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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뜩 취해서 고개를 꾸벅이던 최택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 말라니깐요. 웅얼거리면서도 제법 매섭게 째려본다. 슬쩍 손을 잡았던 정환이 입을 비죽 내밀며 손을 내렸다.

 즐겁게 흥이 달아오른 고기 집은 시끄러웠고, 식어가는 고기와 구석에 처박힌 양파의 탄내로 가득했다. 두 번의 이직으로 겨우 정착한 직장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일도 잘 맞았다. 작은 규모의 회사라 사장이나 직원이나 허물없이 잘 지낸다. 덕분에 3차까지 빠지는 사람 한 명 없이 전원 참석. 다들 배가 터지기 직전이었지만 그래도 안주는 시킨다. 손도 거의 대지 않은 음식들을 앞에 두고 술잔만 빠르게 비워졌다.

 "류대리. 택이씨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먼저 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

 "괜찮아, 괜찮아. 내가 계속 업고 다니면 돼. 정환 씨도 우선, 마셔마셔!"

 말해 뭣하나.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밥그릇한테 인사 중이신가 우리 택이씨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정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어어. 얼른 손을 뻗어 부딪치기 직전인 택의 이마를 받았다. 아슬아슬하게 세이브. 하마터면 쌈장에 코를 처박을 뻔 한 택은 정환의 손이 닿는 줄도 모르고 뻗은 모양이었다. 동룡도 만취해서 소주병에 숟가락 꼽고 난리가 났는데 업고 다니길 누굴 업고 다닌단 말인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사장도 이미 필름은 끊긴 듯했다.

 쭉쭉 오르는 매출에 신난 주인아주머니가 컵을 쌓아 폭탄주 묘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모두의 정신이 팔린 사이 정환은 얼른 가방을 챙겼다. 택을 업고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좀 마른 편이긴 하지만 키도 있고 만취한 상태라 좀 무거운 게 아니었다. 비틀대며 겨우 도로로 걸어 나와 벤치에 택을 앉혔다. 이제 어떻게 한담. 마음 같아서는 어디 방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아직 손도 못 잡았는데. 그랬다가는 정말 뺨이라도 맞을 것 같았다. 집에는 부모님과 형이 계시고.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고민에 잠겼다.

 "정환씨이."

 반쯤 눈을 뜬 택이 정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내밀어진 손을 잡고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찬바람을 쐬면서 술이 좀 깬 모양인데, 다리가 꼬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정환에게 안기다시피 한 택이 느리게 말했다.

 "저 먼저 가볼게요."

 "괜찮겠어요?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정환 씨는 콩나물 무침 좋아하시죠. 감사합니다아."

 취해가지고 아주 아무 말이나 막 한다. 택시를 잡으려는 건지 도로 가까이로 걸어가는데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얼른 다가간 정환이 비틀대는 택의 팔을 잡았다. 택시를 잡을 때까지 만이라도 좀.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택시가 잘 잡히질 않았다. 택을 보내고 나면 겨우 서너시간 자고 다시 출근해야 할 판이었다. 정환이 저도 모르게 뚱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내가 택이씨 데리고 나와 준건데. 나중에 밥이라도 좀 사요."

 그 말을 들은 택이 택시를 잡기 위해 휘젓던 팔을 멈췄다. 아, 너무 나갔나. 겨우 이거가지고 밥은 좀 아닌가. 온갖 생각이 정환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택이 비틀대며 몸을 돌려 정환과 마주보고 섰다.

 "그래요. 오늘은 쫌 기특하다. 어디보자아."

 가방을 뒤적거리던 택이 빙긋 웃으며 스윽 고개를 들었다.

 "여기요. 선물."

 택의 손이 정환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쑥 들어갔다 나왔다. 정환이 얼빠진 표정으로 택을 바라봤지만 때마침 택시가 멈춰 선다. 그럼, 정환 씨 안녕! 내일 봐요! 택시는 해맑게 손 흔드는 택을 태우고 힘차게 출발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택의 손이 다녀갔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잡히는 것은, 볼펜.

 서른하나 김정환. 반년 넘게 대쉬하던 회사 동료에게 처음으로 선물 받았다. 꼭 저같이 생긴 토끼가 달린 핑크색 볼펜을.

 

*

 

 "어머, 진주 왔어?"

 "진주야! 오랜만이네? 언니 기억나?"

 사무실 칸막이 사이로 귀여운 얼굴이 튀어나왔다. 제일 먼저 발견한 덕선이 진주를 번쩍 안아들었다. 선우의 지극한 동생 사랑은 직원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어이, 성대리. 너네 동생 귀여운 건 나도 아는데, 아무리 그래도 회사까지 데려오면 어떡하냐?"

 "사장님 외근 나가셨잖아. 류대리 너만 입 다물면 돼. 어머니 급한 일 생기셨다고 잠깐만 맡아 달래서."

 자리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던 정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진주가 아닌 그 뒤로 들어오는 택에게 향했다. 복도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오던 택이 진주를 발견했다. 눈을 마주치며 쭈그려 앉아 진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환은 진주를 따라 환하게 웃는 택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진주 곁에 모여들었던 직원들은 금세 자리로 돌아갔다. 미옥은 자판을 두드리다가 선우에게 진주 몇 시 까지 있냐고 묻기도 했다. 다들 선우의 어린 동생과 놀고 싶은 마음은 한 가득이었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일이 많기는 선우도 마찬가지였다. 마냥 진주랑 놀아줄 수도 없고, 진주만 두고 일을 할 수도 없었다.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혀놓고 일을 하긴 하는데 아직 초등학교도 안 간 아이가 가만히 앉아있을 리가 없었다. 선우 옆자리의 덕선에게 막대사탕을 받기도 했고, 동룡의 자리에서 꼼지락 거리기도 했다. 모니터 보랴 진주 곁눈질 하랴 선우의 눈이 바쁘게 돌아갔다.

 진주가 택의 자리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할 때에는 정환의 손가락이 멈췄다. 택의 자리를 곁눈질하며 아이와 돌아주고 있는 아이 같은 최택을 바라보았다. 잠시 머물렀던 진주가 떠나자 택 역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진주와 눈이 마주친 것은 정환이었다. 혹시 제 자리로 올까 얼른 몸을 돌렸지만 경쾌한 발걸음 소리는 기어코 정환의 옆으로 다가왔다. 붙임성이 좋은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아이는 어려웠다. 정환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모야?"

 진주가 가리킨 것은 정환의 책상 위에 놓인 토끼 볼펜이었다. 진주의 낮은 시선에서 올려다보면 끝에 달린 토끼 인형만 보였을 것이다. 여직원들이 있다고는 해도 공적인 일을 하는 회사에서 진주가 흥미 있어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택의 것이었던, 지금은 정환의 것인 토끼 볼펜.

 "저거 갖고 싶어!"

 이, 이거? 정환이 볼펜을 가리키자 진주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다 돼도 이건 좀 그런데. 안 되는데. 정환이 망설이자 진주가 크게 말했다. 저거 주라! 진주의 칭얼대던 소리에 선우가 얼른 달려왔다. 혹시 동료들한테 엄한 떼를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었다. 얼른 진주를 안아든 선우가 말했다.

 "정환 씨. 진짜 죄송해요. 혹시 이거 진주 주실 수 있을까요? 이거라도 있어야 얌전히 있을 것 같아서."

 "아. 근데 이건 좀."

 정환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확실히 정환의 취향과는 멀었고 딱히 사용하지도 않는 볼펜이었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붙이는 중이었다.

 "중요하신 건가 봐요. 그럼 어쩔 수 없지만."

 선우의 품에 안긴 진주가 정환의 책상을 보며 계속 칭얼거렸다. 다른 직원들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 선우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하긴. 최택은 나한테 이거 준 것도 기억 못 하던데. 뒤를 돌아보니 언제 또 나간건지 택은 자리에 없었다. 정환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컵에 꽂힌 볼펜을 들고 진주에게 내밀었다.

 "진주야. 여기."

 "우와!"

 정환이 내민 볼펜을 얼른 받아든 진주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금세 조용해져서 토끼 귀를 만지작거린다. 선우도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이었다.

 "진짜 고마워요. 내가 다음에 밥 한 번 살게요. 아, 그리고 이것도. 1층에 있는 카페 커피 쿠폰이에요."

 "됐어요, 뭘 이런걸 주고 그래. 나 어차피 커피 안 마셔요."

 "그래도 받아요. 내가 고마워서 주는 거니까."

 정환의 책상 위에 커피 교환권을 올려놓은 선우는 자리로 돌아갔다.

 허전해진 연필꽂이와, 책상 위의 아메리카노 쿠폰. 정환은 쿠폰을 대충 주머니에 구겨 넣고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

 

 퇴근을 삼십 분 정도 남겨둔 시간이었다. 오늘 해야 할 업무는 이미 끝났다. 시간이나 때우자는 마음으로 담배를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 끝에는 작은 테라스가 있었다. 문을 열었더니 찬바람이 정환을 맞았다. 먼저 와있던 보라가 눈인사를 건넸다.

 "웬일이세요. 선배 원래 담배 안 피우시잖아요."

 "카페인이 모자라서 니코틴이라도 채우러 왔다."

 보라는 하루에 커피를 세 잔 이상씩 마신다. 거의 계속 입에 달고 산다고 해도 될 정도다. 어제 회식에서 자리를 잘못 잡아 사장님 옆자리에 앉은 게 문제였다. 덕분에 정환과 택이 먼저 빠져나가고, 다른 직원들도 하나 둘 뻗고 나서도, 보라는 동룡과 사장님의 폭주를 그대로 지켜봐야 했다. 첫차를 타고 집에 가긴 했지만 겨우 옷을 갈아입고 눈을 붙인 정도였다. 그 탓에 지갑을 두고 나오고 말았다. 보라 성격에 누구한테 커피 사달라는 말도 못하고 하루 종일 물만 마셨다.

 "담배도 김재준 거야."

 "제가 커피 사드려요? 무려 선배가 지갑을 놓고 오신 역사적인 날인,"

 "야, 김정환. 너 최택이랑은 잘 돼 가냐?"

 갑작스러운 보라의 말에 정환은 입을 꾹 다물었다.

 택을 좋아한다는 것을 보라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모른다. 당사자인 택이야 물론 대놓고 호감을 표현하는 정환의 마음을 알다 못해 귀찮아할 정도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절대 티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외근을 나가던 차에 너 최택 좋아하지? 하고 툭 던진 보라의 말에 정환은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었다. 아니라고 잡아떼려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그 후로도 종종 보라는 택을 약점 삼아 정환을 놀리곤 했다.

 원래 정환은 감정표현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는 타입이었다. 그렇게 놓친 사람이 여럿. 출근 첫 날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택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다. 어딘지 모르게 허술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씨까지. 보면 볼수록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고 말았다. 이대로 속만 앓다가 또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서 표현을 하긴 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좀 어설펐다.

 나 택이씨 좋아해요. 그러니까 내가 많이 표현해도 너무 놀라지 말아줘요.

 그 후로 매일 아침 출근 전에 도착하는 문자들. 택이씨, 이따 저랑 저녁 먹을래요? 택이씨, 오늘 저 외근 가서 택이씨 얼굴 못 봐요. 택이씨, 요새 감기가 유행한대요. 택이씨, 택이씨, 택이씨. 직장동료를 차단할 수도 없고 곤란하다며 택이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럼 어떡해요. 좋은데. 매일 전화할 수는 없잖아요. 정환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면 택도 모질게 대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늘어가던 애정표현이 요즘은 꽤나 과감해졌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을 때 택의 어깨를 주무른다거나, 회식 자리에서 슬며시 손을 잡아보기도 한다거나. 아무튼 갈 길은 한참 멀었다.

 "선배 놀리고 그러면 내가 류대리한테 확 불어버리는 수가 있어."

 손이 시렸다. 담배를 다 피고 나서 얼른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문득 잡히는 종이를 꺼냈다. 잊고 있었던 커피 쿠폰이었다.

 "선배. 제가 좋은 거 드릴게요."

 "뭔데. ……어어!"

 "그러니까 이거 받으시고 류대리한텐 아무 말 말아주세요. 류대리가 알면 회사 사람들 다 알게 된다고요."

 보라가 얼른 커피 쿠폰을 받아들었다. 슬슬 들어갈 시간이었다. 정환보다 더 오래 밖에 서있었던 보라가 춥다며 재촉했다. 테라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사무실로 향하며 보라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틈만 나면 최택 쳐다보더라. 숨길 거면 제대로 숨겨."

 "……네. 아 맞다. 저 그럼 쿠폰 대신 다른 거라도 주세요."

 복도를 걷던 정환이 발걸음을 멈추고 보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갑 없다니까?"

 "그냥 아무 거나요. 그거 택이씨 볼펜이랑 바꾼 거란 말이에요."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라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씨익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 정환에게 내밀었다.

 "선배가 좋은 거 준다. 이거."

 보라가 내민 것은 숙취해소음료의 뚜껑이었다. 뒤집어보니 안쪽에 시리얼 번호가 쓰여 있다.

 "와. 저한테 쓰레기 버리시는 거예요?"

 "쓰레기 아니야. 인터넷에 그거 입력하면 상품 준대.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병뚜껑을 손에 쥐고 보라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정환의 못마땅한 표정은 택을 보자 금세 풀어졌다. 자리에 앉은 보라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환은 의자를 쭉 뒤로 빼고 택에게 말을 걸었다.

 "택이씨. 어디 갔다 왔어요? 아까 자리에 없던데."

 "과장님께 보고서 내고 왔어요."

 "그렇구나. 오늘은 야근 없죠? 바로 퇴근,"

 "정환 씨는 성팀장님이랑 어디 갔다 오셨어요?"

 어쩐지 택의 얼굴이 조금 뾰루퉁해 보인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

 정환은 눈을 깜빡이며 손에 든 뚜껑을 꾹 쥐었다.

 

*

 

 저녁 메뉴는 정환이 좋아하는 갈치조림이었지만, 겨우 몇 숟갈 떠먹다가 그냥 방으로 들어왔다. 퇴근 직전 봤던 택의 미묘한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그런 표정은 처음 보는데. 기분 좋을 때의 웃음소리나, 과장님한테 까였을 때의 축 처진 어깨나, 밥 먹을 때의 습관들. 택에 대한 사소한 것까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 위에 누웠다. 천장에 택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동생아.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정봉이 슬며시 방문을 열었다. 저녁이 시원찮은 정환을 보고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정봉이 의자에 앉아 정환이 누운 침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너의 그 택이씨와 잘 안 되어서 그러는 것 같구나."

 "그 표정은 뭐지. 나한테 화가 났나? 설마 질투? ……형, 택이씨가 성팀장님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성팀장이라면 그 목소리 크고 무서운 너의 회사 선배님을 말하는 것이니? 택이씨 같이 순한 사람이 그럴 리가 없어."

 "그건 그래. 어째 형이 나보다 우리 사무실 사람들을 더 잘 아는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깊고도 긴 한숨을 쉬었다. 금요일 저녁은 택과 같이 하고 싶었는데. 택은 평소보다 더 쌀쌀맞은 태도로 먼저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옷부터 갈아입고 씻으면서 다시 생각해보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셔츠를 벗어 행거에 걸어놓고, 바지를 벗으려다 문득 손을 멈췄다.

 "형. 요새 이거 모은다고 하지 않았어?"

 바지 주머니에서 보라에게 받은 병뚜껑을 꺼냈다. 술도 안 마시는 애가 숙취해소음료에 꽂혔다고 투덜대던 미란의 말이 떠올랐다. 정환이 정봉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정봉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의 책상 서랍에 한가득 들어있는 뚜껑들과 같은 것이었다.

 "맞아! 나에게 주는 것이니? 정말 고맙다!"

 정봉은 뚜껑을 받자마자 제 방으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정환이 옷을 다 갈아입고 욕실로 가기 위해 방을 나왔다. 정봉의 우렁찬 환호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쿵쿵대며 거실로 달려 나와 정환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는다.

 "동생아! 사랑한다! 드디어!"

 이벤트 상품 1등은 해외여행 항공권. 2등은 SUV 차. 3등은 자전거. 그리고 정봉이 그토록 받고 싶었던 선물은 4등 블록 쌓기 세트.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그까짓 블록이야 돈 주고 사면되는 거지만, 상품으로 당첨되는 건 특별하다는 정봉의 지론이었다. 목석처럼 서있는 정환에게 정봉이 찐한 포옹과 뽀뽀를 했다. 아 쫌. 정환이 슬쩍 정봉을 밀어냈다.

 "고맙다, 동생아. 형이 이 은혜는 정말 잊지 않을게."

 "은혜는 무슨. ……아, 나 그럼 대신 뭐라도 줘."

 "응? 용돈이 필요하니?"

 "아니. 그거 커피 쿠폰, 아니, 택이씨 볼펜이랑 바꾼 거야. 아무거나 줘."

 잠시 고민하던 정봉이 정환을 끌고 제 방으로 갔다. 여기 있는 거 뭐든 가져도 좋단다! 호기롭게 말했지만 전부 잡다한 것들뿐이라 정환이 가져갈만한 것은 없었다. 딱 하나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 위에 놓인 정봉의 차키였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한 정환과 달리 한참이나 부모님 속을 썩인 후에야 일을 시작한 정봉이었다. 감격스러운 마음에 미란이 큰아들에게 먼저 차를 선물했다. 정환의 회사는 차가 많이 막히는 쪽이라 지하철이 훨씬 빨라서 딱히 필요하지도 않았다.

 "내일 토요일이잖아. 어디 안 가지? 차나 빌려줘."

 "겨우 그것으로 되겠니? 여기 이 딱지 컬렉션도 줄 수 있단다."

 딱히 약속이 없기는 정환도 마찬가지였다. 의아해하는 정봉을 뒤로하고 방을 나왔다.

 가고 싶은 곳은 없지만, 보고 싶은 사람은 있었다. 만나러 가면 만나 줄까. 만취한 택이 택시 운전사에게 우렁차게 읊었던 동네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광대가 움찔거렸다. 정환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샤워를 시작했다.

 

*

 

 최택, 최택, 노래를 부르며 시내로 차를 끌고 나왔다. 신호에 걸려서 차를 세웠는데, 그의 옆으로 익숙한 회사 동료가 지나갔다. 정환이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택은 아니었다.

 "어이, 류대리! 어디가?"

 "어어어! 김대리, 김대리, 김대리! 제발 나 좀 살려줘!"

 창문을 내려서 인사나 하려 했는데, 정환의 얼굴을 본 동룡이 급히 달려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조수석 문을 열어달라며 손잡이를 마구 잡아당긴다. 신호가 바뀌고 뒤에서 클락션이 들렸다. 하는 수 없이 문을 열어 얼른 동룡을 태우고 우선 출발했다.

 "대체 뭐야?"

 "진짜 미안. 근데 정환 씨 지금 어디 급한 일 있는 거야 혹시? 아니면 제발 나 좀 살려줘."

 "그냥 나온 거야. 약속 없어. 무슨 일인데?"

 "나 집에 조부장님 오신대."

 아아. 더 설명하지 않아도 얼마나 급한 상황인지 한 번에 이해가 갔다. 동룡은 집과 회사가 멀어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의 집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아마 회사의 모든 남자 직원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빨간딱지 붙은 것들이 대놓고 티비 앞에 놓여있기까지 했다. 그런 집에 갑자기 어머니가 오신다면, 동룡의 미래는 안 봐도 뻔했다.

 "급한 거 아니면 나 좀 태워다주라. 응?"

 "그냥 류대리가 운전해서 가. 나 당장 차 필요한거 아니니까."

 잠시 차를 세워놓고 동룡과 자리를 바꾸기 위해 내렸다. 그 짧은 순간에, 택이씨 만나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급한 동룡에게 차 대신 뭘 달라고 하기도 뭐했다. 동룡이 운전석에 타자 얼른 가라며 정환이 차를 툭툭 쳤다. 조수석 창문이 스윽 내려졌다.

 "김대리 진짜 고마워. 다음에 내가 밥 살게. 아, 그리고 사거리 영화관에 지금 택이씨 있을 텐데, 할 일 없으면 같이 영화라도 보던가. 그럼 나간다!"

 빠르게 제 할 말만 쏟아내고는 얼른 출발해버린다. 잠시 그대로 선 정환은 방금 제가 들은 말을 곱씹었다. 어디에, 누가 있다고?

 

*

 

 "어, 정환 씨."

 매표소 앞 의자에 앉아있던 택이 뛰어오는 정환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의 앞에 도착한 정환이 잠시 숨을 골랐다. 동룡과 만났던 일을 얘기하자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우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금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영화는 누가 보자고 한 거예요?"

 "제가요.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마침 류대리님이 시간 된다고 하셔서."

 "나는요?"

 정환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택과 얼굴을 맞춰왔다. 늘 정환의 웃는 얼굴만 봐오던 택에겐 낯선 느낌이었다.

 "정환 씨는……. 저번에 멜로 영화 안 좋아한다고 하셔서."

 지나가는 말로 했을 텐데. 그런 것까지 기억하나 싶어 새삼 머쓱해졌다. 정환이 금세 표정을 풀고 평소의 그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 뭐야. 괜히 질투났잖아요. 어제 택이씨처럼."

 "네?"

 "택이씨. 어제 질투했죠? 내가 성팀장님이랑 같이 들어와서. 혹시 성팀장님 좋아해요?"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럼. 나 좋아해요?"

 "……."

 맞다는 말도 하지 못했고, 아니라는 말도 하지 못한다. 입을 꾹 다문 택이 손에 든 영화표만 만지작거렸다. 정환은 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영화 시간 다 됐어요. 얼른 들어가요. 내가 같이 볼 테니까."

 "멜로 영화 안 좋아하신다고……."

 "택이씨랑 영화 보는데 지금 무슨 영화인지가 대수겠어요?"

 들어가야 할 영화관을 찾으며 정환이 조금 앞서 걸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택은 슬며시 제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나 택이씨 좋아해요. 그러니까 내가 많이 표현해도 너무 놀라지 말아줘요.

 고백인지 아닌지도 모를 이상한 말을 해놓고서. 머리나 쓰다듬고 말이야. 택의 입술이 비죽 나온 것을 정환은 보지 못했다.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주말이지만 그리 인기 있는 영화가 아니어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영화보고 약속 있어요?"

 "아니요. 없어요."

 "그럼 오늘에야 말로 나랑 저녁 먹어요."

 택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응? 정환이 다시 한 번 재촉하자 그제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고가 모두 끝나고 상영관 안의 불이 꺼졌다. 정환이 슬쩍 택의 손을 잡았다. 잠깐 놀라는 게 느껴졌지만 손을 빼진 않는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 정환이 택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택이씨. 그 날 볼펜 주고 가서 고마워요.

 영문을 모르는 택이 고개를 돌려 정환을 바라봤지만 그는 이미 시선을 스크린으로 돌린 후였다. 정환의 뜨거운 숨이 귓가에 간질거렸다. 보고 싶었던 영화였지만 어쩐지 집중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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