녀들을 모두 물린 후 호수에 떠있던 쪽배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지체 없이 노를 저어 호수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연꽃군락으로 배를 움직였다. 그곳에 도착한 후 황제는 아직 피지 않은 작은 연꽃봉우리를 한참동안 쓰다듬었다. 계속하여 황제가 나간 문만을 애처로이 쳐다보던 화비의 머릿속에도, 한참을 서글픈 눈으로 연꽃만을 들여다보던 황제의 머릿속에도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라는 대답할 수 없는 물음만이 메아리치며 서로를 향해 굽이쳤을 뿐이었다.

 

 그들에게도 따뜻했던 시절이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이 봄 햇살과 같았고, 서로를 향해 흐르던 마음을 모르는 척 하지 않았던 그런 시절이 그들에게도 있었다. 그때의 황제는 화비에게 정환 이었고, 화비는 황제에게 택 이었다. 그런 시절이 분명히 그들에게도 존재 했었다. 그런 그들을 서로 등 돌리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던 그날은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의 끝자락 이었고, 그 사건의 중심에 서있던 인영, 그녀는 택이 유난히 아끼던 궁녀 아이였다. 그녀는 택의 시비였다. 어린 시절 택이 사가에 있을 때부터 택을 모시던 그녀는 후궁에 간택 된 택을 따라 황궁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인영은 언제나 택의 곁에 있었고 택도 그녀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밝고 아름다운 그녀를 좋아했다. 하지만 정환은 항상 그런 인영의 모습들은 매서운 눈으로 쫓았다. 그녀가 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자 얼굴을 붉히는 그 모습 까지도, 하지만 정환은 택이 그녀를 아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벌하지도 그 사실을 택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다만 언제나 그녀를 예의주시하며 택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듯 다정하게 웃어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황궁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화비 택과 그의 시녀인 인영이 사실 연인관계라는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그런 소문이었다. 자극적인 소문일수록 관심이 쏠리는 황궁이었기에 그 이야기는 황궁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얼마가지 않아 황제의 처소의 나인들 에게까지 들어갔다. 나인들은 황제가 없을 때마다 그 이야기를 재잘거렸고 그 날도 정환이 조회에 간 틈을 타 자신들끼리 그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던 참이었다. 한번 시작된 이야기는 한참동안 계속되어 정환이 도착할 시간까지 이어졌고, 이상하게 그날따라 더 큰소리로 떠들던 한 궁녀의 이야기가 때 맞춰 침소에 도착한 정환의 귀에 까지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정환은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그저 항상 얼굴에 피어있던 웃음을 지우고 아무런 감정 없는 표정으로 곁에 있던 호위의 검을 빼내어 함부로 입을 놀린 그녀들의 목을 베었을 뿐. 그는 얼굴에 튄 그녀들의 피를 손등으로 무심하게 닦아내면서 택의 침소로 발을 움직였다. 그 시각 택은 자신의 침소 앞 화단에서 인영과 함께 산책 중이었다. 전날 내린 눈이 만든 설경 덕에 인영이 좋아하는 홍매화와 동백꽃이 눈 부실정도로 아름답게 빛나서, 그래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택이 인영을 이끌고나온 산책이었다. 인영이 좋아할 것을 바라고 나오기는 하였지만 정작 아름다운 꽃들을 보니 정환이 생각나 괜히 발끝으로 눈만 툭툭 치고 있던 택의 시야에 멀리서 자신을 향해 빠르게 걸어오는 정환이 들어왔다. 마침 그를 생각하던 차에 정환을 발견한 택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항해 바쁘게 발을 놀렸고 그로인해 둘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채 열 걸음이 더 남았을까? 택은 그제야 정환의 이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분명 그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택을 느꼈을 터인데 어째서 인지 그의 시선은 계속하여 택의 어깨너머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택이 이상함을 느끼고 무의식 적으로 걸음을 멈추었으나 이미 정환은 그런 택의 옆을  지나쳐 간 후였다.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정환의 행동 탓에 택은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렸고 그런 택의 뒤에서는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의 비명이 굳어있던 택의 몸을 돌리게 했고, 이윽고 그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그를 다시금 굳게 만들었다. 힘겹게 고개를 돌린 그의 떨리는 두 눈동자에 들어온 것은 난도질당한 자신의 두 눈을 부여잡고 울부짖고 있는 인영의 모습과 그런 그녀의 피가 흥건히 묻은 검을 들고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 같은 표정으로 인영을 내려다보고 있는 정환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굳어버린 택은 그만 새하얀 눈밭에 주저앉아 버렸고, 그런 택을 발견한 정환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는 한달음에 달려와 택을 일으켜 세웠다. 피눈물을 쏟으며 눈 위에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인영을 뒤로하고는 말이다. 정환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 마다 붉은 동백들이 한 송이 씩 피어있었고, 인영이 떨어뜨린 피눈물들은 눈 위에서 처절한 홍매화로 피어올랐다. 동백보다 짙은 색의 피로 함뿍 적셔진 손을 뻗어 택을 일으키며 다정하게 묻는 정환에게 택은 가느다란 눈물 줄기를 흘리며 초점 없는 눈으로 물었다.

 “왜... 대체 왜...”

 “택아 괜찮으냐? 어디 아픈 것인 게야?”

 “왜 그러신 겝니까... 저 아이가, 인영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리 만드신 겝니까... 제게는 동생 같은 아이였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

 그런 택의 애끓는 물음에 다정하던 정환의 눈이 다시 빛을 잃었고 정환은 택의 고개를 돌려 초점이 맞지 않던 택의 눈이 자신만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한쪽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을 꺼냈다.

 “이런, 내가 아직 너에게 저년의 죄를 일러주지 않았던 게로구나. 궁금하였느냐?”

 “...”

 “이를 어쩌나, 죄목이 너무 많아 다 이야기 해주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한데... 내 일단 몇 가지만 이야기해 주마.”

 “...”

 “감히 황제의 후궁에게 마음을 품은 죄.”

 “이 무슨...!”

 “그것을 나에게 들킨 죄.”

 “이제 그만...”

 “마지막으로, 그 마음으로 하여금 너를 하찮은 것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한 죄!”

 “이제 제발.. 제발 그만..”

 “그것들이 저년의 죄 이다, 택아.”

 “아아악!! 그만!!”

 정환의 입에서 나온 인영의 첫 번째 죄목에 놀라 눈을 크게 뜨던 택은 정환이 두 번째 죄목을 말하기 시작하자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막으며 도리질을 치기 시작했지만, 정환은 꿋꿋이 말을 이으며 귀를 막고 있던 택의 손들을 떼어내고 도리질을 치는 택의 얼굴을 손으로 고정시켰다. 정환에 의해 얼굴이 고정당한 상태로 계속하여 인영의 죄를 듣던 택은 결국 정환의 말이 끝나자 소리를 지르며 혼절을 하였고, 혼절한 택으로 인해 변했던 정환의 눈빛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며 어의를 데리고 오라는 명을 내리며 혼절한 택을 안아 들어 택의 침소를 향하여 달렸다. 택이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약 한 시진(2시간) 쯤 후였고, 일어난 후 제일 먼저 물은 것은 인영의 소식이었다. 택이 자신의 곁을 지키던 상궁을 붙잡고 계속하여 인영의 소식을 물었으나 상궁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 그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택이 상궁을 붙잡고 늘어진지 얼마나 되었을까? 침전의 문이 열리며 그 사이로 택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정환이 황급하게 들어 왔다. 정환이 침소에 발을 들여 놓기가 무섭게 택은 붙잡고 있던 상궁을 뿌리치고는 정환에게로 달려가 인영의 소식을 묻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환은 마치 그런 택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계속하여 택의 몸 상태 만을 살폈다. 결국 그런 정환의 손길을 뿌리친 택은 다시 정환에게 인영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정환은 택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정스런 목소리로 택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도 그 아이가 보고 싶으냐?”

 “폐하, 인영이 인영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알려 주십시오 폐하.”

 “그래그래, 함께 인영이를 보러 가자꾸나. 내 직접 그 아이에게 대려다 주마.”

 택은 알지 못했다. 다정한 말과 행동 속에서 정환의 한쪽 입 꼬리가 가만히 올라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정환은 택을 부축하여 궁녀들의 숙소근처로 발을 옮겼다. 처음에는 왜 정환이 궁녀들의 숙소 쪽으로 가는 것인지 의아해하던 택도 결국은 인영이 궁녀들의 숙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리라는 헛된 상상을 하며 정환이 이끄는 그대로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둘은 궁녀들의 숙소에 도착을 하였고, 정환은 택을 숙소의 마당 한 가운데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 마당 한 가운데에는 인영이 있었다. 택의 상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 택은 정환을 뿌리치며 인영을 향하여 달려가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인영의 몸을 끌어내리려 안간힘을 썼고, 정환은 한 발짝 뒤에서 그런 택에게 인영의 모습이 그러한 연유에 대하여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놀랐느냐? 그저 궁녀들에게 경계로 삼으라고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을 뿐이다.”

 “인영아.. 폐하 내려 주십시오. 인영이 저 곳에서 좀 내려 주세요..”

 “본래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 그 아이가 너를 만나게 해달라고 빌지 않느냐. 벌을 받고 나서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 한듯하여 조금, 아주 조금 겁을 주었더니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글쎄 자결을 하였지 뭐냐. 그래서 다시 벌을 주는 중 일 뿐이다. 그러니 거기서 그렇게 힘 빼지 말고 이제 그만 처소로 돌아가자 꾸나.”

 “아니야..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자, 택아 이제 그만 돌아가자. 어서 일어나거라. 어서.”

 높이 효수된 인영의 시체 밑에서 주저앉아 있던 택을 일으키며 정환이 말하자 택은 그런 정환의 몸을 밀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 했다.

 “왜!! 도대체 왜 그랬어. 왜!!”

 그러자 정환을 발버둥 치는 택을 안아들고는 택의 침소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택은 더 이상 버둥거릴 힘조차도 없는지 가만히 정환의 품에 안겨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폐하가 원망스럽습니다. 너무나도 원망스럽습니다.”

 “...”

 “그래서 더 이상은 폐하를 제 맘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

 “앞으로 폐하께서는 제게 그저 황제이실 겁니다.

 “...”

 “그리고 저 또한 폐하께 그저 후궁일 것입니다. 반드시 그리 할 것입니다.”

 “해보아라.”

 “예?”

 “어디 네가 나를 벗어 날수 있는지 해 보란 말이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둘은 침소에 도착 하였고, 택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정환은 몸을 돌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택의 침소를 떠났다. 그날 저녁 집무를 보던 정환의 집무실에 갑자기 상궁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처음에는 짜증이 치밀어 그 상궁을 벌할 생각 이었으나 상궁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나서는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택의 침소로 달려 갈수밖에 없었다.

 “폐하! 지금 화비마마께서, 화비마마께서!”

 “화비가 왜?”

 “자..자결을 시도 하셨습니다!”

 침소를 향하여 달려가는 와중에도 정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상궁이 외치던 한 마디 뿐 이었다. 정환이 택의 침소에 도착 하였을 때 마침 어의가 택의 맥을 짚고 있었고, 정환은 그런 어의에게 다가가 물었다.

 “살릴 수 있겠느냐.”

 그 물음에 어의는 침상 위에 택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정환의 앞에 엎드리며 말했다.

 “아마 힘들듯하옵니다. 폐하 무능한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그런 어의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환은 이를 갈며 어의의 멱살을 잡아끌었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어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살려라.”

 “..예?”

 “살려내란 말이다, 어떻게든 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너와 네 어린딸년을 함께 화비의 무덤에 껴묻거리로 묻어버릴 것이니."

 "폐..폐하!!"

 "시끄럽다! 죽는 것이 그리도 두려우면 이렇게 바닥에 개처럼 엎드려 내게 빌 시간에!! 화비에게로 가 무엇이든 해보란 말이다!!!!”

 말이 끝나자 정환은 어의의 멱살을 던지다 시피하며 놓았고, 정환의 말에 어의는 거의 기다시피 하여서 택에게로 다가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온 정신을 다해 택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날 밤 택은 살았다,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날부터 택은 약의 후유증으로 한쪽다리를 절게 되어버렸고, 그날 이후 몇 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그들 사이의 분위기는 마치 그 사건이 일어나던 겨울에 멈춘 듯 냉랭했다. 또한 둘의 시선 끝에는 더 이상 서로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서로를 향하여 흐르던 마음의 길 또한 억지로 굳게 걸어 잠가 버렸다. 그렇게 서서히 택에게 정환은 존엄하신 황제가, 정환에게 택은 일개 후궁이 되어갔을 뿐이었다.

 

 한참을 연꽃 봉우리만 매만지던 황제는 다시 배를 돌려 자신이 배에 올랐던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점에 도착한 정환은 배에서 내렸고 곧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같은 시각 황궁 밖 산기슭에 있는 작은 암자 앞에는 수많은 장정들이 결연한 표정을 지은체로 창, 검을 들고 서있었고, 그들 앞 암자 위에는 장정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사내가 그런 장정들을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장정들을 바라보던 사내는 큰소리로 장정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잘들 해주었다. 우리는 정확하게 오늘 자정에 황궁을 칠 것이다! 황제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겼던 그 고통을 처절하게 치르게끔 해주자!”

 “와아아아아아!!!!!”

 반란을 의미하는 말들을 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이 사내는 정환의 손에 눈을 잃고 자결한 후 효수 당한 택의 시비 인영의 오라비였다. 그는 궐에 들어갔던 누이가 정환에 의해 끔찍하고 비참하게 죽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몇 년 동안 군사들을 모으고 훈련시키며 정환에게 복수를 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동생의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 탓인지 그의 눈은 그늘 탓에 어둑어둑한 암자 밑에서 맹수의 눈처럼 번뜩이며 빛났다.

 늦은 시각 집무실에서 상소문들을 살피던 정환은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상소를 내려놓으며 손으로 눈가를 연거푸 쓸었다. 그리고는 기다란 용포의 소매에서 천에 싸인 기다란 막대 같은 것을 꺼내어 천천히 싸여있던 천을 푸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천을 다 풀자 나타난 것은 소담스런 꽃가지 모양의 머리꽂이였다. 그 머리꽂이를 보며 푸스스 웃던 정환은 돌연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꽂이를 천으로 싸 용포의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고 내려놓았던 상소를 들어 올려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상소를 손에 쥔지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는 내관에게 무슨 일이냐고 호통을 칠까라는 생각을 하는 도중 큰소리를 내며 집무실의 문이 열렸고 상선이 뛰어들어 왔다. 그리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반란, 반란입니다. 폐하!!!”

 “뭐라!!”

 “폐하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폐하!!폐하!!!!!”

 반란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정환은 몸을 피해야한다는 내관들의 외침을 뒤로하고 검 하나를 든 채로 별궁을 향하여 내달렸다. 이미 그의 귀에는 피가 끓는 듯한 내관들의 외침도, 서럽게 통곡하는 상궁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의 귀를 가득히 매운 소리는 오직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화비 택의 목소리뿐이었으니. 한참을 몸을 달려 별궁에 도착한 정환은 문을 열어젖히고 곧장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침상에 앉아있던 택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택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택을 끌어안은 정환에 택은 놀라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을 끌어안은 그를 밀어내려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그는 미동도 않고 한참동안 택을 품에 가두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환은 조심스레 택을 품에서 때어내 눈을 맞추며 단호하게 명하였다.

 "몇 시진 전 그대에게 내린 별궁 유폐명령을 잊지는 않았겠지! 그러니 화비는 단 한발자국도 별궁을 벗어나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그런 정환에 말에 혼란스러운 표정이던 택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지며 울듯 한 표정으로 변하여 갔고, 말이 끝나자마자 택은 정환을 밀어내기 시작하며 소리쳤다.

 "가십시오!! 곧 반란군들이 들이닥칠 것 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제발!..."

 "알겠느냐고 물었다!!"

 그러한 택의 애절한 밀어냄에도 정환은 그저 알았느냐고 계속하여 되물을 뿐이었고 시간이 지체됨에 점점 불안해진 택은 긍정을 표하며 다시 정환을 떠밀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이제 저는 황명을 지킬 테니 폐하께서는 가십시오! 제발 가시란 말입니다. 어서요 어서!"

 그러자 정환은 미간을 살풋 찡그리고는 택이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자신이 과거에 택에게 했던 말을 이용하여 말을 이어간다.

 "자꾸 어디를 그럴게 가란 말이냐! 내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절대로 나의 곁을 뜰 수 없다고. 난 내 말을 지켜야겠다. 그러니 너는 얌전히 내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리거라."

 '별궁 안에서 자신을 기다려라.'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 택이 아니지만 자신의 추측이  잘못되었기를 바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정환에 되묻는 택이었다.

 "폐하 무엇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말하였지 않느냐 내말을 지킬 것이라고."

 떨리는 택의 목소리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을 한 정환이었고, 그러한 정환탓에 고통스레 일그러졌던 얼굴위로 눈물방울들을 흘려보내는 택이었다. 애처로이 눈물을 흘리는 택은 더 이상 정환을 밀어내지 않았고 오히려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며 자신을 두고 밖으로 나가려는 정환을 붙잡았다.

 "폐하!!! 안됩니다!! 하지마세요!! 제발...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런 택의 손을 자신의 옷자락에서 때어 자신의 손으로 붇잡고 다른 손으로는 택의 젖은 눈가를 훔쳐 주는 정환이었다.

 "곧 오마,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리거라."

 아이를 달래듯 다정스레 말하며 미소를 짓던 정환은 밖에서 들리는 비명소리가 점점 가까워짐을 느끼며 일어서 문을 향해 뛰었다. 그런 정환을 붙잡으려 휘청거리며 침상에서 일어나는 택이었지만 이미 문은 정환에 의해 굳게 닫힌 후였고, 성치 않은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문을 향해 가 보았으나 이미 정환에 의해 밖에서 굳게 잠겨 아무리 흔들어도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안에서 택이 문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던 그때 정환은 또 다른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족히 20명은 되어 보이는 군사들과 싸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 놈, 한 놈 베어가며 전각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지키고 있던 정환은 결국 왼쪽 팔을 베였고, 정환의 팔에서 흘러내린 핏줄기가 방울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자신의 피를 보며 정환은 처음으로 이 피가 자신의 것 이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정환의 목 쪽으로 검 하나가 날아들었으나 정환은 그 검을 받아쳐낸 뒤 검의 주인의 목에 가느다란 붉은 선을 새겨 주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치열하게 접전을 벌인 끝에 군사 둘과 정환만이 별궁의 마당에 남았다. 하지만 이미 정환의 몸은 상처 투성이었다. 입 밖으로 울컥하며 나오려는 핏덩이 들을 삼키며 두 명의 군사를 향해 정환은 힘껏 뛰었다. 그시각 택은 한참을 손으로 문을 두들기다가 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아 주위를 둘러보다 넘어져 있는 의자를 발견하고 의자를 들어 올려 문을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을 쳤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고 손에서는 피가 흐를 때쯤 문이 부서졌다. 결국 부서져 버린 문을 넘어서 택은 전각 밖으로 나왔고, 그곳에는 수많은 시체들 사이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는 정환이 있었다. 택은 그런 정환을 향하여 전력을 다하여 뛰었다. 말을 듣지 않는 한쪽 다리 탓에 구르고 넘어지면서도 전력을 다하여 정환을 향해 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정환의 앞에 도착한 택은 주저앉아 정환의 상체를 일으켜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정신 차려보십시오. 곧 온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발 눈을 떠보십시오.”

 그런 택의 간절한 부름에 감겨있던 정환의 눈이 힘겹게 뜨이고 정환은 살며시 웃으며 택을 바라보고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만 울거라, 얼굴이 엉망이 되지 않았느냐.”

 “폐하께서.. 저 때문에.. 저 때문에...”

 “네 탓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

 시도 때도 없이 울컥거리며 올라오는 핏덩이들을 애써 삼켜내며 담담한척 택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환이었고 그런 손길을 묵묵히 받으며 정환을 내려다보고 있는 택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본지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정환이 자신의 용포 소매에서 천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어 푸르기 시작했다. 택은 그것이 무엇일까라고 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계속하여 손으로 정환의 얼굴을 매만졌다. 천을 다 푸른 정환은 손을 뻗어 그 물건을 택의 머리에 단정하게 꽂아주었고. 그제야 택이 정환에게 그 물건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진작 꽂아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주게 되니 기분이 묘하구나.”

 “폐하 이것이 무엇입니까?”

 “머리꽂이다. 꽃가지의 모양을 형상화 한 장신구 여서 인지 네게 참 잘 어울리는 구나.”

 “폐하, 이런 것 필요 없으니 어서 일어나 보세요...”

 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환은 결국 삼키고 삼키던 핏덩이들을 토해 냈다. 그런 정환에 크게 놀란 택은 간신히 멈추었던 눈물을 다시 쏟아내며 정환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폐하, 신첩 무섭습니다. 그러니 어서 털고 일어나십시오..”

 그러자 정환의 눈에서도 가는 눈물 줄기가 살며시 흘러 내렸다. 그리고 정환은 택의 눈가를 문질러주며 남은 온 힘을 짜내어 웃었고, 택의 귀에도 간신히 들릴 정도의 크기로 읊조렸다.

 “어서 가거라. 어서 궁을 떠나 안전한 곳에서 꽃 같은 여인과 혼인도 하고, 토끼같은 자식도 낳으며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라. 황명이니라. 알겠느냐?”

 “싫어요. 싫습니다. 폐하 절 보내지 마세요. 제발 절 혼자 보내지 마십시오.”

 “언제나 날 떠나고자 하지 않았더냐. 자유로운 곳에서 자유롭게 살거라.”

 “필요 없습니다. 자유고 뭐고 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죽지 마세요. 제발 절두고 혼자 가지 마세요...”

 “택아 내 딴에 너를 위해 했다 믿었던 행동들이 이제와 보니 다 나를 위했던 일들 이었구나.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이미 다 잊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폐하.”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이라니요.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연모한다. 진정으로 연모한다...”

 연모한다며 택의 얼굴을 향해 뻗던 정환의 손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택은 그런 정환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얼굴로 가져가 비비며 울부짖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부짖던 택은 눈물을 닦으며 정환의 손을 가만히 내린 후 곧게 뉘인 정환을 끌어안고, 빙그레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폐하.. 이번만은 황명을 따르지 못 하겠습니다. 아마도 곧 폐하를 따라 갈 것 같으니 일찍 왔다고 너무 나무라지는 마십시오...”

 그런 택의 독백이 끝나자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 빗물들은 핏자국을 눈물자국을 모두 말끔히 씻어내려 주고 있었다. 하늘에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빗방울에서 풍기는 비릿한 물비린내가 코끝을 스치고, 그 빗방울들이 택의 눈물들을 다 씻어 주었을 때쯤 저 멀리서 반군들이 별궁을 향하여 새까맣게 밀려오고 있었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는 수많은 화살들이 섞여 택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택은 살며시 눈을 감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이번 생에서는 폐하께오서 먼저 신첩을 찾고, 아파하고, 지키셨으니 다음 생에는 반드시 신첩이 먼저 폐하를 찾고, 아파하고, 지키겠습니다. 연모합니다. 폐하 아니, 정환...”

 

 그렇게 그들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시들어가던 꽃은 꺾이고, 뭉개져 결국 보기 싫고, 지저분한 얼룩만을 남겼다. 허나 이것은 완연한 끝이 아니리. 그 얼룩만은 언제나 기억 속에 희미하게라도 남아 전해지고, 전해지고 전해질것 이기에.

 

 검은 우산 하나가 쏟아지는 빗방울들을 튕기며 천천히 움직인다. 우산에 튕겨 떨어지는 빗물에서 풍기는 물비린내가 퍽 정겹다. 얼마 가지 않아 그 우산이 한 건물로 들어가고 건물 출입구 옆의 입간판에는 화국 유물 틀별전 이라는 글씨가 큼직하게 박혀있다. 우산에 비닐을 씌우며 피곤하다는 듯 천천히 이동하는 사내, 그러니까 최택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부터 계속해서 꿈에 나오는 한 남자의 얼굴과 화국 유물 특별전을 본 후 보고서를 작성 하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어지럽게 뒤섞여 흩어져있어 머리가 깨질듯 복잡 게 얽혀진 듯 하다. 그런 복잡함은 애써 뒤로한 체 보고서를 위해 전시실을 돌던 택은 이내 한 장신구 앞에 멈춰 선다. 꽃가지의 형태를 한 머리 장신구를 보니 왜인지 갑자기 눈물이 나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그 장신구 앞에 멈춰서있는 또 다른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궁금함에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을 확인한 택은 그가 자신의 꿈에 나오던 남자라는 사실에 왜인지 모를 기쁨에 사로잡히고, 자신도 모르게 의도치 않은 한마디를 입 밖으로 조용히 내뱉는다.

 “찾았..다.”

 

막이 내려가 멈춰버렸던 그들의 시대가, 시들고 뭉개졌으며 스러져 버렸던 꽃이, 다시 피어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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